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1주 주일설교.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장 18~27절)
----------------------------------------------------------------------------------------------------------------
오늘은 대림절 첫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었고, 언젠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백성이 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에 이 소망의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성탄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12월 한달 동안 ‘소망’을 주제로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직 예수님에게 시선을 돌리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과 성령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이루셔서 기다림의 시간이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대림절 첫 시간에는 로마서 8장의 말씀으로 ‘소망’에 대해서, 기다림에 대해서 함께 선포되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로마서 8장 18절 말씀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이 구절은 우리가 한 번 암송했던 구절입니다. 왜 우리가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하느냐, 왜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하느냐, 왜 우리가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느냐, 이런 질문들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은 이 한 구절로 다 설명이 됩니다.
현재의 삶은 고난이요 고통이요 시련일지라도 우리의 삶은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 즉 예수님이 다시 우리에게 오시고 믿음의 사람들을 모으시고, 하늘문을 여시고, 휜 세마포 옷을 입히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거가게 하시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말씀이 로마서 8장 18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제 주신 ‘소망’의 완결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그 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다보면 모두 다 이런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진리의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약속은 절대로 바꾸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 질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비교할 수 없는 영광”, 이 한마디의 말씀만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기만 하여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의 마음은 식지 않고 항상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휴대폰 화면에 이 구절이 배경화면으로 고정 되어 있습니다. 휴대폰을 열때마다 이 구절이 보입니다. 볼 때마다 든든합니다. 위로가 됩니다. 힘이 납니다. 더 잘 믿고 더 기도하고 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주는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 합니다. 소망이 점점 커지게 만드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감동으로 주신 인생 성경 구절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그 인생 구절 중에 이 구절을 반드시 추가 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무조건 외우시고, 깊이 묵상하시고, 이 구절로 기도하고 찬양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고, 기다림의 소망이 넘쳐나는 뜻밖의 은혜가 충만하게 채워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현재 시점에 놓여 있지만, 우리의 마음과 시선은 미래에, 가다림에, 소망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이 대림절을 여는 우리 모두의 소망의 말씀이 되어서,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능력과 동행의 말씀으로 역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구절만 말씀드렸는대도 ‘소망’의 마음이 풍성해 진 것 같습니다. 소망으로 나아가는 다음 구절인 19~22절을 읽어 드립니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아멘.
이 구절들은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즉 인간을 포한한 동물 식물, 자연은 물론이고 과학, 역사, 철학, 종교등과 같은 인류 유산들과 인간의 감정, 사고, 관념 등을 모두 망라한 것을 피조물(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라고 일컬으면서, 이 피조물이 기다리는 단 하나의 소망은 구원과 영생이 실현되는 그날(본문 1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나타나는 것이라고 표현)을 고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썩어 없어져 버리는 육체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무서움이 떠나지 않습니다. 무서움이 더해질수록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영생의 자유를 누리기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해 지는데, 이 간절한 소망을 기다리는 현재 내 삶의 모습은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소망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왜 이리 하루 하루가 힘들기만 할까요? 영생과 자유는 보이지 않는 머나먼 나중에 일어나게될 일이고, 지금 당장의 우리의 삶은 고통 받고 있으며, 소망보다는 당장 바쁜 일들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뜨면 일해야 하고, 아이들 케어해야 하고, 이일 저일 하다보면 잠시 쉬어 볼 틈도 없이 하루가 그렇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허무함만 가득한 나날이 지속됩니다. 참으로 영생과 자유로 나아가는 인생길은 야곱이 고백했던 것과 같이 험난하기 그지 없는 나그네 길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속에서 ‘소망’이라는 희망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20절에는 피조물이 허무함에 굴복당했다라고 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덧붙여셔 있고, 표준새번역에는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이 추가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19~22절은 우리의 삶이 탄식과 고통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면서도 동시에 그 탄식과 고통의 이면에는 소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영생의 자유로 이끄는 힘은 희망과 소망이며, 이 희망과 소망을 굳게 붙잡고 전진하는 사람이 탄식과 고통과 허무을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구원과 영생과 자유를 누리는 그날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탄식과 고통을 걷어내고 바로 이 소망을 붙잡는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소망을 붙잡는 다고 해서 당장 탄식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정말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 있음을 깨닫고, 그 소망을 단단히 붙잡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이 쉽고 가볍게 느껴지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위로와 평안의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나만 고통 받고, 나만 탄식하고, 나만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동일하게 겪는 고통입니다. 우리에게는 특별하게 이 고통을 이길 힘이 ‘소망’이라는 은혜가 진리의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선물 같은 말씀입니다. 소망을 주셨으면 얼른 기쁘게 받아야 하고, 그 소망을 붙잡고, 절대로 놓치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과 진리요 생명되시는 소망이 함께 하고있습니다. 내년 한 해는 내게서 소망이 한시도 떠나지 않도록, 풍성한 소망이 매일 같이 채워지도록 간구하시고,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영생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앞만 보고, 한눈 팔지 말고 전진해 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소망으로 나아가는 23~25절을 읽어 드립니다.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아멘.
앞서서는 피조물들의 탄식과 고통에 대해서 말씀드렸다면, 이 구절에서는 피조물 중에서 인간에 집중해서, 그 인간 중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을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하면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과 동행하는 특별하고 구별된 사람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사람들(비 기독교인)과 믿음의 사람들의 가장 큰특징은 육체로만 살아가느냐, 성령으로 살아가느냐로 구분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이 내 안에 와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느끼는 순간에 비로서 참된 소망을 붙잡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이 와 계심에도 23절 말미에 우리까지도 탄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동행하시고 위로하시고 도와 주신다고 하여도 육체로 살아가는 동안에 겪어야 하는 탄식과 고통은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그 탄식을 이겨나가면서 인생의 결국에는 양자(하나님에게 속학 영생하는 자녀 혹은 하나님 나라에 영생하도록 허락 받은 백성)될 것과 속량(예수 믿음으로 죄 사함받고 구원 얻는 것)될 것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라고 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어렴풋한 기대감으로 기다리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양자, 속량”이라는 확고한 약속을 믿고 기다린다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남다른 각오와 신념으로 기다리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그 자세를 25, 26절에서 들려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소망으로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뜻은, 소망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것이고, 구원 받은 사람은 반드시 소망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뒷받침하는 그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보이는 소망을 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구원받은 증거가 되겠느냐, 보이지 않는 소망임에도 항상 넘치는 소망, 꺼지지 않는 소망, 놓치지 않는 소망으로 살아가야 진정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소망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며 특히 성령이 주시는 소망은 확실한 구원을 이루어가는 증표, 표지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걸림돌이 나타납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을 이루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것을 제대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연약한 심정을 사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에 소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아멘.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기다리는 사람은 무조건 참는 마음을 잃어버러서는 안 됩니다. 참지 못하면 기다림은 포기로 바뀌어 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끝까지 이기는 자가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지못하는 소망, 언제 이루어질지 정해져 있지 않은 먼 미래의 구원의 그날, 이것을 기다리는 방법이 참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 참 답답합니다.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참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며, 참지 않으면 소망도, 구원도 다 허무한 것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소망, 그 소망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보호 받고 위로 받으며 참는자로서 인생길을 이끌려 가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참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의지로 참아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는 말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의 최대한 목표임을 명심한다면 “참으로 기다릴지니라”는 사도 바울의 생생한 증언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참아야 합니다.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림절을 지나시면서 우리 모두가 성령안에서 소망 가운데 구원을 얻은 “우리(구별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십오. 보이지 않는 소망을 꼭 붙잡고 살아가려는 각오를 다지십시오. 마지막으로 참으로 기다라며 반드시 그 날에 이르기까지 이기는 자의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충만을 구하며 대림절 첫 주를 준비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소망으로 나아가는 본문 마지막 말씀 26, 27절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아멘.
우리에게는 소망으로 얻은 구원이 있으며,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은 내가 아닌 성령이 인도해 가시는 동행의 여정임을 알았습니다. 성령이 안 계시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탄식과 고통과 허무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육체도 연약하고, 마음도 연약하고, 의지도 연약하고, 믿음도 연약하여 단 한 순간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온전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26절의 말씀은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도우시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아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구절은 읽을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얼마나 진실하게 도와주시려고 하는지 그 절박함과 간절함을 구구절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27절에서, 이렇듯 우리 연약함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생각(일하심)을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살피시는 이”는 곧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우리의 연약함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처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은 우리가 지고가야할 탄식과 고통과 허무함을 손수 벗겨내 주시고 가볍고 쉴만한 짐만을 지게 하시려는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이 행위는, 우리(성령안에서 소망을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를 향하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높고, 깊고 넓으신 사랑의 마음을 쏟아 부어주신 하늘의 복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긍휼과 자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 한사람을 위해 오직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의 연약함을 살펴 보시고, 내가 지니고 가야할 소망을 이토록 단단하게 붙잡게 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격적인 일이 아닙니까? 만약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사랑하심이 제대로 느껴진다면 누구라도 그 사랑에 감격해서 대성통곡 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토록 우리의 연약함을 돌봐 주시려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이런 일을 하고 계심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도, 연약함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을 이어간다면 날마다 소망으로 충만해지고 날로 믿음이 담대해져 갈 것입니다.
성령이 이토록 내게 주신 구원을 지켜주시고자 애쓰고 계시는 것을 깨닫는다면 내게 주신 소망을 소중하게 여기고 입을 꽉 다물고 굳게 붙잡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령만을 의지하고, 성령과 동행하며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으로 나아가면 우리의 소망은 결코 사그러들지 아니할 것입니다.
26, 27절은 우리가 소망을 잃어버렸거나, 연약함으로 인해 소망을 붙잡을 기력이 없을 때마다 읽고, 또 읽고 , 선포하고 또 선포하여서, 다시 일어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우리 마음속에는 소망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가려는 힘찬 발걸음이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대림절 기간 우리 모두에게 26, 27절의 말씀이 회복의 말씀, 충만의 말씀으로 역사하여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지켜 갈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참으로 기다릴지니라”는 말씀이 힘빠지게 하는 덧 없는 말씀 아니라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과 더욱 동행 할 수 있는 은혜의 말씀이 되어, 나의 소망, 나의 구원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 까지 끝까지 이기는자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는 위로와 능력의 말씀을 들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에 소망이 더욱 풍성해 지게 하시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영생과 자유의 길로 인도함 받아 믿음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신앙의 끈 (0) | 2024.11.29 |
---|---|
복음을 확실하게 알고 신앙 생활해요 = 누가복음01;1-4(241201) (0) | 2024.11.29 |
사람의 외모와 중심 (1) | 2024.11.23 |
성경에 계시된 4개의 하늘 / 창 1 : 1 (0) | 2024.11.23 |
스크랩 교회의 존재 이유(행 2:38-47) - 창립 예배 (0) | 2024.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