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따라 말씀을 어겨도 좋은가?(삼상 21:1-6)
해운대숨쉬는교회 10월 6일 주일강단
성경: 사무엘상 21:1-6
[사무엘상강해 56]
제목: 상황에 따라 말씀을 어겨도 좋은가?
서론>
성공회 소속 신부이자 윤리학자인 플레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에는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를 판단하기 어려운 회색지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법적인 판단이나 관습에 의한 판단보다 발생한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상황윤리입니다. 그 상황의 기준을 사랑에 둡니다.
읽으신 본문 말씀에 보시면,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로 속여 대답합니다. 마치 본문은 다윗이 그럴만한 상황 때문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여 대답한 것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신구약성경은 사람이 거짓말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레 19장 11절은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였고, 시편 5편 6절에는 ”여호와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도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의하면, 거짓의 아비가 마귀라고 하였고, 계시록 21장 8절은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다윗의 거짓말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한 구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발생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좋다는 뜻입니까?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위기를 모면하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1-2)
본문 1절을 보시면, 다윗은 요나단과 작별한 후 그곳을 떠나 성소가 있는 놉 땅에 들릅니다. 들렀다는 말은 다윗이 의도적으로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치는 여정 중에 놉 땅을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갑자기 찾아온 다윗을 영접하기는 했지만, 떨었다고 했습니다. 왜 떨었다고 했습니까?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아멘.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의 호위대장으로서 병사 없이 혼자 자기를 찾아온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은 단지 이상하다는 것을 넘어 아히멜렉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 때문입니다.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사울 왕 곁에 있어야 할 다윗이 홀로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왔으니 혹시 그 소문이 맞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물어본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아멘.
다윗의 말은 자기가 혼자서 제사장을 찾아온 것은 지금 왕명을 받아서 비밀 임무를 수행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암행어사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수행하는 병사 없이 혼자서 은밀하게 임무 중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윗은 자기가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여기까지 도피해 온 사실을 숨기려고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속여 대답한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의가 아닌 자기나 타인의 생명을 보호할 목적으로 선의로 한 거짓말은 제한적으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거짓말은 아히멜렉에게 해를 끼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왜 여호와의 제사장을 속였느냐? 라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을 속여서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습니다. 자기 생명과 따르는 소년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묻는 말에 바른말로, 된 대로 대답했다면, 다윗의 은신처가 발각되어서 자기는 물론 함께하는 소년들의 목숨도 보장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다윗은 제사장에게 거짓말로 속여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거짓말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나도 너도 다 거짓말하고 살지 않느냐? 라며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나에 대해서 너그럽게 봐줍니다. 또는 나와의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에 따라 너그럽게도 봐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를 판단하며 정죄하기도 합니다. 악의적으로 비난합니다.
심지어 거짓말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까지 합니다. 보아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믿음의 사람 다윗도 상황에 따라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여 대답하지 않았느냐? 나도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거짓말했다. “라고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저 역시도 거짓말하는 것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사람이 거짓말을 쉽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이 정도면, 타인에게 손해나 해가 안 되겠지 라며 나름대로 거짓말의 정도에 따라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내가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체면 때문에 하는 거짓말일 것입니다. 밥 먹었느냐? 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먹었는데도 먹었다고 하고, 먹었는데 안 먹었다고 합니다. 분명 이것은 나나 타인에게 어떠한 손해도 주지 않는 거짓말일 것이라고, 약한 거짓말이라고 스스로 판단해서 그 정도는 너그럽게 서로 봐줍니다.
또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놀다가 형이 그릇을 깼는데 자기 잘못을 동생에게 덮어씌웁니다. 또는 동생은 형이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물론 엄격하게 훈육하는 부모님도 계시지만, 이 정도는 가족끼리 어린애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봐줍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점점 커져서 폭행하고서도, 남을 속여 재물을 빼앗아 사기를 쳤으면서도, 사람을 성폭행했어도, 살인했으면서도 거짓말을 합니다. 또한 정적을 제거할 정치적인 목적으로도 거짓 증거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심각하게 봅니다. 그리고 나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에 따라 거짓말을 했음에도 너그럽게 봐주거나 눈감아 버립니다. 너그럽게 봐주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름대로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좋다는 뜻입니까?
둘째로, 그 거짓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3-5).
다윗이 한 거짓말을 오해하시는 분은 없어야 합니다. 다윗이 제사장을 속여 대답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후에 다윗이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허용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본문을 오해한 것입니다.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도 좋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시면,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한 소년들이 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었으니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 다섯 덩이나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이 말을 들은 제사장 아히멜렉은 본문 4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은 보통 떡은 없고 거룩한 떡 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제사장은 다윗과 함께 한 소년들이 어떤 조건에 충족하면 주어 먹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 조건은 다윗은 물론 함께 한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으면 주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이렇게 다윗에게 요구한 것은 제사장 수중에 있는 떡이 거룩한 떡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떡은 진설병으로 고운 밀가루로 만든 12개의 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소 안 여호와 앞에 두었습니다(출 25: 30; 레 24: 5-9). 레위기에 따르면,이 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진열해 놓았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려면 성결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본문 5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나 함께 한 소년들이 사흘 길 여행 중에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여 그들의 배가 성결하다고 대답합니다. 왜 거룩한 떡을 먹는 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여야 합니까? 성적인 절제가 요구됩니까?
성적인 절제는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신 23:10-15; 수 3:5)이나 또는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인 절제를 하지 않은 가운데 전쟁에 참여하거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한 소년들의 그릇은 문자적인 그릇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상태가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그들의 육체의 상태를 완곡어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흘 동안 여자와의 성관계를 맺지 아니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다윗이나 함께 한 소년들은 제사장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먹은 떡은 거룩한 떡입니다. 영적으로는 신약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신약시대에도 거룩한 떡을 먹는 예식을 행해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룩한 떡에 참여하는 성찬식입니다. 거룩한 떡과 잔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결입니다. 그렇다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자만 먹을 수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고전 11장 28절, 29절은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아멘.
따라서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요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에서 떡을 먹을 때 자기를 살핀 후에 먹을 수 있다는 것으로 영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타인과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점점 갈수록 이 요구 조건이 교회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 이 고전 11장 28, 29절 말씀을 읽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인들이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윗에 관한 이 사건도 거룩한 떡에 참여하려면 부정하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은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만약, 다윗이나 그 함께 한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했었다면, 다윗은 제사장에게 속여 대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속이려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해서 한 거짓말일지라도 거기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가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왜 예배 시간에 늦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자기가 일찍 준비를 안 해서 늦게 왔음에도 목사님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차가 밀려서, 오는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라고 대답합니다.
주일인데 오늘 왜 전도하러 같이 가지 않습니까? 왜 교회 청소하는 데 함께 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둘러 됩니까? 집에 일이 있어서, 바빠서, 회사 일이 있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둘러 됩니다. 이제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한 번 한 거짓말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거짓말로 이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거짓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 불순종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한 거짓말이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셋째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그 열매가 증명해 줍니다(6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악을 심으면 악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말을 심게 되면, 거짓의 열매가 맺지만, 진실을 심게 되면, 참된 것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시면, 제사장은 다윗이나 함께 한 소년들이 거룩한 떡을 먹는 조건이 충족된 것을 확인한 후에 거룩한 떡 진설병을 주워먹게 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떡이라고 하더라도 제사장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호와 앞에 물려낸 떡이어야 합니다.
물려내다 라는 의미는 제단에서 제사를 드린 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거룩한 떡은 하나님 앞에 드려진 후에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을 아히멜렉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소년들에게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떡을 드릴 때는 더운 떡이지만, 이미 다 식어버린 떡을 제사장이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제사장 아히멜렉이나 다윗, 그와 함께 한 소년들 누구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제사장 아히멜렉과 다윗의 행위는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흡니와 비스하스와는 사뭇 대조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불량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짓밟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처럼 율법을 어기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그런데도 제사장 아히멜렉은 엘리집에 내린 저주 때문에 사울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자세한 것은 사무엘상 22장 말씀을 강해할 때 살펴보겠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거짓말은 거짓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두고서 다르게 보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두고서 다윗이 거짓말한 것은 묵인하시고 안식일 법에 관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인한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이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부터 28절 말씀에 보시면,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저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 할 일을 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시장할 때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라고 하십니다.
2장 26절에 보시면,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아비아달이 아니고 아히멜렉인데도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놉에 있는 85명의 제사장이 사울 왕에 의해 죽임당할 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만 살아서 다윗에게로 갑니다. 그래서 이때 대표되는 제사장 이름을 언급한 것입니다.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비난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본문의 사건을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제사장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정보다 사람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였다는 의미입니다.(사랑을 실천함)
현대판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가 교회 현장에서 재현되었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주일인데 교회 가는 길입니다. 좀 늦게 출발해서 허겁지겁 달려가야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던 5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갑자기 거품을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것도 내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교를 초청받은 강사 목사님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모른 체 하고 지나가면, 환자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환자를 살리기 위해 전화해서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예배 시간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견해가 나뉠 것입니다. 한 부류는 나 아니더라도 다른 분이 살릴 것이니 모른 체 하고 예배하러 간다, 또 다른 부류는 예배는 좀 늦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우선이다. 이런 경우에 어쩔 수 없이, 또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예배 시간에 늦게 되는 경우, 또는 강사 목사님이 늦게 도착하는 경우 우리는 이분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이때 적용되는 말씀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어가는 내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원치 않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현대판 사마리아 사건이 내 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일인지, 제한적으로 허용한 거짓말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조차 내가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일이, 또는 그 거짓말이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것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은 거짓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거짓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거짓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지도 그 거짓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도 않으려 합니다.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한 거짓말일지라도 거기서 그쳐야 합니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게 하지 않습니다. 비록 시작은 거짓말로 어쩔 수 없이 했더라도 그 열매는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이어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유튜브 설교영상 게시됨)
성경: 사무엘상 21:1-6
[사무엘상강해 56]
제목: 상황에 따라 말씀을 어겨도 좋은가?
서론>
성공회 소속 신부이자 윤리학자인 플레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에는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를 판단하기 어려운 회색지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법적인 판단이나 관습에 의한 판단보다 발생한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상황윤리입니다. 그 상황의 기준을 사랑에 둡니다.
읽으신 본문 말씀에 보시면,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로 속여 대답합니다. 마치 본문은 다윗이 그럴만한 상황 때문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여 대답한 것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신구약성경은 사람이 거짓말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레 19장 11절은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였고, 시편 5편 6절에는 ”여호와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도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의하면, 거짓의 아비가 마귀라고 하였고, 계시록 21장 8절은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다윗의 거짓말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 한 구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발생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좋다는 뜻입니까?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위기를 모면하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1-2)
본문 1절을 보시면, 다윗은 요나단과 작별한 후 그곳을 떠나 성소가 있는 놉 땅에 들릅니다. 들렀다는 말은 다윗이 의도적으로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치는 여정 중에 놉 땅을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갑자기 찾아온 다윗을 영접하기는 했지만, 떨었다고 했습니다. 왜 떨었다고 했습니까?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아멘.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의 호위대장으로서 병사 없이 혼자 자기를 찾아온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은 단지 이상하다는 것을 넘어 아히멜렉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 때문입니다.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사울 왕 곁에 있어야 할 다윗이 홀로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왔으니 혹시 그 소문이 맞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물어본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아멘.
다윗의 말은 자기가 혼자서 제사장을 찾아온 것은 지금 왕명을 받아서 비밀 임무를 수행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암행어사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수행하는 병사 없이 혼자서 은밀하게 임무 중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윗은 자기가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여기까지 도피해 온 사실을 숨기려고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속여 대답한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의가 아닌 자기나 타인의 생명을 보호할 목적으로 선의로 한 거짓말은 제한적으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거짓말은 아히멜렉에게 해를 끼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왜 여호와의 제사장을 속였느냐? 라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을 속여서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습니다. 자기 생명과 따르는 소년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묻는 말에 바른말로, 된 대로 대답했다면, 다윗의 은신처가 발각되어서 자기는 물론 함께하는 소년들의 목숨도 보장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다윗은 제사장에게 거짓말로 속여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거짓말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나도 너도 다 거짓말하고 살지 않느냐? 라며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나에 대해서 너그럽게 봐줍니다. 또는 나와의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에 따라 너그럽게도 봐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를 판단하며 정죄하기도 합니다. 악의적으로 비난합니다.
심지어 거짓말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까지 합니다. 보아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믿음의 사람 다윗도 상황에 따라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여 대답하지 않았느냐? 나도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거짓말했다. “라고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저 역시도 거짓말하는 것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사람이 거짓말을 쉽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이 정도면, 타인에게 손해나 해가 안 되겠지 라며 나름대로 거짓말의 정도에 따라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내가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체면 때문에 하는 거짓말일 것입니다. 밥 먹었느냐? 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먹었는데도 먹었다고 하고, 먹었는데 안 먹었다고 합니다. 분명 이것은 나나 타인에게 어떠한 손해도 주지 않는 거짓말일 것이라고, 약한 거짓말이라고 스스로 판단해서 그 정도는 너그럽게 서로 봐줍니다.
또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놀다가 형이 그릇을 깼는데 자기 잘못을 동생에게 덮어씌웁니다. 또는 동생은 형이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물론 엄격하게 훈육하는 부모님도 계시지만, 이 정도는 가족끼리 어린애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봐줍니다.
그러나 거짓말이 점점 커져서 폭행하고서도, 남을 속여 재물을 빼앗아 사기를 쳤으면서도, 사람을 성폭행했어도, 살인했으면서도 거짓말을 합니다. 또한 정적을 제거할 정치적인 목적으로도 거짓 증거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심각하게 봅니다. 그리고 나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에 따라 거짓말을 했음에도 너그럽게 봐주거나 눈감아 버립니다. 너그럽게 봐주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름대로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좋다는 뜻입니까?
둘째로, 그 거짓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3-5).
다윗이 한 거짓말을 오해하시는 분은 없어야 합니다. 다윗이 제사장을 속여 대답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후에 다윗이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허용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본문을 오해한 것입니다.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도 좋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시면,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한 소년들이 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었으니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 다섯 덩이나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이 말을 들은 제사장 아히멜렉은 본문 4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은 보통 떡은 없고 거룩한 떡 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제사장은 다윗과 함께 한 소년들이 어떤 조건에 충족하면 주어 먹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 조건은 다윗은 물론 함께 한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으면 주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이렇게 다윗에게 요구한 것은 제사장 수중에 있는 떡이 거룩한 떡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떡은 진설병으로 고운 밀가루로 만든 12개의 떡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소 안 여호와 앞에 두었습니다(출 25: 30; 레 24: 5-9). 레위기에 따르면,이 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진열해 놓았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려면 성결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본문 5절 말씀에 보시면, 자기나 함께 한 소년들이 사흘 길 여행 중에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여 그들의 배가 성결하다고 대답합니다. 왜 거룩한 떡을 먹는 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여야 합니까? 성적인 절제가 요구됩니까?
성적인 절제는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신 23:10-15; 수 3:5)이나 또는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인 절제를 하지 않은 가운데 전쟁에 참여하거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한 소년들의 그릇은 문자적인 그릇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상태가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그들의 육체의 상태를 완곡어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흘 동안 여자와의 성관계를 맺지 아니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다윗이나 함께 한 소년들은 제사장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먹은 떡은 거룩한 떡입니다. 영적으로는 신약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신약시대에도 거룩한 떡을 먹는 예식을 행해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룩한 떡에 참여하는 성찬식입니다. 거룩한 떡과 잔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결입니다. 그렇다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한 자만 먹을 수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고전 11장 28절, 29절은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아멘.
따라서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요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에서 떡을 먹을 때 자기를 살핀 후에 먹을 수 있다는 것으로 영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를 살피지 아니하고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타인과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점점 갈수록 이 요구 조건이 교회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 이 고전 11장 28, 29절 말씀을 읽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인들이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윗에 관한 이 사건도 거룩한 떡에 참여하려면 부정하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은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만약, 다윗이나 그 함께 한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했었다면, 다윗은 제사장에게 속여 대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속이려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해서 한 거짓말일지라도 거기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가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왜 예배 시간에 늦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자기가 일찍 준비를 안 해서 늦게 왔음에도 목사님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차가 밀려서, 오는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라고 대답합니다.
주일인데 오늘 왜 전도하러 같이 가지 않습니까? 왜 교회 청소하는 데 함께 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둘러 됩니까? 집에 일이 있어서, 바빠서, 회사 일이 있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둘러 됩니다. 이제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한 번 한 거짓말이 중단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거짓말로 이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거짓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 불순종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한 거짓말이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셋째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그 열매가 증명해 줍니다(6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악을 심으면 악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말을 심게 되면, 거짓의 열매가 맺지만, 진실을 심게 되면, 참된 것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시면, 제사장은 다윗이나 함께 한 소년들이 거룩한 떡을 먹는 조건이 충족된 것을 확인한 후에 거룩한 떡 진설병을 주워먹게 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떡이라고 하더라도 제사장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호와 앞에 물려낸 떡이어야 합니다.
물려내다 라는 의미는 제단에서 제사를 드린 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거룩한 떡은 하나님 앞에 드려진 후에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을 아히멜렉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소년들에게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떡을 드릴 때는 더운 떡이지만, 이미 다 식어버린 떡을 제사장이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제사장 아히멜렉이나 다윗, 그와 함께 한 소년들 누구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제사장 아히멜렉과 다윗의 행위는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흡니와 비스하스와는 사뭇 대조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불량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짓밟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처럼 율법을 어기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그런데도 제사장 아히멜렉은 엘리집에 내린 저주 때문에 사울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자세한 것은 사무엘상 22장 말씀을 강해할 때 살펴보겠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거짓말은 거짓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두고서 다르게 보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두고서 다윗이 거짓말한 것은 묵인하시고 안식일 법에 관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인한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이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부터 28절 말씀에 보시면,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저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 할 일을 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시장할 때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라고 하십니다.
2장 26절에 보시면,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아비아달이 아니고 아히멜렉인데도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놉에 있는 85명의 제사장이 사울 왕에 의해 죽임당할 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만 살아서 다윗에게로 갑니다. 그래서 이때 대표되는 제사장 이름을 언급한 것입니다.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비난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본문의 사건을 근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제사장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정보다 사람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였다는 의미입니다.(사랑을 실천함)
현대판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가 교회 현장에서 재현되었다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주일인데 교회 가는 길입니다. 좀 늦게 출발해서 허겁지겁 달려가야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던 5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갑자기 거품을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것도 내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교를 초청받은 강사 목사님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모른 체 하고 지나가면, 환자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환자를 살리기 위해 전화해서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예배 시간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견해가 나뉠 것입니다. 한 부류는 나 아니더라도 다른 분이 살릴 것이니 모른 체 하고 예배하러 간다, 또 다른 부류는 예배는 좀 늦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우선이다. 이런 경우에 어쩔 수 없이, 또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예배 시간에 늦게 되는 경우, 또는 강사 목사님이 늦게 도착하는 경우 우리는 이분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이때 적용되는 말씀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어가는 내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원치 않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현대판 사마리아 사건이 내 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상황에 따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일인지, 제한적으로 허용한 거짓말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조차 내가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일이, 또는 그 거짓말이 하나님께서 제한적으로 허용하신 것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은 거짓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거짓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거짓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지도 그 거짓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도 않으려 합니다.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한 거짓말일지라도 거기서 그쳐야 합니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게 하지 않습니다. 비록 시작은 거짓말로 어쩔 수 없이 했더라도 그 열매는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이어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유튜브 설교영상 게시됨)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요시야로 본 개혁 (왕하 23:21-23) (0) | 2024.10.07 |
---|---|
스크랩 사람이 부유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시편 49편 16~20절) (0) | 2024.10.07 |
스크랩 섣불리 운명이라고 판단하지 말라(삼상 20:35-42) (0) | 2024.10.02 |
주일설교.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장 15절 ~ 23절) (0) | 2024.10.02 |
창12;1-3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하십니다.20151004 (0) | 2024.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