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라 AG : 신앙인
TS : 믿음이란 모든 일들을 영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감자 부자
시골에 넓고 큰 감자밭을 운영하는 부지런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다 자라서 도시로 간 몇 명의 자식들이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열심히 감자 농사합니다.
하지만 꼭 감자를 캘 무렵에는 그들이 아무리 바빠도 꼭 자녀들을 불러서 감자 캐는 일을 거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너무나 단호한 명령과도 같은 불호령에 자식들은 어쩔 수 없이 일은 하지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굵고 둥근 감자를 캐서 수북수북 밭에 쌓일 때마다 힘든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는 꼭 감자를 판 돈으로 자식들에게 일부를 나눠주고 제법 많이 남긴 감자를 이웃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자식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자식들은 그토록 힘들게 캔 감자를 그냥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아버지께 매년 항의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냥 웃기만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해에는 자식들이 아버지가 자기들이 고생해서 거둔 감자를 나누어 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해는 그렇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참이 지나서 남은 감자는 일부가 파랗게 변하면서 독이 생기게 되고, 나머지 대부분 모두 썩어서 모두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 심을 씨감자조차도 모자라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자식들을 불러 모아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감자와 같아서 쌓아놓기만 하면 그것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고 썩어 들어간단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을 쌓아놓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물을 나누고 순환시키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를 얻을 때는 땀을 흘려 노력해서 얻을 것과 그동안 주위와 이웃들에게 계속해서 감자를 나눔으로 그들과 덕과 인정을 쌓고 적당한 양의 감자만 남김으로써 감자가 썩지 않고 봄에 다시 심을 수가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자식들이 전혀 모르는 창고로 데리고 가서 이웃들이 매년 받은 감자에 고맙다고 답례로 받은 갖가지 그들이 농사지은 수확물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식들은 아버지의 감자에 대한 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감자 부자들이 참 많습니다.
쌓아놓으면서 주변에 나누어주지 않고 순환하지 못해서 썩어서 자신도 이웃도 모두 다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진정한 부자는 마음과 덕과 자신의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적당한 때에 맞추어 잘 나누는 부자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모아두기만 하다가 썩어 없애는 사람은 아닐까요?
무언가라도 조금씩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신실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가브리엘 천사가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처녀 마리아의 태를 통하여 인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처녀 마리아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순종하게 된다.
그러자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평생 불임녀로 살던 친족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벌써 6개월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리아는 천사가 일러준 말씀이 진짜인지 알고 싶기도 하고, 축하드리고 싶기도 하여 엘리사벳을 만나고 싶어한다.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 떠나게 된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D4.
① 때와 시기를 역사하시는 하나님.
39절에서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는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6개월이 되던 시기이다.
임신 6개월이면 태아가 안정권에 접어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이제야 비로소 성령에 의하여 임신하는 상태이다.
좀 더 지나면 엘리사벳은 출산할 때가 되고, 마리아는 이제 임신의 징조가 보이고, 좀 있으면 입덧하게 될 시기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사가 들려준 말씀이 진짜인지를 확인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적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동네까지 찾아갈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마리아가 살고 있는 나사렛과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동네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가는 동네는 유대의 한 동네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가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엔 케렘(Ein Karem)”이라는 지역이다.
엔 케렘이라는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4km 정도 떨어진 예루살렘의 외곽지역이다.
이곳은 해발 600m 정도 되는 곳으로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지금 이곳에는 러시아정교회수도원과 마리아방문교회당과 세례요한탄생기념교회당이 세워져 있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나사렛에서 엔 케렘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이다.
지금이야 교통편이 편하기 때문에 쉽게 왕래할 수 있지만, 성경 시대에는 교통편이 전무한 상태이었기 때문에 순전히 걸어서 왕래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북부지방에서 중부지방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북한의 양강도, 함경도에서 출발하여 중부지방인 서울로 내려오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출발하여 며칠 동안 걸어서 예루살렘 서남쪽 엔 케렘에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동네로 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교통편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걸어서라도 엘리사벳을 만나 뵙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와 시기를 조정해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든 가장 좋은 시기에 무언가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도 때가 있다.
물론 평생 공부하며 살아야 하지만,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도 때가 있다.
취직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여행하는 것도 때가 있다.
결혼하는 것도 때가 있다.
아무 때나 적당하게 결혼하고 싶다고 해서 결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보면 결혼 적기를 지나서 좀처럼 결혼하기 어려워하는 가정을 많이 본다.
지금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감동을 주시고 계신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적기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라고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그 일을 할 수 없도록 여러 갈래로 막고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은 그 일을 수행해서는 안 되는 시기 때문에 막으시면서 가장 좋은 적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시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해 나가시는 시기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때와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무엇을 하든 어느 때에, 어느 시기에 그 일을 시작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다 보면 때와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해서 시기를 놓쳐버리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늘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시기와 때를 깨우쳐 달라고, 감동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야 한다.
② 정확한 목적지와 방향을 설정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40절에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루살렘의 서남쪽 방향인 엔 케렘에도 해발 600m의 깊은 언덕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에 마을을 형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동네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가 방문해야 할 집은 아니다.
마리아가 엔 케렘까지 찾아오는 것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서 북부지방 나사렛에서 중부지방 엔 케렘까지 힘들게 걸어서 찾아오는 것이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정확한 방향과 목적지를 설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분명한 목적지와 방향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향방없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 지를 제대로 설정하지 않으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선박과 같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의 삶은 분명하게 방향을 설정하고 목적지를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삶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
누군가가 신앙인들에게 “당신은 왜 삽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이 살아가야 하는 최종 목적지는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다.
신앙인들이 자나 깨나 항상 주시하며 살아야 하는 목적지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씩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씀한다.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향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이라는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③ 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으로 들어가서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린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소망하면서 문안을 올리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늘 언제나 함께하심을 소망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평안, 평강이 영광중에 임재하여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며 문안을 올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70명의 제자들을 세워서 전도를 보내면서 누가복음10:5-6절에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어디를 가든 그곳에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평강이 임할 수 있도록 평안을 빌어주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인들이 빌어준 평강이 그곳에 임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 평안이 그곳에 임하겠지만, 혹시 그곳에 그 평안이 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신앙인들이 빌어준 바로 그 평안은 신앙인에게로 되돌아와서 그 평안이 신앙인들의 평안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평안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
마음이 밴댕이처럼 옹졸하고 좁아서 부정적이면 누군가에게 평안을 빌어주기가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경제적인 삶이 넉넉하게 살 수 있으면 좋은 일이지만, 설령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여 빈궁한 삶을 살더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심장과 마음을 품고 마음과 믿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인의 행복은 결코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신앙인의 행복은 마음과 영혼이 넉넉하고 부유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인은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와 권리와 특권을 지니고 있다.
신앙인은 늘 누군가를 향하여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도록 내면에 축복의 메시지를 품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축복으로 한가득 채워놓아야 한다.
축복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이들에게 기쁨과 행복과 새로운 소망과 꿈을 심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축복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축복은 서로 쌍방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서로 상대를 위하여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에게 마리아를 축복하면서 문안하도룩 감동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에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은혜를 입혀주신다.
41-45에서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하면서 마리아를 향하여 축복한다.
42절에 보면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를 향하여 축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 소리로 축복하면 안 되는 것일까?
얼마든지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하는 목소리로도 축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축복하는 것이다.
그만큼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찾아옴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놀라움과 감격과 감동의 모습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더더욱 인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임신한 여인의 모습으로 찾아온 마리아를 보면서 놀라움과 감격과 감동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성령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성령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일반인들과는 무언가 달라도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선포하고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존재이다.
신앙인들의 마음과 입에서는 언제나 가족들을 비롯하여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향기와 냄새가 풀풀 풍겨 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부르는 “크리스챤(Christian),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바로 예수쟁이, 작은 예수,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수쟁이요 작은 예수요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냄새가 풀풀 풍겨 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④ 평범한 만남을 특별한 만남으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친족이다.
친족간의 만남은 일반적인 평범한 만남이 되는 것이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와서 문안하고 이에 엘리사벳이 화답하는 문안 인사는 인간적으로 보면 평범한 친족간의 만남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평범한 만남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만남, 누구나 가볍게 만날 수 있는 만남, 특별할 게 전혀 없을 것 같은 만남이다.
언제든지 두 사람이 서로 만나려고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만남이다.
특별하게 만나지 않더라도 평범하게 만나서 담소를 나누고 커피 마시고 식사하면서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처럼 평범한 만남을 아주 특별한 만남으로 승격시켜 주신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은 아주 평범한 만남과 인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리아에게 축복하며 특별한 만남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평범한 만남을 메시야의 어머니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만남으로 만들어 가신다.
인간적으로는 아주 평범한 만남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평범한 만남을 아주 특별한 만남으로 만들어가시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세례요한의 어머니로, 마리아는 구세주 메시야의 어머니로 만남을 만들어 가신다.
앞으로 인생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할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의 만남도 그렇다.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만나서 담소 나누고 커피 마시고 식사하면서 교제할 수 있는 만남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만남을 통해서 아주 특별한 만남으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오고 가는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의지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 만남이 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만남이든 그 만남 자체가 굉장히 소중한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 만남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만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만남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 중에 어떤 만남이 진행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만남을 통해서 어떤 놀라운 일을 추진해 나가실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복음의 모임이 되었든, 사업상의 모임이 되었든, 교제의 모임이 되었든, 성경공부의 모임이 되었든, 기도의 모임이 되었든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한 모임을 모이고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에게서 평범한 만남을 넘어서 얼마든지 특별한 만남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놀라운 구령의 계획과 섭리와 주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만남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⑤ 영적으로 재해석하게 하시는 하나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와서 문안을 드렸을 때, 41절에 보면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44절에 보면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리아에게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이가 뛰놀았다는 표현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임신 6개월이기 때문에 아이가 태중에서 태동하는 모습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태중에 있는 아이가 태동하는 모습인데, 이 모습을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문안하였을 때, 주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뛰놀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태동을 느끼는 순간이지만, 이 순간을 영적으로 재해석하여 아이가 복중에서라도 주님을 맞이하기 때문에 너무나 기쁘고 좋아서 뛰논다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인간적인 일을 영적으로 재해석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메시야, 구세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처럼 보여서 복중에서 뛰놀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시각으로 보면 태아가 복중에서 태동하는 모습이지만, 신본주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해 주신 주님께서 복중에 찾아오시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마음과 생가과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해석은 어떤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분석하는가에 따라서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악해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더욱더 영적으로 깊게 성찰하면서 신앙인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가 더욱더 진국같은 영적인 사람으로 성숙해져 가는 경우도 있다.
엘리사벳 부부는 더욱더 신앙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가 풍성해지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삭과 야곱을 보면 이삭은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영적으로 둔해지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야곱은 아버지와 달리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더 영적으로 깊어지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신앙인들은 나이가 하나둘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영적으로 얇아지고 둔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더욱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커져서 성숙해지는 신앙인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성숙해지기를 갈망하면서 하루하루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비가 오고 나면 하늘에 둥그랗게 생겨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른바 무지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무지개는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성경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아 홍수 이후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실제로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창세기9;11-16절에서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가지고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는 언약으로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무지개는 노아 홍수 이후에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무지개는 아주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릴 때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양동이에 물을 담고 유리 조각을 양동이에 집어놓으면 무지개 만들어지는 것을 실험했던 기억이 있다.
무지개는 보편적으로는 비가 온 다음에 찬란하게 햇빛이 비추면 선명하게 무지개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런 현상은 홍수 이전에는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로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던 현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때부터 있었던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그냥 자연적인 현상으로 일어나는 무지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지개였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자연현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아 홍수 이후에 나타나는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의 증표가 선명하게 담겨 있는 무지개, 의미있는 무지개라는 것이다.
이것을 언약의 재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셉이 형들의 모함을 받아서 애굽의 종으로 팔려나가서 고통스런 삶을 산다.
그런데 요셉과 늘 함께 동행하셨던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고 중동지역에 불어닥친 풍년과 흉년을 잘 관리할 수 있게 한다.
중동에 불어닥친 7년 대흉년으로 인하여 온 식솔들이 굶어 죽게 되는 과정에서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들을 듣게 된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서 곡식을 구매해 오라고 하면서 보낸다.
곡식을 구매하기 위해서 두 번째 찾아온 형님들에게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창세기45;4-8절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종으로 팔았지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모든 식솔들을 대흉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서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을 언약의 재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본주의 사람은 나타나는 증상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본주의 사람은 똑같은 현상이요 증상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영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앙의 사람은 인간적인 일을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인답게 영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아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적인 모습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영적으로 재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에게만 보이는 모습이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임신한 구세주 예수님을 향하여 축복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는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신앙인들을 향하여 축복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이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문안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일임에도 재해석하여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은혜라고 재해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의식하는 믿음이다.
바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관점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영적으로 바라보고 영적으로 축복하며 사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일생에서 교회와 가정과 생업 터전과 나라와 민족과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영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계획과 뜻을 인정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삶의 근거들이 하나님에게서 와서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영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다.
L4 & B4.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영적으로 재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영,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것이다.
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두려움과 무서움과 온갖 근심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여 명의 신앙인들에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시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성령이 임재하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제국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언제 어떤 일이 자신들에게 불어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온갖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에 사로잡혀서 벌벌 떨던 신앙인들이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임재하심을 입은 후에는 주변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모든 좋지 않은 상황들, 불안 요소들, 위급한 상황들이 하나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실제로 자신들의 온몸으로 느껴지고 고백이 되어서 평안하기만 하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당당해지고 담대해지고 굳건해지는 자기 자신들을 발견하면서 자기들 자신이 먼저 놀라워할 정도이다.
제자들을 비롯한 신앙인들은 밖으로 나가서 당당하고 담대하게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구원에 대한 복음을 외치고 있는 자기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② 성령에 사로잡혀서 영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적인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 확신한다.
그러기에 쪼잔하게 세상의 사소한 일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고 좀 더 크고 넓고 높은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높은 경지에 속한 사람이다.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는 좀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통 크게 양보할 수 있고, 손해 볼 수도 있다.
어떤 일 하나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묵묵히 영원한 천국의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든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전하고 실천하면서 구원의 세계를 활짝 열어가는 사람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과 요셉과 마리아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을 보내고, 인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내면서 하늘 아버지께서 실현해 나가시려는 하나님의 나라 회복과 구원의 세계를 활짝 펼쳐 나가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 요셉과 마리아의 두 가정을 사용하셨듯이, 21세기 오늘날에는 신앙인들의 가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선포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추진해 나가시는 구원의 놀라운 세계를 펼쳐 나가고 싶어 하신다.
신앙인들은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인식하면서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추진해 나가시는 비전의 세계, 구원의 세계에 참여하고 쓰임 받는 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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