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요 = 누가복음01;5-25(241208)
PW : 믿음 BIW : 낙심하지 말라 AG : 신앙인들
TS : 믿음이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고 굳건하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축복의 그릇
어느 마을에 꿀을 뜨는 어르신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에 어르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확한 꿀을 나누어 주겠다면서 각자 담아갈 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작은 그릇을 가져왔고 어떤 사람은 큰 그릇을 가져와서 꿀을 받아 갔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퉁명스럽게 “어르신, 왜 저 사람은 꿀을 큰 그릇에 가득 주면서 저는 이것만 주시나요. 아무리 공짜여도 불공평하지 않습니까?”라고 불평하면서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르신은 “나는 각자가 가져온 그릇에 맞춰 꿀을 주었을 뿐인데 작은 그릇을 가져온 것은 당신이지 않소.”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보다 더 큰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지금보다 더 큰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을 그릇은 내가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그릇을 준비했는가에 따라서 내가 받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분량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큰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내가 준비하는 그릇에 따라서 담기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떤 그릇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릇은 내 믿음의 분량만큼 준비하게 됩니다.
내가 작은 믿음을 가졌으면 작은 그릇을 준비하게 될 겁니다.
내가 큰 믿음을 가졌으면 큰 그릇을 준비하게 될 겁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온 빚진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듣고 준비한 그릇만큼 하나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어떤 그릇을 준비할 것인가는 내 믿음의 수준, 분량 만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편81:10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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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특권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의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앙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믿는 대상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본래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알고 포교할 당시에는 부처님께 소원을 빈다는 개념이 없는 종교이다.
고행의 삶을 살면서 자신이 부처가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인간세계에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무언가 소원을 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에게 자신의 욕망을 들어달라고 기도하는 형태를 지니게 된 것이다.
석가탄신일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등을 가족수 만큼 구매하여 자신의 소원을 그 등에 달아놓고 소원을 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불상을 만들어 세워놓고 그 불상에게 자신들의 소원을 빌면서 기도한다.
무속신앙에 의지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각종 신상들을 세워놓고 그 신상들에게 소원을 아뢰고 그 소원을 들어달라고 애원한다.
무속신앙에 따라서 각종 피조물을 신으로 승격시켜서 그 신들에게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옛날 여인들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는 일월성신 사상도 같은 맥락이다.
해마다 12지신을 섬기는 행위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세상의 온갖 종류의 신들은 인간들에게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인간들이 스스로 피조물들을 신으로 승격시키고 섬기면서 그 신들에게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신앙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곧바로 응답받아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급하거나 정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응답해 주신다.
그런가 하면 기도했을 때 전혀 응답의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자신도 그런 기도를 했던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히 잊어버렸는데, 어느날 오래된 기도가 응받되는 경우도 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인가?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기나 하실까?
싶을 정도로 아무런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로 그때가 되었을 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따라서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예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약에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이 기도한 대로 모든 기도에 그대로 다 응답이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국회의원이나 지자체 선거에 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당선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는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이 각종 선거에서 자신만을 최고의 일꾼이니 자신을 꼭 뽑아달라고 기도하지 않는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한 대로 당선된다면 국회나 각종 기관들이 바로 설 수 있을까?
신앙 생활한다는 사람들이 국가관, 윤리관, 정치관, 가치관들이 엉망진창인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신앙인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렇게까지 못되먹은 성품이나 인품이나 성격이나 국가관, 윤리관, 정치관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어느 교회의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북한의 김씨3부자를 위해서 충성하는 이들이 정치인이 된다면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저는 당연히 이런 악한 종류의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은 악인들의 기도가 그대로 응답받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세워질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인간들이 추구하는 사악한 탐욕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인간의 죄악으로 똘똘 뭉쳐진 세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사람들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은 것이 복이다.
오늘 우리 하나님은 기도하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자세를 가지고 믿음 생활하라고 말씀하고 계실까?
우리들은 어떤 믿음의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가?
D4.
① 그래도 낙심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마치 사가랴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엘리사벳에게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잉태의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말씀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에 사가랴 제사장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이라면, 가브리엘 천사가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라고 반응했을까?
60대, 70대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주일 예배시간에 강단에서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데, 불현듯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더니, “000목사야, 네 아내 000 사모가 이미 폐경이 되어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야.”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목사님은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을까?
아마 이 말씀을 들은 목사님은 기분이 삼삼하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망성이 있을 때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이 나이에 하나님께서 늦동이를 주시려나 보다.’ 하면서 “아멘, 감사합니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자기 몸은 쇠약할 대로 쇠약하여 남자 구실도 못하고, 부부관계도 이젠 전혀 못하는 데, 이미 아내는 폐경이 되어 아무런 반응도 없는데, 그래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망성이라곤 전혀 없는데, 어떻게 그 말씀을 믿을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사가랴 제사장은 자신과 아내가 그런 형편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믿을 수 없다고 반응하는 것이다.
사가랴 제사장이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믿을 수 없다고 반응했을 때, 아이를 낳을 때까지 농아인이 되는 증표까지 주신다.
사가랴 제사장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곧이어 응답받았다면 “아멘, 할렐루야.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방방 뛰면서 기뻐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스가랴 제사장은 전혀 기쁘지도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고, 행복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스가랴 제사장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믿을 수 없다고 불신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가브리엘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라고 말씀하셨을까?
이 말씀은 사가랴 제사장이 요근래까지 간구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주 오래전에 간구했던 것을 하늘 아버지께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다가 이제 응답하신다는 의미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젊어서 혼인하였을 당시에는 당연히 자녀를 잉태하여 낳을 수 있도록 역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아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누린다고 인식하는 때이다.
그러기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당연히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역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아마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젊어서 혼인하고 중년이 되었을 때까지도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역사해 달라고, 태를 열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 당시에 임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무엇이든 다 해 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잉태의 문을 열어 달라고 쉬임없이 간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혀 임신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서 지금은 엘리사벳에게 정수가 끊어지고 만다.
월경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나올 때까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잉태할 수 있도록 태를 열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월경이 나오지 않는다.
여인들은 월경이 끊어지면 아이를 잉태할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엘리사벳의 경수가 끊어지자,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는 아이를 주시지 않는구나.’ 하면서 더 이상 아이 문제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더 이상 아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이젠 더 이상 가망성이 없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는 아이를 주시지 않는구나.’하는 마음에 낙심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낙심한다.
낙심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요.
전능하신 하나님, 온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는 왜 자녀를 주시지 않는 겁니까?
우리가 뭐가 그리 많이 모자라고 부족해서 우리 가정에는 자녀를 주시지 않는 겁니까?
주변에 있는 누구누구에게는 많은 자녀를 주시면서 우리 가정에는 자녀 하나도 낳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라고 하면서 실망하고 낙심하면서 원만하고 불평하지 않았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낳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녀를 낳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이라고 인식하면서 사는 민족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많은 자녀를 낳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여인으로 자존감을 상실하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지 못했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하는 자괴감,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엘리사벳은 다른 여인들은 그렇게도 임신이 잘 되는데, 왜 나에게는 임신 한 번 못해 보고 인생을 마감해야 하나?
엄마라는 호칭, 맘마라는 호칭, 어머니라는 호칭,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침통해하면서 낙심하지 않았겠는가?
사가랴 제사장도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사명, 제사장의 사명을 충성스럽개 감당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원치 않는 자식들까지 낳게 하면서 왜 자신에게는 아빠라는 호칭, 아버지라는 호칭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끝나야 하나?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상속해 줄 아들 하나 없나?
우리는 부모될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나요? 하는 마음에 낙심하지 않았겠는가?
이처럼 사가랴 제사장도, 엘리사벳도 낙심하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올 한 해 동안, 아니 몇 년, 몇 십 년 동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면 낙심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가족 구원의 문제, 자식들의 진로 문제, 생업 터전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신앙과 사역의 문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한다.
어떤 때는 금식 기도도 하고, 철야 기도도 하고, 산 기도도 하고, 작정 기도도 하고, 수없이 이 기도원 저 기도원을 찾아다니면서 기도하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도 부탁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기도하는데, 아무런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낙심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당연히 낙심한다.
목사인 저도 당연히 낙심하게 된다.
낙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그래도 오늘 사가랴를 찾아오신 가브리엘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꿈도 사라지고 없는 이때에 찾아오셔서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매우 구체적으로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라고 말씀하면서 엘리사벳이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도 미리 정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의 태를 통해서 낳을 아들이 장차 어떤 일을 감당하게 될 것까지도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시간대를 가지고 계시지만, 지구촌에 인간이라는 피조물로 살아가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시간은 엄청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가랴 제사장에게 찾아오셔서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라고 하시는 말씀은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말씀이다.
오랫동안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해서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웠겠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무런 역사도 이루어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서 낙심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도와 간구를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바로 그 때, 그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제국에게 노예살이, 종살이하면서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법까지 만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다.
너무나 고통스런 시절을 보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는다.
이 모습을 출애굽기 2;23-25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② 때가 되었을 때 드디어 역사하시는 하나님.
오늘 하나님께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가랴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서 응답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24절에서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25절에서 엘리사벳은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뜻대로 역사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전폭적으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의지와 계획과 비전에 따라서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아무리 인간이 금식하고 철야하고 작정하면서 발악하더라도 인간의 뜻과 의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 계획과 섭리와 주권을 따라서 추진해 나가실 뿐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시는 그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만사 제쳐놓고 그 일에 응답하시는 분이다.
사람은 다 포기해 버렸는데, 사람은 더 이상 그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마음 쓰고 있지 않는데, 이제야 하나님께서 먼저 서둘러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급하셨으면 스가랴 제사장이 성소 분향단에서 분향하는 그 시각에 천사를 보내서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서둘러서 찾아오시고 역사해 주실 때까지 신앙인들은 더 이상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온갖 추태를 부려봐야 우리들만 하나님 앞에서 못난이 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못난이 꼴을 보여주지 말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살고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③ 숨어 지내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의 태를 열어서 엘리사벳은 잉태하게 된다.
이미 여인으로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을 다 잃어버린 후에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회춘시켜 주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무능에서 유능으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시기 시작하신다.
히물히물하고 맥없이 다 늙은 사가라에게도 왕성한 힘을 주신다.
냉냉하고 메말랐던 다 늙은 엘리사벳의 질도 생기가 돋아나고 다시 월경도 시작한다.
그러면서 엘리사벳에게 잉태의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엘리사벳 여인은 자신의 몸에 예전에 없던 반응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여인으로서 느끼는 촉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은 조심스럽다.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녀라는 사실은 너나 할 것 없이 온 가족들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자신이 잉태했다고 이야기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이제 노인네가 되더니 노망하나? 저 노인네가 이제는 완전히 미쳤나 보네. 이제는 하다 하다 치매까지 걸려서 헛소리까지 하네.”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이 잉태에 대하여 잠잠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아이 잉태한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숨어지내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24절에서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집 밖에도 나가지 말고 집콕하면서 살라고 감동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엘리사벳의 태에 잉태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집콕하면서 살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잉태한 엘리사벳은 묵묵히 기다리고 있으면 서서히 배는 올라올 것이고, 때가 되면 출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가족들과 온 동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축하한다고, 너무 좋은 일이라고, 이거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라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는 분이라고...,
온 동네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엘리사벳이 출산하였을 때 57-58절에서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생기면 입이 근질근질하여 누군가에게 알리고 자랑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소위 “너만 알고 있어!”라고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입을 굳게 잠그고 살아야 할 때도 있다.
그야말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묵묵히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실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수고도 필요할 때가 있다.
무턱대고 자랑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다.
하나님께서 잠잠하라고,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말라고 감동을 주셨다면 아무리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도 묵묵히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묵묵히 믿음으로 기도하고 소망하면서 기다림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L4 & B4.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각각 다르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못한다는 것이 인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계획한 대로, 자신이 꿈꾸는 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대로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삶이란 것이 그리 녹녹하지가 않다.
원한다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고 낙심하면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2023년 9월에 진안 성수 도통리 밭에 거금 50만원 이상을 써가면서 목수국 나무 어린묘목을 400그루 이상 심었다.
나무 묘목을 심으면서 나무수국 꽃이 활짝 피게 될 것들을 상상하며 너무나 행복했었다.
그러면서 겨울을 잘 이내내고 봄이 되면 힘차게 새싹을 돋아나오기를 기대했었다.
저는 나무묘목만 심으면 되는 줄로 알았다.
상토에 삽목하여 싹이 나오고 뿌리가 내린 어린묘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밭에 심으면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무를 어떻게 심어야 흙에 제대로 뿌리가 내릴 수 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포트에서 꺼내고 심은 것이다.
그런데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고 특히 비가 많이 왔는데, 포트에 심은 상토가 흙을 비집고 올라오면서 나무 묘목이 다 뽑혀지고 만 것이다.
사람이 직접 묘목을 뽑아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나무 묘목들은 뽑혀 있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이 쓰리고 아픈지....
너무나 낙심이 되고 서글퍼서 한참 동안 가슴으로 울어야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한다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실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그래서 낙심이 되고 좌절이 되고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하나님은 원하는 대로 되어 지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상황에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하고 계실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때 아이를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들을 낳았으면 아버지를 따라서 제사장이 되는 것이고, 딸을 낳았으면 제사장에게 시집을 가서 제사장의 아내가 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해진 삶이다.
사가라가 젊었을 때 기도한 대로 아들을 낳았다면 사가랴의 아들은 본래 아버지를 따라서 평범하게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아들에게 가지고 있는 계획과 뜻은 평범한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제사장의 직분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아들에게는 제사장의 가문이면 누구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제사장의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아들에게는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삶을 살게 하고 싶으신 것이다.
엘리사벳이 혼인하여 곧 아이를 낳았으면 평범하게 제사장의 삶을 사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꿈과 비전은 일반 제사장의 삶이 아니라 엘리야의 심정을 지닌 선지자,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그런 선지자의 삶을 살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가진 꿈과 비전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뜻과 계획과 비전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잠언16:9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의지를 따라서 역사해 나가시는 분이 아니다.
전폭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과 의지와 계획과 섭리에 따라서 역사해 가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난 영력, 영권을 지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지신 온전한 뜻과 의지와 계획을 깨닫지 못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계획의 때가 되었을 때, 우리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것 때문에 마음 쓰지 않으려고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찾아오시고 역사하시면서 그 일을 이루어가실 때가 있을 것이다.
올해 한 해를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로 포기하고 싶고 낙심하고 좌절할 일들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온전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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