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영향력을 끼치라 AG : 귀부인들
TS : 믿음이란 주변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른들만 낳은 할머니
하루는 번칠이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도 아기를 낳아보셨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그럼, 너희 큰아버지, 아버지, 고모, 삼촌을 다 이 할머니가 낳았단다.”
이 말을 들은 번칠이가 하는 말,
“와,... 할머니는 어쩜 어른들만 다 낳으셨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 기준대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위의 수많은 사람을 통해 힘을 얻기보다 어려움을 느낄 때가 훨씬 더 많고, 때로는 ‘막힌 사람’으로 취급당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승시킬 수 있도록 칭찬하고 박수쳐 주며, 격려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 은혜로운 영향력, 믿음의 영향력, 좋은 영향력, 행복감을 가져다줄 수 있는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4
간혹 우리나라 사극에 보면 “마님”이라는 배역들이 많이 등장한다.
마님이란 호칭은 하인들이 집에 안주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다.
대감, 영감, 관료들의 부인을 일컫는 호칭이기도 하다.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양반댁 부인을 부를 때 마님이라고 부른다.
이 마님이란 호칭을 불어에서는 “Madame”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담이란 호칭을 과거 다방이나 술집이나 요객 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아니라 좀 어른 역할을 하는 여인이나 안주인을 마담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인 의미, 안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프랑스나 불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결혼한 여인, 아주 높은 계층의 여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정경부인이나 마님 같은 호칭을 불어에서는 마담(Madam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Madame Han, Madame Park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마담이라는 호칭을 극존칭어로 바꾸면 귀부인이라는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 한글 성경에 귀부인이라고 번역한 성경구절은 4번 등장하는 것으로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한번,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3번 찾아볼 수 있다.
에스더1장에 보면 페르시야 제국, 127도를 거느리고 있는 바사와 메대의 거대한 페르시야 제국의 왕으로 등극한 아하수에로 왕이 대소신료들과 지방관들을 초대하여 거대한 만찬을 베풀게 된다.
왕은 와스디 왕후에게 왕비의 화려하고 웅장한 의상을 차려입고 만찬장으로 나와서 춤을 추라고 하면서 왕비의 뛰어난 미모를 대소신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와스디 왕후는 왕이 베푸는 만찬장에서 춤을 추라는 왕의 지엄한 명령을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왕후가 왕의 명령을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만찬장은 대신들이 술렁거리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전국 127도의 지방관들 앞에서 왕의 체면은 땅으로 추락하고 만다.
연회가 끝나고 왕은 대신들에게 왕후의 처사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하면서 대신들의 의견을 물어보게 된다.
에스더서1;16-20에 보면 므무간이라는 대신이 아하수에로 왕과 지방 관료들 앞에서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리이다.”라고 간청하면서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킴으로 일벌백계하시고, 다른 왕후를 세워서 페르시야 왕국의 모든 여인들이 남편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달라고 청원하는 장면에서 귀부인들이라는 호칭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므무간아러는 대신이 이야기하는 에스더서 1;18절에 등장하는 귀부인들이라는 호칭을 영어 성경에는 “women of the nobility”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곧 귀부인들이라는 호칭은 귀족들, 지방관들, 지방의 막강한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지방호족들의 부인들이라는 의미이다.
히브리어직역성경에서는 “고관의 부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와스디 왕후가 행하였던 이야기를 127도 고관들의 부인이 듣고는 고관들의 부인도 와스디 왕후의 영향을 받아서 자기 남편을 홀대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고, 고관들의 부인의 행태는 다른 대부분의 여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자기 남편들을 홀대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키고 왕의 권위에 순종하는 왕후를 세움으로 지방 고관들과 모든 백성들의 부인들도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는 선례가 되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귀부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좋은 의미이든 좋지 않은 의미이든 다른 여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귀부인(貴婦人)이라는 호칭은 “신분이 높거나 재산이 많은 집의 부인”을 일컫다고 사전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는 ‘000여사’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귀부인들은 남편의 막강한 권력과 권세와 재물을 통하여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여인들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이 가진 막강한 권력과 권세와 재력이 귀부인들이 행세할 수 있는 권력과 권세와 재력이 되는 것이다.
귀부인들은 막강한 권력과 권세와 재력을 남편으로 인하여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한 손에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막강한 힘과 파워의 영향력을 지닌 여인들이다.
귀부인들은 사회적으로 막강한 권력과 권세와 재력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여인들이기 때문에 귀부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어떤 모습으로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여인들이다.
귀부인들이 어떤 조직에 들어와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조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마련이다.
귀부인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들어와 있다면 틀림없이 교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면 귀부인들은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어떤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D4.
①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전도자를 보내주시는 주님.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신 후에 구름을 타시고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신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마태복음 28:18-20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구촌 곳곳으로 나아가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막중한 사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신다.
사도행전 1:8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구촌 곳곳으로, 더 나아가 지구촌 땅끝까지 가서 주님의 거룩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신앙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하심을 체험한 이후에 온갖 핍박과 박해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주님의 복음, 십자가 복음,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세계를 선포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들을 세워나가게 된다.
성령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해 주시는 감동으로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까지, 사마리아인들, 로마인들, 헬라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신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게 된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는가하면, 거절하고 핍박하고 박해하고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도록 추방시키거나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잃으면서 순교당하는 이들도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늘 우리가 묵상하려는 귀부인들도 등장하게 된다.
귀부인들은 일반적인 평범한 여인이라기보다는 권력과 권세와 재력을 지니고 있어서 막강한 힘과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여인들이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세 번에 걸쳐서 귀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기록한다.
사도행전13:50에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경건한 귀부인들이란 호칭을 영어성경에서는 “the God-fearing women of high standing, 또는 honourable women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곧 높은 지위에 있는 하나님의 독실한 신앙인의 여인이라는 의미이다.
이 여인들은 유대교에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여인이라는 의미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소아시아 지역이기 때문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라 할 수 있다.
유대교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언약한 메시야가 나사렛 촌 동네 출신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비시디아 안디옥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속한 경건한 귀부인들도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더 이상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수 없도록 막으면서 추방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여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절호의 찬스를 스스로 망각하고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린 어리석인 여인들이다.
사회적으로는 명망이 높은 귀부인에 속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자기들 스스로 망각해 버린 어리석은 여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도행전17:4에 보면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17;4절에서 등장하는 귀부인은 영어성경에서는 ”prominent women, 또는 the chief women“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마케도니야 지역의 데살로니가 도시에 두둔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귀족들, 제후들의 부인이라는 의미이다.
이 여인들은 유대인 귀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 귀부인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여인들은 이방인 귀부인들이었지만, 바울의 일행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귀한 딸로 세움을 입는 여인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사도행전17:12에서도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17;12절에 등장하는 귀부인들에 대하여 영어성경에서는 ”prominent women, 또는 honourable women“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이 여인들은 마케도니아 지역의 ‘베뢰아’라는 도시에 거주하는 헬라인 귀족의 부인이라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시대가 로마제국 시대이고, 데살로니가 지역이나 베뢰아 지역은 로마제국의 도시였기 때문에 상당한 권력과 권세와 재력을 소유한 로마인들과 아울러 헬라인들도 함께 거주하는 것이다.
성지순례를 가면 그리스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지역을 여행하게 된다.
로마제국이면서 헬라인들,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과 베뢰아 지역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할 때에 상당히 많은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이 복음을 믿으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로마인들과 헬라인들 곧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아울러 소수의 귀부인들이지만, 이 여인들도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귀한 딸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여인들에게 전도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들었을 때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믿음으로 고백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로마서10:9-10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로마서 10;13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② 분명하게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어느 지역에서든 항상 환영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복음을 환영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거역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공생애의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이적들을 베풀어주셨는데도 예수님을 거역하는 이들이 많았지 않은가.
그러니 사도들이나 신앙인들이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도 환영하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역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반대하는 이들은 그 지역에서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수 없도록 박해하고 핍박하고 추방시키는 일에 앞장선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자기들 스스로 구원의 길을 포기하고 멸망의 길로, 심판의 길로 달려간 꼴이 되고 만다.
사도행전13;50에 등장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귀부인들은 유대인들의 선동에 넘어가서 바울과 바나바가 더 이상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수 없도록 박해하고 핍박하고 추방하는 일에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방하는 일에 앞장선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 있는 이방인 귀부인들은 비록 적은 무리의 귀부인들이었지만, 바울의 선교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는다.
반대하고 핍박하고 박해하는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절호의 기회를 자기들 스스로 포기하고 날려버린 어리석은 여인들이다.
이 여인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자기들 스스로 포기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여인들이다.
주님의 복음을 듣고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귀부인들은 주님의 거룩한 딸, 하나님의 딸로 거듭나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는 여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주님의 복음을 반대하는 쪽일까? 아니면 영접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쪽일까?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영접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는 점이다.
그들 나름대로 반대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회를 반대함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가야만 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적극적으로 핍박하고 박해하면서 반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영접하지도 않은 중간 지대의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은 중간지점에서 어느 방향도 선택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사람들일 수 있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않았노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겠는가
그럴 수 없다. 이것도 저것도 자기가 분명하게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로 판정하고 심판하고 멸망의 길로, 지옥의 길로 끌고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분명하게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들을 보내주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셨다면 반드시 믿음의 길을 선택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정쩡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원하지 않으신다.
술인지 물인지 분명하게 분별하라고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 3:15-16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을 싫어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언가라도 분명하기를 원하신다.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믿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신앙인들은 분명하게 온 몸과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느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믿음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일꾼으로, 사명자로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③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주님.
믿음으로 고백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귀부인들에게 하나님의 귀중한 딸로 삼아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신다.
지금까지는 세상의 권력자의 부인, 권세자의 부인, 재력가의 부인이라는 귀부인이었지만, 이제는 가장 존귀하고 귀중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딸이라는 귀부인으로 당당하게 세워주신다.
귀부인이란 존재는 어떤 모습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인들이다.
좋은 모습이든, 좋지 않은 모습이든 귀부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설령 본인들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면서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주변에서 귀부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요구한다.
가만히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예배만 참석하는 정도로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끼치도록 요구한다면 어떤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야 할까?
하나님께서 귀부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영향력을 끼치기를 원하고 계실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경건한 유대인 귀부인들곽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경건한 유대인 귀부인들은 복음전도를 방해하고 전도자들을 쫓아내는 일에 앞장선 귀부인들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귀한 딸로 인정해 주시는 귀부인들에게 복음전도를 방해하고 전도자를 내쫓는 일에 앞장서도록 감동을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한 신앙의 귀부인들에게는 복음전도의 길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도록 전도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섬기고 협력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귀부인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복음 전도자를 위해서 헌신하고 섬기고 격려하는 일에 앞장선다면 그에 따라서 더 큰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고백하고 증거하고 자랑할 수 있는 복된 여인으로 세워주시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과 시련의 시간들이 몰려온다 하더라도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잡아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전능하신 엘샤다이의 하나님, 라파의 하나님, 샬롬의 하나님, 닛시의 하나님께서 강하게 붙들어주시면서 승리의 깃발을 높이들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실 것이다.
L4 & B4.
오늘 우리들은 귀부인들을 묵상하면서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신앙인들은 분명하게 믿음의 편에 설 것인지, 불신의 편에 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분명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삼위 하나님과 생명의 말씀이신 성경만이 유일한 신앙의 표준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의 편에 서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2-3에 보면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살아왔던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하고 있다.
분명히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귀부인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17:11에서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기록하는 모습을 보면 베뢰아에 있는 헬라의 귀부인들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믿음의 삶을 살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여인들은 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여인들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와 지역사회와 생업 터전과 가정에 선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야 함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베드로후서1:5-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믿음의 본, 사랑의 본, 섬김의 본, 나눔의 본, 온유함의 본, 절제의 본을 보여주고 끼치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성령님의 감동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과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삼위 하나님과 생명의 말씀이신 성경을 유일한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아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한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요 사역자로 세움을 입을 수 있는 축복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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