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신가?

열려라 에바다 2024. 9. 10. 17:11

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신가?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있는 내용과 교회의 신앙을 정리해서 3세기의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이면서 하나님인가? 처음에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본래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이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할 때,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때 제자들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聖子)이시요,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두 분의 하나님」(二神論)을 섬기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성경의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이 무너지게 된다. 그 뿐 아니라 또 보혜사 성령의 강림으로 그들은 三神신앙의 혼란에 빠질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통해서나 신앙고백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한 분과 같이 믿고, 섬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확실히 정리할 능력은 없었지만 세 분이 같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앙은 논리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초기 성도들의 신앙고백에서 시작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후세의 신학자들이 희랍철학의 힘을 빌어서 논리적으로 정리해 나갔던 것이다. 터툴리안에 이어서 오리게네스와, 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같은 신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나, 모두가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정리한 이론이 가장 성서에 가까운 최초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세기 말에 와서는 삼위일체 신관이 확립되었다.


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가? 라는 질문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왜, 삼위로 계시며 한 몸을 이루고 계시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비밀에 속하는 범주이므로, 사람이 알 수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알아본다. 즉 역으로 삼위일체 신앙의 당위성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똑같은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신은 신인데 성부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면, 유일신 신앙이 무너지고, 또 하나는 유대교인들처럼 메시아가 아닌 선지자에 불과한 인간이라고 할 때,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순교로 끝나고 만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나 죽음이 아닌 한 인간의 훌륭한 죽음으로 끝난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상 똑 같은 분이기에, 그리고 그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인류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 성령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감화력이나, 능력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모든 활동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 종속되었다든지 성부와 성자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때,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성화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과거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현재에 계시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독립적으로 계시면서 한 몸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고, 한 분이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는 주장을 할 경우(양태론), 결국에는 성부의 유일성은 강조되지만 성자와 성령의 위치는 무시되고 만다.


넷째,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이 무너지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인류의 구원도 성화도 없는 유대교와 같은 여호와 종교에 머물던지, 다신교로 떨어지든지 할 것이다.


이상적 신관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1.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근거


①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라는 구절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② 창세기 1:26, 11:7에 하나님 자신의 호칭에 복수를 사용했다.
③ 마태복음 3:16, 28:19, 고린도 후서 13:13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신다.
④ 빌립보서 2:6, 요한복음 10:30, 14:9에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이 나타난다.
요한복음 1:3은 성자의 창조 사역을 증거 한다.
⑤ 이사야 48:16, 63:10에서 영을 인격으로 표현하고, 사도행전 5:3-4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표현했고, 로마서 8:9, 11:14, 고린도전서 2:11-14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의 영 또는 성자의 영으로 나타난다.


위와 같은 성경구절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지만 삼위일체란 용어는 없다. 이러한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후세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신관을 논리적으로 정립했다.


2.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


한 마디로 말해서 설명이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사람이 완전히 알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약간의 설명이 가능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셋이 하나가 된다.」 「하나와 여럿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의 개념은 희랍 철학자들 사이에서 성립되었던 이론이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신관 정립에 최대한 참고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신관 확립에 가장 공이 큰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본질상 같은 분이지만 세 분이 고유한 인격과 특성을 가지고 존재하면서 일한다는 것이다. 「세 인격」과 「하나의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부, 성자, 성령 한 분, 한 분이 자신의 고유한 인격성과 주체성을 가지지만 사람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영원한 사랑과 성령으로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한 「점유와 순환」의 전통적 신학 개념이 있다. 「점유」라는 말은, 세 인격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설명하는 말로서 창조와 구원과 성화 사역은 세 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지만 창조는 성부께서, 구원은 성자께서, 성화는 성령께서 주체적으로 고유한 사역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순환」의 개념은 신적 세 인격이 서로 구분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인격들에 참여하고, 그들의 삶속에 들어가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며,
성령도 성부와 성자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여
서로 분리할 수 없이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항상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이 순환의 개념은 서로 구분되어 있는 세 인격들의 일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창조의 주체는 성부이지만 성자 성령도 창조 사역에 동참한 창조자이며, 구원의 주역은 성자이지만 성부와 성령도 구원자이며, 성화의 주인공은 성령이지만 성부와 성자도 성화의 하나님으로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서로 구분되어서 존재하고 일할지라도 항상 떨어지지 아니하고, 함께 존재하며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관을 이해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성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성부와 성령은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는가? 성자가 십자가에 달릴 때 성부와 성령도 성자 안에서 함께 고통을 당했다. 성자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었고 성부의 성령은 성자의 죽음을 안고 함께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성부는 죽지는 않았다. 마치 아들이 죽어 가는 것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며,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부모와 같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3. 삼위일체 신관의 특성과 우월성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유대교와 회교와 같은 일신론(一神論)이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여러 종교들처럼 다신론(多神論)이나, 범신론(汎神論)이 아니며
다신론과 일신론의 여러 가지 폐단을 극복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류에게 평등과 협력, 일치와 다양성,
자유와 책임과 같은 사상을 일으켰으며 인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가장 우월한 신이시다.



삼위일체(三位一體)는 무엇인가?


♣삼위일체에 대한 논란♣


삼위일체는 교회 안에서 많은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리우스주의 :그리스도 교회사가 전해 주는 바는 아리우스(Arius, 280 ?∼336)에 의하여 제기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설이다.
☛아리우스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5 ?∼373)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논란에 대한 해결♣


초기 교회는 이 일 때문에 니케아(Nicaea-지금 터키의 이스닉)에서 교회 총회를 열었습니다(325년).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그 후 또 성령론 문제로 교회는 또 한 번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성경적 진리로 받아들여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도 아리우스주의를 따르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면 '삼위일체'란 무슨 뜻인가?


성경학자들의 정의(定義)


(Strong, 조직신학, 304)"한 하나님의 본성에는 개체의 형상 아래 대표되어 있는 세 영원한 구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셋은 동등하다. 이 신성의 세 개성은 전적으로 계시의 진리인데 신약성경에는 조직적은 아니라도 똑똑하게 교시되어 있고 구약에도 이 교리의 희미한 자취는 암시되어 있다".


터툴리안의 주장 (삼위일체 술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160∼240)
"하나님에게는 세 개체가 있어서 모든 일에 피차 똑똑히 구별되고 동등하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도 성자도 아니다. 또한 각 개체는 다 같이 영원하며 신성의 속성은 세 개체에 한결같이 공통된다."


♣터툴리안이 주장한 것을 표로 나타내어 보라.


성부는 성자도 성령도 아니시고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성부도 성령도 아니시고 하나님이시며 성령도 성부와 성자가 아니시며 하나님이시다 임.


♣그러나 이것은 꼭 하나님의 모습이 이러하다 라고는 할 수가 없음은 잘못하면 삼신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세분이시지만 더 분명한 것은 한분이시다 라는 것 외엔 더 정확한 것은 하늘에서나 알 수 있음. 그러나 주어진 말씀 안에서 이해해보기로 함.


♣삼위일체 문제를 연구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삼위일체라는 말이 신학 술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쉽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가장 합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만든 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는 성경에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경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사상을 가장 합당하게 표현한 말임에는 틀림없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용어가 성경 용어인지 신학 용어인지 미리 아는 일은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누가 말하기를 "그게 성경 어디에 있는 말입니까? 성경에 없으니 비성경적입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지혜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이 삼위일체도 성경용어는 아니지만 신학적인 용어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는 전혀 삼위일체가 나타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표현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표현☚


마 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이미 앞에 삼위일체의 정의에서 지적되었듯이 구약성경에는 명확하게 삼위의 구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나타나 있다. 이 세분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삼위일체 문제인 것이다.


왜 구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성경의 모든 진리는 점진적으로 사람에게 계시되었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성경에 있는 진리를 모두 계시하시지 않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삼위일체의 진리도 역시 그것을 분명히 계시할 필요가 있을 그 때 계시해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진리를 명확히 보이셨다면, 그 당시 모든 민족들이 다신교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도 삼위일체로 깨닫기보다는 삼신의 존재로 이해하여 다신론적 사상에 빠질 가능성 때문에 그들에게 계시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경청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


신 6: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슥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하나님 몇 분이라고 합니까? 구약성경을 일관하여 나타난 사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계시로 쓰였고 그러므로 온 우주를 통하여 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경배 받으실 분이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삼위'란 무슨 뜻이며 '일체'란 무슨 뜻인가?


♣그런데 성경에 '하나'라고 쓰인 히브리어는 좀 생각해 볼만한 것이 있는 말이다. 히브리어에는 '하나'(혹은 일)를 가리키는 말이 둘이 있는데 절대 단일을 가리키는 '야히드'와 복합 단일을 나타내는 '에하드'가 그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에하드'를 쓰고 있다. 구약 성경 어느 곳에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하여 '야히드'를 쓴 곳이 없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엘로힘'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말로 직역을 하면 하나님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복수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하여 쓴 '하나님' 이란 말이 복수로 쓰인 것을 어떤 까닭일까?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복수 주어에 술어 동사는 단수입니다. 주어인 '하나님이'가 '엘로힘'이며 동사인 "창조하시니라"는 '바라'로써 단수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번역하자면 하나님들이 천지를 홀로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문법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1에는 그렇게 쓰였습니다. 이 사실은 삼위일체 사상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부를 때에 '우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26,27절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셨다.


다시 3장을 보겠습니다. 창 3:22"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이 말씀에는 우리중 하나라고 하시면서 그분의 신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여호와가 복수 개체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중 하나'라는 말씀이 복수 개체를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창세기6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창 11:6, 7"여호와께서 가라사대……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이 내용은 바벨탑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 동사인 '내려가서'(히브리어-레다-)는 실로 복수 동사입니다. 함께 내려가서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수 개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창세기 3:22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므로 '우리'라고 불리는 복수 개체들은 동일 인격자임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우리'라는 말은 이사야 6:8에도 나타난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 '거룩하다'고 하였는데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곳에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삼중으로 창화하고 있다. 이것은 삼위에 대한 송영임에 틀림없다고 삼위 일체 설을 믿는 자들은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여호와는 이름을 세 번 연거푸 부르면서 축복의 말을 선포한다.


첨에 함께 읽었던 말씀입니다. 민수기 6장24절입니다. 민 6:24∼26"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앞에서 '여호와'의 뜻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호와가 세 개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한 하나님이 세 개체로 자존하셨다는 말이다. 그럼 이 세 개체는 어떤 개체 인격들인가? 다시 말씀을 통하여 정리 해보겠습니다. 민수기 우리가 읽은 말씀과 고린도 후서의 말씀을 비교하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13장13절입니다. 고후 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바울은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의 이름으로 축복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민수기의 아론의 축복과 신약의 사도바울의 축복기도를 비교해 보시면 구약에서도 삼위일체의 사상이 있었음을 그리고 믿음의 노독들이 알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은혜 베푸시는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6:25에 '은혜 베푸시는 여호와'로 축복을 선포한다. 이것은 고린도후서의 '은혜의 예수님'과 병행절( 行節)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민수기에 은혜 베푸시는 여호와는 예수님이라고 능히 이해된다. 그러면 앞 절 24절과 뒷절 26절의 여호와가 남았죠 이분들은 하나님 곧 성부와 성령이심에 틀림없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생활을 주장하여 평강으로 이끄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평강을 선포하는 여호와는 성도의 교통을 주장하시는 성령이심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24절의 여호와는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삼위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곧 성부, 성자, 성령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다 알 수는 없다 할찌라도 나타난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시어서 이러한 혼란의 틈을 이용하여 들어오는 사단에게 틈 세를 주지 않고 믿음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길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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