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사무엘상 16:1-13
사람의 외모와 중심
삼상16:1-13,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다윗 왕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다윗 왕은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삼상 16장부터 마지막 31장까지와 삼하 1장부터 마지막 24장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왕상 1장과 2장에 그의 죽음이 다뤄집니다. 구약이 많은 분량으로 다윗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큰 영향을 끼친 시편은 다윗 이름으로 전승된 것이 많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칠 년을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렸습니다. 재위 기간 역시 깁니다. 메시야가 다윗 후손에게서 온다는 믿음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었을 정도니까 다윗의 위상이 어떤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유명하게 만든 이야기는 왕이 되기 전 목동이었을 때 돌멩이 한 개로 당대 최고수 격투사였던 골리앗을 간단히 제압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골리앗과 싸움이 있기 바로 전에 목동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서 미래의 왕으로 선정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서 ‘이새’라는 사람이 사는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대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극비에 속합니다. 반역으로 불릴 수 있는 이 일이 사울 왕에게 알려지면 아무리 영적인 카리스마가 뛰어났던 사무엘이라 하더라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제사를 지내려고 베들레헴에 온 것이라는 핑계를 댔습니다. 이 제사에 이새 가족을 초청했습니다. 이새와 그의 아들들은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사무엘이 기다리는 장소에 왔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장남부터 차례대로 면접을 보았습니다. 장남 엘리압을 보았을 때 왕이 될만한 청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다른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장남 엘리압이 면접에서 떨어지자 이새는 둘째 아들 아비나답을 사무엘 앞에 세웠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으셨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뒤로 등장한 셋째 아들 심마도 택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일곱 명 아들이 모두 사무엘의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아들들이 더는 없냐는 사무엘의 물음에 지금 들판에서 양을 돌보는 막내만 남았다고 대답합니다. 막내는 이런 면접을 볼만한 나이도 안 되었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겠지요. 사무엘은 막내를 데려오라고 이릅니다. 급하게 불려온 다윗이 사무엘의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사무엘은 준비해온 기름을 다윗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Spirit of Yahweh)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장남을 비롯한 일곱 명 아들들을 모두 제쳐두고 막내 다윗을 선택할 때의 기준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이었습니다. 다윗의 중심됨이 다른 형제들과는 구별된다는 뜻이겠지요.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무엘은 다윗에 앞서 왕으로 기름을 부었던 사울 왕에게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은 이야기는 삼상 9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삼상 9:2절은 사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사무엘이 심사숙고 끝에 외모가 출중한 사울을 첫 번 왕으로 세웠으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본문 7절이 말하는 사람의 외모는 무엇이고 중심은 무엇인가요?
외모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후 4:13절에서 말한 ‘겉 사람’입니다. 외모는 단순히 얼굴이나 몸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조건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개별 사람만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말할 때도 외모 중심주의가 작동합니다. 저는 교회에 관련된 문제와 교회 밖의 문제를 각각 하나씩 예로 들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외모를 꾸미는 일에 아주 민감합니다. 우선 교회 성장론에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로 삼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으나 전반적인 경향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고 했는데도 교회는 계속 외모를 꾸미는 데만 정신을 파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에는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일단 눈에 확 뜨이는 건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이고 교회의 크기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 할 교회도 역시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기가 힘듭니다. 그런 걸 고려해도 한국교회는 너무 지나칩니다. 성형 미인이라고 해도 될까요?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인 돈은 본문이 말하는 외모의 핵심 가치입니다. 지금 21세기는 자본주의가 완전히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일종의 경제 제국주의 성격을 보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로마 제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국주의는 자신들을 삶의 표준으로 삼아 주변 나라를 강제하거나 유혹합니다. 우리나라는 제국은 아니나 정신은 제국주의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북관계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남한 사람들은 남한을 표준으로 삼아서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평가합니다. 북한은 아무리 도와줘도 고마운 것을 모르고 핵무기만 만들고 김일성 왕조가 주민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남한 사람의 속내는 북한이 가난한 나라이기에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독일 본(Bonn) 대학교 철학과 교수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나는 뇌가 아니다』,『생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 세 권을 구매한 지 2년 만에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에 그분이 온라인으로 우리나라 어느 연구 단체에서 행한 강연이 유튜브로 나와 있더군요. 강의 뒤에 남한이 북한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질문을 받은 그는 북한을 힘으로 제압하거나 남한이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건 좋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종의 역지사지라고, 북한의 처지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정치와 경제 문제에서도 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개념을 ethical capitalism이라고 하더군요.
사무엘이 말하는 사람의 외모는 손에 잡히는데 ‘사람의 중심’은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말하는 ethical capitalism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듯이 말입니다. 성경 본문에 나오는 ‘중심’을 영어 성경은 heart로 번역했고, 루터 성경은 Herz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중심’으로 번역했는데, 좋은 번역으로 보입니다. 본문이 실제로 심장이나 가슴을 말하는 건 아니니까요. 우선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저 사람은 중심이 단단해.’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으니까 중심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독재자들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집스럽습니다. 고집불통입니다. 정신 이상자들도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져서 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중요하게 보신다는 사람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13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막내아들, 면접을 볼 필요도 없어서 들에서 양을 돌보다가 졸지에 불림을 받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Spirit of Yahweh)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찬송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겠지요.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형편이 아닌데도 하나님만으로 삶을 만족스럽게 경험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해는 마십시오. 여호와의 영으로 감동되었다고 해서 삶에서 시행착오가 없다거나 종종 삶의 허무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기름을 부어야 할 이가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여호와로부터 인정받은 다윗도 우리 삶의 모범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그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모범적이었다기 보다는 여호와를 가까이했다는, 즉 여호와와 친밀한 관계를 누렸다는 뜻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라는 뜻의 임마누엘 신앙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게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요?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으나 마음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사과를 직접 먹어보지 못했으면서도 먹어본 것처럼 흉내를 내듯이 말입니다. 일상에서 행복했던 경험을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맛난 음식을 먹을 때, 유명 가수의 라이브 연주장에 가거나 외국 여행을 갔을 때 등등이겠지요. 좋은 친구나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겠지요. 오늘날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많습니다. 먹을거리도 많고, 가볼 데도 많고, SNS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그런 행복한 일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행복한 조건이 많이 갖춰진 세상에서 사는데도 사람들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본인은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정말 행복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자신의 불안한 삶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걸까요? 그 실체적 진실을 누가 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조건만으로 정말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만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결혼할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가장 행복한 사람 관계가 연인 관계라서 이런 예를 드는 겁니다. 결혼을 약속할 때는 두 사람의 사랑이 평생 변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결혼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에게는 본래 사랑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설교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만 가능한 사랑을 사람에게서 요구하거나 그런 사랑을 상대방에게 베풀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에는 모두 실패한다고 말입니다. 정확한 분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분만이 우리 영혼에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른 사람도 사랑할 능력을 선물로 받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다윗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에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서 그것 하나만 보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달린 시편 23편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해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로 끝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없다면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없습니다.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왜 부족한 게 없겠습니까. 다윗도 고달픈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는 이유는 여호와만으로 자기 영혼이 배부르다는, 충분하다는,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현대인은 다윗의 이런 믿음과 찬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해도 부족한 게 많다는 사실에만 마음이 갑니다. 반복해서 인정 투쟁을 벌입니다. 아내와 남편에게 ‘나를 사랑해?’라고 물으면서 인정을 받고 싶고, 친구에게도 바라고, 특히 한국 사람들은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아갈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욕심이 유달리 많아서 그런 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방식으로 교육받은 영향이 큽니다. 정치인들은 늘 뉴스에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권력 투쟁이 정치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정치는 지나치게 이전투구식으로 작동합니다. 권력 투쟁에서 승리만이 정치 행위의 절대 목표가 됩니다. 젊은이들이 정치에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게 삶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남에게 돌립니다. ‘남 탓’에 익숙해집니다. 조롱과 혐오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니 ‘부족함이 없는 삶’의 차원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지금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인가요? 하나님이 인정할만한 중심이 바르게 서 있을까요? 쳇GPT에게 물어봐도 정확한 대답을 얻기 힘듭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표징만 몇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처럼 아주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깊이 알고 싶어지고 이야기하고 싶어지고 함께 있고 싶어지듯이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은 바로 그분께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분을 더 깊이 알고 싶어지니까 신학책을 읽게 됩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집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너무 뻔한 대답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형식적으로 경건 생활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즉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고 싶어진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기도와 말씀과 신학 공부와 예배 등등은 겉으로 나타나는 표징, 즉 삶의 경견한 태도라고 한다면 내면적인 표징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기에, 즉 그분과 결속되었기에 그의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자유롭기에 평화롭습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영혼의 평화를 얻습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노예로 삽니다. 세속 문화가 강조하는 자기 숭배도 노예 생활입니다. 현대인은 정말 많은 걸 소유했으나 자유롭지도 않고 평화롭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문제라고 여기지 못합니다. 영혼이 너무 깊이 병들어서, 즉 여호와의 영을 거스르는 자본주의의 영에 사로잡혀서 영혼의 아픔을 체감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영에 온전하게 사로잡힌 이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豫表)일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여호와의 영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 누구도 그런 영적 인식과 경험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이후로 이제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중심 사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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