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마태복음 1장 18~23절) 12/25 수

열려라 에바다 2024. 12. 26. 15:14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마태복음 1장 18~23절) 12/25 수
 
백대영추천 0조회 424.12.26 13:30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태복음 1장 18~25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1)
오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사도신경 구문을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 자궁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에 “예수 크리스트의 탄생이 이렇게 하여 있었으니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에게 약혼시켜진 때에 그들이 함께 되기 전에 자궁 안에 별된 (Holy Spirit)에서 가지는 그녀가 발견되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Jesus)”(이에수스)는 구약 “예수아”의 그리스어 형태로 “예호수아”의 다른 형태입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구원자의 사명을 갖고 태어난 자의 이름으로 적합한 것입니다.
“예수(Jesus)”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경로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예슈아”라는 히브리어 이름이 그리스어식으로 바뀌면서 뒤에 “아”가 탈락 “이에수”가 되고 그리스어 이름에 붙는 시그마(-s)를 붙여 “이에수스”가 되고 “아” 같은 모음은 흔히 생략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s”를 붙인 것은 그리스어가 공용어였기에 그리스어식으로 부른 것이며, 히브리어 “예슈아”와 그리스어 “이에수스”는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크리스트(Christ)”를 한국의 옛날 성경이 번역하였으며 그리스어 “크리스토스”를 음역한 말로 “스”가 탈락된 것입니다. 저는 원어의 발음에 가깝게 “그리스도”를 “크리스트(Christ)”라 합니다.
“기름 붓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크리오”에서 나온 말이며,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 해당합니다. 즉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메시아”의 신약의 표현이 “크리스트”입니다.
나심”이라고 번역된 말(게네시스)은 “탄생(birth)”을 뜻하며 “탄생(誕生)”이라는 한자는 “태어날 탄(誕)”과 “날 생(生)”의 연결입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영어는 “크리스트(Christ)”와 관련되며 우리말 “성탄절(聖誕節)”은 “  기”를 줄인 말입니다.
“성탄절(聖誕節)”은 성자 예수님의 태어나신 일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예수님의 탄생일을 정확히 알 수 없고 12월 25일로 정하여 기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에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지는 않고, 성탄절은 미혼의 남녀들이 성적(性的)으로 타락하는 죄악에 사용됩니다.
약혼(約婚)”이라는 한자는 “묶을 약(約)”과 “혼인할 혼(婚)”의 연결로, “약속(約束)”이라는 한자어 자체가 “묶는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약속”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말로 묶어서 자신을 옭아매는 것입니다. 약속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묶이는 것입니다.
“혼인(婚姻)”은 “남자와 여자가 예를 갖추어 부부가 되는 것”을 뜻하며 “약혼(約婚)”이라는 것은 “결(結婚)하기로 속(約束)하는 것”입니다.
약혼시키다”라는 말은 현대 “약혼”보다 그 뜻이 깊어서,2) 약속했다가 언제든지 없던 일로 하자고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약혼은 이혼 절차 없이 파기되지 못하는 계약 관계를 뜻하였습니다. 약혼은 여자가 12~13세에 양가 부모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정식 혼례가 치러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3)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Mary)”인데 마리아가 약혼하였는데, “요셉”과 약혼하였습니다.
동거(同居)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쉬넬코마이)는 “함께 되다(come together)”를 뜻합니다.
우리 한국어 개역 번역은 이것을 “동거(同居)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동거(同居)”라는 한자어는 “함께 동(同)”과 “있을 거(居)”의 연결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살며 섹스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타락해 결혼하기 전에 섹스하나 옛날에는 안 그랬습니다.
잉태(孕胎)”라는 한자어는 “아이 밸 잉(孕)”, “아이 밸 태(胎)”입니다. “잉태(孕胎)”는 “임신(妊娠)”을 뜻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 예수 크리스트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신 것이며, 우리가 예배하며 믿음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합니다.
자연적으로는 여자 혼자서는 결코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남자가 있어서 섹스해야지 임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달걀 사 먹고 어떤 사람은 오리 알도 사 먹잖습니까? 그런데 달걀을 이불에 넣어서 따뜻하게 만들어도 병아리가 안 나옵니다.
왜 안 나옵니까? 암탉을 좁은 곳에 가두어 달걀 낳는 기계처럼 기르니 달걀을 낳아도 달걀에서 병아리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암탉을 수탉이 같이 밖에 풀어놓아서 암탉하고 수탉과 섹스를 할 때만 그 유정란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암탉만 있으면 알은 낳으나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오리 알에 오리가 생기려면 남자 오리도 있어야지 오리가 생기는 것이지 여자 오리만 있으면 그냥 알이고 오리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동물도 그렇고, 사람도 그런 것입니다.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임신을 할 수 없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 의하면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마리아가 섹스해서 임신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입니다.
“동정녀”라는 말이 어렵잖습니까?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하자면 “처녀”, 영어로 “virgin”, 처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녀가 아직 결혼하기 전에 남자를 성적으로 알기 전에 아직 처녀였고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연적 방법으로 잉태되셨다면 구원자가 되지 못하였는데 왜 그렇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자연적 방법으로 잉태되신 것이면 누구 자손입니까? 물론 요셉의 아들이겠지만, 위로 올라가면 누구의 자손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연적으로 잉태되셨으면, 그는 아담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아담은 죄를 범하였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아담이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들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동물 중에 보면 몸에 노란색 털과 까만색 점이 있는 동물이 있습니다. 노란색 털에다가 까만색 점이 있는 재빠른 동물의 이름이 “표범”입니다.
그 표범이 새끼 낳을 때 뭐가 태어납니까? 표범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표범이 새끼 낳았는데 개가 태어나거나 늑대가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인 아담이 아들을 낳는 때도 죄인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인이니 아담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도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아담의 혈통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표범이 새끼를 낳으면 표범이듯이 죄인이 아들을 낳으면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고, 어떠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 요셉하고 섹스해서 아들을 낳았으면, 마리아의 아들도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면 예수님은 자기 죄 때문에 죽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구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처녀 몸에 요셉과 아무 상관이 없는 방법을 통해 성령으로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때에 아무런 죄 없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아담의 혈통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나신 것입니다. 그에게 죄가 없었기에, 다른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인이셨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인이셨다면 다른 사람들 대신에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에 대신 죽을 수 있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녀 몸에서 나셨기에 태어나실 때부터 죄가 없으셨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녀의 남자 요셉은 올바른 자고 그녀를 드러내기에 원하지 아니하여 그녀를 비밀로 가게 하기에(to put away) 바랐습니다(마 1:19).
마리아가 임신하여 배가 자꾸만 커지니 요셉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나랑 자지도 않았는데 왜 임신했을까? 다른 남자랑 섹스했을 것이야.’
그러고서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의 약혼을 취소하려고 생각하였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의 법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섹스한다면 돌을 던져서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나랑 섹스하지도 않았는데 ‘너 어떤 남자랑 섹스한 것이야?’ 사람들 모은 후 ‘이 여자가 나랑 섹스하지 않았는데 간음하였어.’라면서, 먼저 돌을 던지고 다른 사람도 돌을 던져 그녀를 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올바른 자고 그녀를 드러내기에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남자랑 섹스해 임신했으니 돌 던져 죽입시다’라고 할 수 있었는데, 요셉은 그녀의 상태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약혼을 끊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마리아를 다른 사람 모르게 돌려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이것들을 숙고하였고 보라 주의 천사가 꿈을 따라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에 “너는 너의 여자 데리고 오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그녀 안에 낳게 함을 받은 자는 성령(Holy Spirit)에서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요셉에 그 여자를 데리고 오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성령님에서 아이를 배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특별한 방법에 따라 일어난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앞에 18절에 언급된 사실을 요셉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해산하리니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라 이는 그가 그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부터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예수”라는 이름(이에수스)의 최초 형태는 “여호수아”(예호슈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의미를 알면 “예수”라는 이름(이에수스)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여호수아(Joshua)”(예호슈아)는 “여호와”(예호와)와 “구원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야샤으”가 연결되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에 적합합니다.
마태복음 1장 22절에 “예언자를 통하여서 주께 의하여 이야기된 것이 채움을 받았기 위해(might be fulfilled) 행해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先知者)”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예언자(prophet)”를 뜻하며 “먼저 아는 자”가 아니라 “미리 말하는 자”, “대신 말하는 자”입니다.
이루다”라고 번역된 말(플레로오)은 “채우다(fulfill)”입니다. 비유적으로 “완성하다”, 이행하다”, “성취하다”(fulfill)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그 처녀가 자궁 안에 가지고 아들을 해산하고 그들이 그의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라고 번역함을 받는 바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주께서 그가 너희에게 표적(sign)을 주실 것이라, 보라 젊은 여자(virgin)가 임신하고 아들을 낳겠으며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젊은 여자”는 문맥이 그 판단을 허용한 본문에 “처녀”를 뜻합니다.4)
보수주의자들은 ‘결혼하지 아니한 젊은 여자’를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70인역은 “젊은 여자”의 처녀성 뉘앙스를 잘 살려서 번역하였습니다.5)
마태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주장한 것은 부조리하지 아니합니다.6) 이 용어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에 이미 “처녀”로 번역된 것입니다.
“동정녀”는 “아이 동(童)”, “곧을 정(貞)”, “여자 녀(女)”가 연결되어서 “동정(童貞)인 여자”, “숫처녀”를 뜻합니다.
“동정(童貞)”이라는 한자는 “이성(異性)과 성적인 접촉이 없는 순결”과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합니다.
“순결(純潔)”이라는 한자는 “생사 순(純)”과 “깨끗할 결(潔)”이 연결돼, “생사(生絲)처럼 깨끗함”, “이성과의 육체관계가 없음”을 뜻합니다.
영어로 “virgin”인데, “virgin”은 “처녀”, “동정녀”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동정녀”는 “남성과 성적인 접촉이 없는 숫처녀”를 뜻합니다.
“숫처녀”는 “남자와 성적(性的) 관계가 없는 깨끗한 처녀”를 뜻합니다. “동정녀”와 같은 말로 “남자와 섹스해 본 적이 없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여자가 남자와 섹스하면 남자 정액이 여자 자궁에 들어가 임신합니다. 여자가 섹스하지 않고 처녀인 상태로 임신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섹스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하고서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하며 이것이 곧 우리가 믿고 매 주일 고백하는 믿음 고백입니다(마 1:18, 23).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7)
임마누엘”은 “신(神)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라는 뜻이며 “~와 함께”라는 “임”과 “신(神)”이라는 “엘”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God with us)가 예수님의 이름이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탄생하신 것입니다.
“성소(temple)”(나오스)는 “성별(聖別)된 장소”의 줄임말입니다. “성별”이라는 한자는 “신성(神聖)하게 구별(區別)하다”의 줄임말입니다. “신성(神聖)한 장소(場所)”가 “성소(聖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여 계실 장소를 “신성하게 구별한 장소”가 “성소”인데 하나님께서는 신성한 분이신 까닭에 신성한 곳에 거주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주하실 수 있도록 사람들이 성소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성소에 거주하시며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비록 불완전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성소였기에 불완전하였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임시방편으로써 사람들이 건립한 성소에 거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에 거주하심으로써 사람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소는 앞으로 신약시대에 있게 될 참 성소의 예표였는데, 성소는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장소가 아닌 사람의 몸에 거주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나신 사람이신 예수님의 몸에 거주하시니,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참 성소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소고 그 성소인 몸 안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참 성소가 그들 가운데 다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그를 보면서도 그가 참 성소인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성소였으며 그 몸 안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사람은 성소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불완전한 성소에 거주하셨으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리아 몸에서 태어난 아들 안에 거주하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이루시고 성육신하셔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성소는 불완전하였으며 임시방편의 예표였고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예수님의 육체가 참된 성소였습니다(마 27:40).
이교도들은 신(神)께서 손으로 지은 성소에 거주하신다고 생각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성소에 거주하시는 분이 아니시며(행 17:24),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육체 안에 거주하셨고, 그의 몸이 성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육체에 거주하시면서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히브리어 “임마누엘”의 성취며 예수님께서 그들 중에 함께 계심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것입니다.
참 성소였으며 그 안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입니다. 히브리어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마 28:20).




2. 예수님께서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1)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법령은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루카복음 2장 4~7절에 “요셉도 갈릴리에서부터 나사렛 도시에서부터 유대 안으로 베들레헴으로 부름을 받는 다윗의 도시 안으로 올라가니, 그가 다윗의 집과 가문(house and family)에서이기 때문이며.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기 위해서니, 그에게 약혼한 임신한 여자나. 그들이 거기에 있는 때에 되었으며 그녀가 해산하기에 날들이 채워졌고. 그녀가 그 처음 태어난 아들을 해산하였고 천으로 쌌고 여물통에 기대니 왜냐하면 객실에 장소가 있지 아니한 까닭이고.”라고 하였습니다.
요셉도 갈릴리로부터 나사렛의 도시에서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의 도시 안으로(to) 올라갔습니다(룩 2:4). 요셉이 다윗의 집과 가문에서이기(was of) 때문입니다.
“다윗의 도시”는 구약성경에서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8)
야곱의 아내인 라헬은 베들레헴의 길 안에 매장되었습니다(창 35:19). 베들레헴은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에 와서 머물게 된 곳입니다. 룻의 손자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며 다윗은 룻의 증손자입니다(룻 4:17).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의 그의 이름이 “이새”인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았습니다(삼상 17:15).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읍이었습니다(삼상 20:6).
미가 5장 2절에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천들 안에 있기에는 작으며, 너로부터 나에게 이스라엘 안에 다스리는 자가 있기에 나오겠고, 그의 기원들은 고대로부터 영원의 날들로부터라.”라고 하였습니다.
루카복음 1장 68~69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송축 받으시나니 그가 방문하셨고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해 구출(redemption)을 하셨으며. 그가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까닭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유대 안으로 ‘베들레헴’으로 불리는 다윗의 도시로 올라갔으니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기 위해서니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습니다(룩 2:5).
그들이 거기 있는 때에 되고 그녀가 해산할 날들이 찼습니다(룩 2:6).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때에 마리아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에서가 아닌 농부의 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9)
그녀가 그 처음 태어난 아들을 해산하고 포대기로 쌌고 구유에 기대니 그 손님 방 안에 그들을 위해 장소가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룩 2:7).
요셉과 마리아가 머무른 곳은 숙박 장소와 붙어 있던 가축우리였거나 아니면 가축우리로 사용하는 어떤 동굴이었을 것입니다.10)
한 지붕 밑에 방 한 칸짜리 본채와 마구간이 함께 있는 가정입니다.11) 집주인이 그 집에서 마구간과 연결된 방을 나그네에게 제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머무는 방에 있는 여물통에다 태어난 아기가 누였습니다.12)
그 후의 이야기는 시간관계상 다 할 수 없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까닭에 아무 죄 없이 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아이로 태어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방긋방긋 웃을지라도 그 아이가 죄가 없느냐?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가 있는 것입니다. 다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까닭에 죄 없이 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믿는 자마다 구원영생을 얻습니다.






1) 박윤선, 『공관복음』, 성경주석 (서울: 영음사, 1983), 11.
2) Donald A.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33상, 채천석 옮김 (서울: 솔로몬, 1999), 106.
3) Hagner, 『마태복음 1-13』, WBC 성경주석, 106.
4) Alec Motyer, 『이사야 주석』, 박문재 역 (서울: 솔로몬, 2018), 176.
5) John Oswalt, 『이사야 Ⅰ』, NICOT 성경주석,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247.
6)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이사야 Ⅰ』 (서울: Exposimentary, 2017), 278.
7) Edward J. Young, 『이사야서 주석 Ⅰ』, 장도선․정일오 공역 (서울: CLC, 2007), 342.
8) David W. Pao, Eckhard J. Schnabel, 『누가·요한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2, 우성훈·배성진 옮김 (서울: CLC, 2012), 101.
9) John Nolland, 『누가복음 1:1-9:20』, WBC 성경주석 35상,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3), 261.
10) Darrell L. Bock, 『BECNT 누가복음 1』, BECNT 성경주석, 신지철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3), 313.
11) Nolland, 『누가복음 1:1-9:20』, WBC 성경주석, 261.
12) Kenneth E. Bailey,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박규태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