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불리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말라(삼상 20:35-42)
해운대숨쉬는교회 9월 29일 주일강단.
성경: 사무엘상 20:35-42.
- 사무엘상강해 55 -
제목: 섣불리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말라
서론>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현재의 삶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아서는 이 운명을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분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늪에 빠져 발버둥을 쳐보지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자기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만큼 왔으면 암흑같은 터널 속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긴 터널이 계속되었을 때 느끼는 낙심, 절망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서 끝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자기가 요나단에게 말한 것처럼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요나단의 아버지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질 않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치지만, 언제 이 도망자의 삶이 끝날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처지를 보고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다윗의 처지를 보고 또한 여러분의 처지를 두고서 섣불리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데도 왜 현재의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까? 왜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고, 고난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우리 이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35-36)
우리는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면, 그 약속한 날과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내일 보자 해 놓고 정확한 시각을 말하지 않았다면, 날은 알지만, 시간은 모릅니다. 사무엘상 20장 5절에 보시면, 다윗은 요나단의 아버지가 자기를 헤칠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형 요나단에게 셋째 날 저녁까지 자기를 들에 숨게 해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나단은 12절 말씀에 보시면, 다윗에게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곧 초하루 또는 둘째 날에 자기 아버지 사울을 살펴서 그 의향이 선한지 아닌지를 알아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본문 35절 말씀에 보시면, 셋째 날 아침에 다윗에 관한 일을 알리러 시중드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들로 나갑니다.
다윗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요나단이 자기에게 길한 소식이든지, 흉한 소식이든지 알려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하루가 천 날 같이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행하실 일을 그 종 선지자에게 알려주지 아니하시는 한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때, 곧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이 요나단이 자기에게 소식을 알려주기까지 에셀 바위 뒤에서 숨죽이고 기다린 것처럼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다윗이 요나단을 믿지 못했다면, 에셀바위 뒤에서 셋째 날까지 숨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벌써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이제나저제나 요나단이 자기에게 가져올 소식을 기다린 것은 그가 약속을 지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도, 예측도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나단은 신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라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한글 개역 성경은 식언치 않으신다고 번역했습니다.
약속할 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약속해 놓고 매번 까마득히 잊어버리기도 하며 사람을 차별하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일, 그런 사람과의 약속은 무시하려 합니다. 나하고 친한 사람, 가까이 지내면 덕을 볼 수 있는 사람, 이렇게 사람 차별하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당장 위기를 피하려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지도 않으십니다.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사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겠지만, 요나단처럼 타인과의 약속도 신실하게 지켜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36절 말씀을 보시면,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내가 쏘는 화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에게 달려가라는 것은 요나단이 화살을 쏠 때 아이가 달리면 그 아이는 그 화살이 떨어지는 위치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에벨 바위 뒤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는 다윗을 의식해서 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화살을 지나치게 아이 위로 쏘아서 이를 지켜보는 다윗에게 알린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킴에 있어서 형식적으로 대충대충하지 않고 또한 의무감 때문에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오늘인지, 내일인지, 정확한 날과 시각을 알 수 없지만, 요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닥친 위험을 알리기 위해 화살을 지나치게 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는 징조나 싸인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며 믿고 기다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운명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입니다(37-40절)
우리가 내 처지나 남의 처지를 보며 그것이 운명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내게도 남에게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운명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또는 나를 향한 뜻이 있으시다, 라고 하는 말이 성경적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작정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섭리와 작정이 다른 것은 섭리는 변화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정은 절대불변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다, 뜻을 돌이키시다 라는 구절은 섭리에 속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5장에 보시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다.라는 말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에 예수 이름 외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에 속할까요? 하나님의 작정에 속합니다. 그것은 절대불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외에는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은 아이 뒤에서 외칩니다.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또 외칩니다. 지체 말고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요나단이 두 번 아이 뒤에서 외친 이유는, 한 번은 화살의 방향을 알려주려 한 것이고, 두 번째는 다윗에게 이제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여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활을 쏘아 화살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 것은, 쏘는 요나단이나 보는 다윗이나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꿀 수만 있으면 화살의 방향이 아이 앞쪽이 아니라 이쪽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화살의 방향을 요나단이 바꾸지 못한 것은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화살의 방향을 바꾸게 하실 분은 요나단이나 다윗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바꾸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살의 방향을 우리가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꾸어 주셔야 합니다. 이 화살의 방향에 따라 다윗처럼 내가 위태로울 수 있고, 고난이 극심할 수도 있고, 이 화살의 방향에 따라 내가 평안할 수도 있고, 고난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 주시도록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요나단도 다윗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섣불리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바꾸어 주십니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시면, 다윗의 처지가 기구한 운명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은밀하게 다윗을 향한 계획을 이루어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39, 40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이 활을 쏘아서 에셀 바위 뒤에 숨어 있는 다윗에게 위험을 알린 것을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이만 몰랐을까요?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 왕도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알고 계십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아이가 모르게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출애굽하여 나가게 하실 때는 열방이 다 알게 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은밀하게 일을 행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간구하여 응답하실 때도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알게 하여 주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응답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또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은밀하게 행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을 함부로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2001년에 받았습니다. 20년이 넘었습니다. 저보다 늦게 안수를 받으신 분 중에는 목회를 성실히 해서 목회가 안정되고 교회 성장을 이룬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사람들이 보기에 이제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라고 할 정도로 목회도, 교회 성장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극심한 고난과 이를 통한 연단 속에서 기도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도 좀처럼 나아지기 보다는 더 나빠졌습니다.
이런 저를 아는 사람 중에는 이제 박 목사는 끝났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준비만 하시고 쓰지 않으신 것을 보니, 차라리 목회를 그만두고 가정이나 돌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박 목사는 목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제게 목회하지 말고 교수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충고를 해준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보따리 싸지 않고 한결같이 제 곁을 지켜 준 아내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여보 우리 살아있지, 죽으면 기회가 없어. 살아있으니 우린 아직도 기회가 있어. 하나님이 날,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저의 목회와 삶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것을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들은 치유사역자로부터 기도를 받아서 치유가 이루어지지만, 저는 지금도 제 아내와 자녀를 하나님께서 치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제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고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41-42절)
왜 우리가 섣불리 내 처지나 남의 처지를 보고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윗의 처지가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 것입니다. 본문 41절에 보시면, 다윗은 아이가 성읍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 요나단에게 세 번 절합니다.
우리는 보통 산 사람에게 두 번 절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이유는 죽은 사람에게 두 번 절하는 관습 때문입니다. 세 번 절한 것은 이방 풍속에 의하면, 신이나 황제에게 절할 때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세 번 절한 것은 죽은 목숨인데 나를 살려 주어서 고맙다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감사 표시를 한 것입니다.
둘은 이제 작별의 입맞춤을 합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다윗은 요나단을 붙잡고 엉엉 울고 다윗은 더 심하게 울었습니다. 좋은 만남이 이렇게 슬픔의 헤어짐이 되어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입니다. 형 요나단을 만난 것이 다윗은 큰 복이라고 생각했고, 요나단 역시 이런 동생 다윗을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라며 못내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정을 떠나 피보다 진한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동성끼리의 사랑이 아닙니다. 다윗을 위해서 요나단이 자기 왕위도, 자기 생명마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우리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번 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우셨습니다(요 11:33). 또 한번은 예루살렘이 멸망될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눅 13:34). 나머지 한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히 5:7).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예루살렘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아시고 적개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인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우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자기를 위해서만 우는 것이 아닌 타인과 나라를 위해 우는 사람이 필요한 때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을 평안히 가라고 보내줍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발걸음을 성읍으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맹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경외해서 자기와 다윗만이 아는 약속을 누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고 지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깊이 들어와서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것을 교회 식구들은 서로 모릅니다. 오죽해야 차를 타고 새치기하는 사람에게 욕을 했는데, 차 문을 열고 보니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과 집사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낙망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요나단도 다윗도 사울 왕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다윗은 물론 요나단의 목숨마저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요나단도 다윗도 서로 불안해하지 않고 평안히 각자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지금 처지가 처량하고 슬픕니까? 내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외로운 가운데 있습니까? 다윗의 신변에 빨간불이 켜진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 그리고 몸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래서 어찌할지 모르겠습니까? 심히 걱정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습니까?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아픔 속에 있습니까?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저 하늘 높이 계시는 것만 같고, 그래서 내 기도가 도달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십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 깊숙이 들어와 관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십니다. 그를 찾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이사야 50장 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정한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띄게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까? 하지만,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순간에도, 또 세상으로 나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자고 깨어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여 주시려고 지금도 은밀하게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나와 타인에 대해서 그 처지를 보고서 섣불리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동영상설교: 유튜브)
성경: 사무엘상 20:35-42.
- 사무엘상강해 55 -
제목: 섣불리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말라
서론>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현재의 삶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아서는 이 운명을 피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분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늪에 빠져 발버둥을 쳐보지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자기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만큼 왔으면 암흑같은 터널 속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긴 터널이 계속되었을 때 느끼는 낙심, 절망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서 끝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자기가 요나단에게 말한 것처럼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요나단의 아버지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질 않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치지만, 언제 이 도망자의 삶이 끝날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처지를 보고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다윗의 처지를 보고 또한 여러분의 처지를 두고서 섣불리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데도 왜 현재의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까? 왜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고, 고난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우리 이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35-36)
우리는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면, 그 약속한 날과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내일 보자 해 놓고 정확한 시각을 말하지 않았다면, 날은 알지만, 시간은 모릅니다. 사무엘상 20장 5절에 보시면, 다윗은 요나단의 아버지가 자기를 헤칠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형 요나단에게 셋째 날 저녁까지 자기를 들에 숨게 해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나단은 12절 말씀에 보시면, 다윗에게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곧 초하루 또는 둘째 날에 자기 아버지 사울을 살펴서 그 의향이 선한지 아닌지를 알아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본문 35절 말씀에 보시면, 셋째 날 아침에 다윗에 관한 일을 알리러 시중드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들로 나갑니다.
다윗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요나단이 자기에게 길한 소식이든지, 흉한 소식이든지 알려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하루가 천 날 같이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행하실 일을 그 종 선지자에게 알려주지 아니하시는 한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때, 곧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이 요나단이 자기에게 소식을 알려주기까지 에셀 바위 뒤에서 숨죽이고 기다린 것처럼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다윗이 요나단을 믿지 못했다면, 에셀바위 뒤에서 셋째 날까지 숨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벌써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이제나저제나 요나단이 자기에게 가져올 소식을 기다린 것은 그가 약속을 지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응답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도, 예측도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나단은 신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라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한글 개역 성경은 식언치 않으신다고 번역했습니다.
약속할 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약속해 놓고 매번 까마득히 잊어버리기도 하며 사람을 차별하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일, 그런 사람과의 약속은 무시하려 합니다. 나하고 친한 사람, 가까이 지내면 덕을 볼 수 있는 사람, 이렇게 사람 차별하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당장 위기를 피하려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지도 않으십니다.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사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겠지만, 요나단처럼 타인과의 약속도 신실하게 지켜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36절 말씀을 보시면,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내가 쏘는 화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에게 달려가라는 것은 요나단이 화살을 쏠 때 아이가 달리면 그 아이는 그 화살이 떨어지는 위치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에벨 바위 뒤에서 숨죽이며 지켜보는 다윗을 의식해서 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화살을 지나치게 아이 위로 쏘아서 이를 지켜보는 다윗에게 알린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킴에 있어서 형식적으로 대충대충하지 않고 또한 의무감 때문에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오늘인지, 내일인지, 정확한 날과 시각을 알 수 없지만, 요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닥친 위험을 알리기 위해 화살을 지나치게 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는 징조나 싸인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며 믿고 기다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운명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입니다(37-40절)
우리가 내 처지나 남의 처지를 보며 그것이 운명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내게도 남에게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운명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또는 나를 향한 뜻이 있으시다, 라고 하는 말이 성경적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작정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섭리와 작정이 다른 것은 섭리는 변화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정은 절대불변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다, 뜻을 돌이키시다 라는 구절은 섭리에 속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5장에 보시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다.라는 말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에 예수 이름 외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에 속할까요? 하나님의 작정에 속합니다. 그것은 절대불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외에는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은 아이 뒤에서 외칩니다.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또 외칩니다. 지체 말고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요나단이 두 번 아이 뒤에서 외친 이유는, 한 번은 화살의 방향을 알려주려 한 것이고, 두 번째는 다윗에게 이제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여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활을 쏘아 화살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 것은, 쏘는 요나단이나 보는 다윗이나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바꿀 수만 있으면 화살의 방향이 아이 앞쪽이 아니라 이쪽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화살의 방향을 요나단이 바꾸지 못한 것은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화살의 방향을 바꾸게 하실 분은 요나단이나 다윗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바꾸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살의 방향을 우리가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꾸어 주셔야 합니다. 이 화살의 방향에 따라 다윗처럼 내가 위태로울 수 있고, 고난이 극심할 수도 있고, 이 화살의 방향에 따라 내가 평안할 수도 있고, 고난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 주시도록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요나단도 다윗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섣불리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바꾸어 주십니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시면, 다윗의 처지가 기구한 운명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은밀하게 다윗을 향한 계획을 이루어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39, 40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이 활을 쏘아서 에셀 바위 뒤에 숨어 있는 다윗에게 위험을 알린 것을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이만 몰랐을까요?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 왕도 백성들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알고 계십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아이가 모르게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출애굽하여 나가게 하실 때는 열방이 다 알게 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은밀하게 일을 행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간구하여 응답하실 때도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알게 하여 주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응답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또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은밀하게 행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을 함부로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2001년에 받았습니다. 20년이 넘었습니다. 저보다 늦게 안수를 받으신 분 중에는 목회를 성실히 해서 목회가 안정되고 교회 성장을 이룬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사람들이 보기에 이제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라고 할 정도로 목회도, 교회 성장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극심한 고난과 이를 통한 연단 속에서 기도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도 좀처럼 나아지기 보다는 더 나빠졌습니다.
이런 저를 아는 사람 중에는 이제 박 목사는 끝났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준비만 하시고 쓰지 않으신 것을 보니, 차라리 목회를 그만두고 가정이나 돌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박 목사는 목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제게 목회하지 말고 교수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충고를 해준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보따리 싸지 않고 한결같이 제 곁을 지켜 준 아내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여보 우리 살아있지, 죽으면 기회가 없어. 살아있으니 우린 아직도 기회가 있어. 하나님이 날,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저의 목회와 삶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것을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들은 치유사역자로부터 기도를 받아서 치유가 이루어지지만, 저는 지금도 제 아내와 자녀를 하나님께서 치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제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고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41-42절)
왜 우리가 섣불리 내 처지나 남의 처지를 보고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윗의 처지가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 것입니다. 본문 41절에 보시면, 다윗은 아이가 성읍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 요나단에게 세 번 절합니다.
우리는 보통 산 사람에게 두 번 절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이유는 죽은 사람에게 두 번 절하는 관습 때문입니다. 세 번 절한 것은 이방 풍속에 의하면, 신이나 황제에게 절할 때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세 번 절한 것은 죽은 목숨인데 나를 살려 주어서 고맙다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감사 표시를 한 것입니다.
둘은 이제 작별의 입맞춤을 합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다윗은 요나단을 붙잡고 엉엉 울고 다윗은 더 심하게 울었습니다. 좋은 만남이 이렇게 슬픔의 헤어짐이 되어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입니다. 형 요나단을 만난 것이 다윗은 큰 복이라고 생각했고, 요나단 역시 이런 동생 다윗을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라며 못내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정을 떠나 피보다 진한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동성끼리의 사랑이 아닙니다. 다윗을 위해서 요나단이 자기 왕위도, 자기 생명마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우리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번 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우셨습니다(요 11:33). 또 한번은 예루살렘이 멸망될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눅 13:34). 나머지 한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히 5:7).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예루살렘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아시고 적개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인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우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자기를 위해서만 우는 것이 아닌 타인과 나라를 위해 우는 사람이 필요한 때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을 평안히 가라고 보내줍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발걸음을 성읍으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맹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경외해서 자기와 다윗만이 아는 약속을 누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고 지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깊이 들어와서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것을 교회 식구들은 서로 모릅니다. 오죽해야 차를 타고 새치기하는 사람에게 욕을 했는데, 차 문을 열고 보니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과 집사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낙망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요나단도 다윗도 사울 왕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다윗은 물론 요나단의 목숨마저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요나단도 다윗도 서로 불안해하지 않고 평안히 각자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지금 처지가 처량하고 슬픕니까? 내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외로운 가운데 있습니까? 다윗의 신변에 빨간불이 켜진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 그리고 몸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래서 어찌할지 모르겠습니까? 심히 걱정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습니까?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아픔 속에 있습니까?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저 하늘 높이 계시는 것만 같고, 그래서 내 기도가 도달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십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 깊숙이 들어와 관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십니다. 그를 찾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이사야 50장 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정한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띄게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까? 하지만,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순간에도, 또 세상으로 나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자고 깨어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여 주시려고 지금도 은밀하게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나와 타인에 대해서 그 처지를 보고서 섣불리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동영상설교: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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