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이름을 지어라 AG : 신앙인
TS :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지어주신 이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노부부가 50년간 살게 된 비결
요근래 신년이 되면서 4건의 장례식 부고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두 분이 동기 목사님 가정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한 분은 98세의 목사님 아버지가 소천했다는 부고이고, 다른 하나는 90세의 장인어른이 소천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83세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살아계신다면 90세가 넘었구나 싶었습니다.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에 어르신들이 많이 세상을 하직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르신네들 사이에서 9988234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정도 앓다가 죽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9988오징어’라고 합니다.
99세까지 88하게 오래오래 징그럽게 어울리며 살다가 2...3일 정도 앓다가 죽자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아주 강합니다.
어느 노부부의 결혼 50주년을 축하하는 금혼식(金婚式) 잔치가 열렸습니다.
두 분은 자녀를 12명이나 낳아서 잘 키웠습니다.
이제 손주가 24명이나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축하하는 잔치에 참석한 손님 한 사람이 할머니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이 뭡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유. 우리가 오래전에 서로 약조한 게 한 가지 있어요.
먼저 보따리를 싸서 떠나는 쪽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기로요.”
결국은 혼자서 자식들을 떠맡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오래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오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9988 건강하게 오래 사는 축복도 받고, 또 죽어서도 천국까지 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천국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사는 성도들이라야 합니다. 아멘
P4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3개월 동안 무엇을 하면서 지냈을까?
아무래도 마리아는 임신 초기이고, 엘리사벳은 임신 말기이기 때문에 임신에 따라서 몸이 변화하는 현상과 출산 이후의 양육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나사렛 동네로 돌아가서 요셉과 혼인하고 출산을 준비하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엘리사벳은 임신 9개월이기 때문에 출산할 시기가 다가온다.
출산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기대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도 들기 시작한다.
이때는 어느 때보다도 더 이랬다저랬다 하는 양가감정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곧 아이를 출산할 임산부라면 어떤 심정일까?
아이를 낳아본 여인들은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 들었던 마음을 되살려 본다면 엘리사벳의 심정은 어떨까?
D4.
① 출산하게 하시는 하나님.
마리아가 나사렛으로 돌아간 다음에 엘리사벳은 출산할 시기가 앞으로 하루하루 다가온다.
드디어 엘리사벳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젊은 여인들도 자연 출산하기란 쉽지 않은데, 엘리사벳은 이미 할머니가 된 어르신인데도 출산하는 것이다.
고고고고고대사회에서 출산하는 방법은 자연 분만으로 출산하는 방법밖에 없다.
오늘날처럼 제왕절개하는 방법으로 출산하는 시기가 아니다.
자연분만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특별히 엘리사벳은 이미 할머니반열에 들어간 노산이었기 때문에 걱정과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산으로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엘리사벳의 몸을 잘 돌아봐 주시면서 자연 분만하여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은혜를 입혀주신다.
이사야66:9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늙은 엘리사벳에게 임신시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에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출산하여 건강한 아이로 양육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의 삶에 부분부분 하나하나 모든 것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올려드리고 엘샤다이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② 사명자의 이름까지도 지어주시는 하나님.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에 아버지나 전문 할례사에 의해서 아들의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행하게 된다.
할례를 행하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맡겨드린다는 의미도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도 담겨있고, 이제는 완전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선포하는 의식으로 행하는 것이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들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할례를 시켜주지 않으면 그 아버지는 아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세웠다고 여기면서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끊져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세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다고 여기면서 “끊쳐진다. 죽는다”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고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행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
친족들이나 이웃들은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Zechariah)라는 이름을 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단호하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사가랴 제사장이 성전 성소에서 분향할 때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붙여주신 이름이다.
엘리사벳이 사가랴 라는 이름이 아니라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주려고 하자, 친족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은 자신들의 가문에는 전혀 없는 이름이요 어울리지도 않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만류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근 1년 동안 말을 하지 못하는 사가랴에게 눈짓, 발짓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었으면 좋겠느냐? 라고 묻는다.
사가랴는 글을 쓸 수 있는 서판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친족들이 가져온 서판에 사가랴는 당당하게 “요한(John)”이라는 이름을 써 내려간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붙여준 이름이다.
세상적으로는 “사가랴 1세, 사가랴 2세, 사가랴 3세...등등 ”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리이다.
사가랴라는 이름은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이름이다.
아버지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상속받고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가랴의 아들에게 평범하게 일반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아들로 세우기 위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사가랴 부부에게 찾아와서 임신하여 아들을 낳도록 역사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벳의 태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는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활짝 열어가시기 위하여 아들을 주시는 것이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원리로 주시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름이다.
하나님은 요한을 통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나라를 실현해 나가시기 위한 플랜을 꿈꾸고 계신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시려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이다.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의 이름을 아버지가, 부모가 지어주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작명가를 찾아가서 족보나 돌림자를 사용하면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감동 주시는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예기치 않은 이름을 감동으로 주실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성경적인 이름으로 지어준다고 하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으로 지어주는 경우도 많다.
성경 인물의 이름은 자녀들에게 많은 부담감을 안겨 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감동 주시는 이름으로 지어주는 것이 좋다.
옛날에는 동사무소에 출생 신고하러 가서 즉흥적으로 이름을 짖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호적에 올라간 이름이 다른 이름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한자도 본래 사용하는 한자가 아니라 전혀 생뚱맞은 한자가 호적에 올라간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름이든 그 이름에는 의미가 담겨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름에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영적인 세계를 펼쳐 나가시는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들의 미래와 장래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중하게 기도하면서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③ 닫혔던 입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65-66절에서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라고 기록한다.
사가랴가 서판에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주셨던 이름, “요한”이라는 이름을 써내려 가자, 지난 1년 동안 닫혔던 사가랴의 입이 풀리고 열리면서 말을 하게 된다.
사가랴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막혔던 입, 닫혔던 입도 열리는 은혜와 축복을 입게 된다.
마가복음7;32-35절에 보면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안수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데리고 무리들이 없는 곳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양손으로 그 사람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 사람의 혀에 손을 대시면서 “에바다”라고 외친다.
그러자 35절에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라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귀도 뚤리고, 입도 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베드로가 갇혔던 감옥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감옥문이 활짝 열린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동서남북이 꽉꽉 막혔을지라도 활짝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꽉꽉 막히고 굳게 닫혀버린 현실의 갖가지 문제들을 활짝 열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시길 소망한다.
사가랴 제사장의 입이 풀리고 말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족들, 동네 사람들은 크게 놀라워하고 두려워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놀라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서 펼쳐진 상황들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라워하면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이적같은 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권능과 권세에 적지 않게 놀라워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얼마든지 뭇사람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과 무서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놀라운 이적, 기적,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비신앙인들까지도 놀라워하고 두려워할 수 있는 일을 이루어 갈 수 있다.
성경 시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성경 시대에만 역사하시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 시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여전히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 시대에 놀랍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놀랍게 역사해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앙인들은 성경시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④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하시는 하나님.
요한의 출생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은 엔 게렘 마을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까지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요한의 출생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온 유대 지방을 넘어 사마리아를 걸쳐서 이스라엘 온 나라로 퍼져나가게 된다.
66절에서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엔 게렘 주변의 사람들과 소문을 듣게 된 사람은 “장차 요한이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사람이 될까?”라고 하면서 기대감을 가지는 것이다.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하신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어린 요한과 함께함으로 장차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뭇사람들에게 새롭게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기대감, 희망, 소망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저절로 퍼져나가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행전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오순절에 마가 다락방에 임재하신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보혈과 부활의 메시지는 삽시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땅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들이 세워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고,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며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L4 & B4.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은 주인이 지어주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야곱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믿음의 족장 야곱은 4여인들에게서 12남1녀를 낳았는데, 야곱이 직접 이름을 지어준 것은 막내 아들 베냐민밖에 없다.
다른 자식들은 레아와 라헬 두 여인이 지어준 이름이다.
야곱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왜 아버지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고 엄마들이 이름을 지어준 것일까?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을 사는 동안 야곱의 신분은 조카의 신분이요 사위의 신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20년 동안 종의 신분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야곱의 주인은 외삼촌 라반을 비롯하여 이종 사촌인 레아와 라헬이다.
레아와 라헬은 야곱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정집에서 주인의 신분이다.
어쩌면 야곱은 주인인 레아와 라헬가 언제든지 아기씨를 달라고 하면 주어야 하는 종의 신분에 불과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가 자신의 몸종에게 들어가라고 요구해도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거절해야 하는데도 종의 신분이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한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빌하와 실바에게 자신의 아기씨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야곱은 원하지 않아도 주인이 원하면 그대로 따라서 순종해야 하는 종의 신분으로 산 것이다.
레아는 야곱을 통해서 자식을 낳으면서 직접 자신의 의지를 따라서 이름을 지어준다.
라헬도 마찬가지이다.
라헬은 언니는 아주 쉽게 임신하여 자식을 낳는 반면에 자기 자신은 좀처럼 임신이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자신의 몸종을 통하여 자식을 낳으려고 한다.
그래서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을 때, 빌하의 주인이 라헬이기 때문에 빌하가 낳은 아들을 라헬이 낳은 것으로 인정하고 라헬이 아들의 이름을 지어준다.
라헬은 빌하를 통해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레아는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레아도 자신의 몸종인 실바를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한다.
실바는 레아의 몸종이었기 때문에 실바가 낳은 아들을 주인인 레아가 이름을 지어준다.
그래서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 사는 동안에 12남매를 낳았지만, 야곱이 직접 이름을 지어준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종살이, 처가살이를 끝내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는 종의 신분이었지만,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을 때는 주인의 신분으로 회복하게 된다.
라헬은 가나안 땅 에브랏에서 아들을 낳게 된다.
라헬은 밧단아람에서처럼 자기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베노니”라는 이름을 지어주려고 한다.
하지만 야곱은 더 이상 종의 신분이 아니라 주인의 신분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아내가 “베노니”라는 이름을 지어주려고 할 때, 베노니라고 부르지 않고 “베냐민”이란 이름으로 지어준다.
베냐민이 태어남으로써 야곱은 12아들의 아버지가 되고, 12아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고, 12문이 되고, 12진주가 되고 12기둥이 되고 12제자가 되는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이름을 누가 지어주느냐? 하는 것에 따라 주인이 달라진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은 본래 아브람(Abram)이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데라가 지어준 이름이다.
데라가 지어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열방의 아버지로 새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신다.
사라(Sarah)도 본래는 사래(Sarai)이었다.
사래라는 이름은 아버지 데라가 지어준 이름이다.
아버지 데라가 지어준 사래라는 이름에서 하나님은 열방의 어머니로 세우기 위하여 사라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신다.
아브라함, 사라라는 이름은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증표가 된다.
이삭(Isaac)이라는 이름은 본래부터 하나님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야곱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야굽(Jacob)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이삭이 지어준 이름이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이름을 얍복강에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신다.
요셉(Joseph)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의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Zaphenath-Paneah)”라는 애굽식 이름으로 바꾸어준다.
요셉의 이름이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것은 요셉의 주인은 애굽의 바로 황제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본래 이름보다는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주인이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신앙인들 중에는 본래 이름보다는 성경 인물이거나 성경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바꾸어 개명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성경에서 잘나간다고 하는 인물들의 이름으로 개명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저도 한 때는 야베스(Jabez)라는 이름이 너무 좋아서 한참 동안 SNS에서 야베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시절이 있다.
역대상4:9-10에서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라고 하신 말씀이 너무 좋아서 야베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고난 속에 살려고 하냐?”라는 감동을 주셨다.
그래서 “왜요?”라고 여쭈었더니 “너는 매일매일 고난, 고난, 고난”이라고 외치고 있지 않니? 그러니 너는 고난 속에서 사는 거야.“라고 감동을 주셨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고난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신 이후부터는 본래 아버지께서 지어준 ”한상원(韓相元)“이라는 이름이 너무너무 좋은 이름이구나 싶어서 본명을 사용한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행하면서 친족들, 동네 사람들에 의하여 ”사가랴“라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어야 한다고 할 때, 엘리사벳이나 사가랴 제사장이 하나님께서 지어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짓는 것은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어준 이름으로 살겠노라고 고백하는 신본주의이름이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John)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한의 삶에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서 이 땅에 태어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였을 때, 여우와 같은 헤롯 안디바에 의해서 마케루스 여름별장에서 순교자가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마리아가 낳는 예수(Jesus)라는 이름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주신 이름이다.
마태복음1:21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 그대로 살아간다.
베드로(Peter)도 본래는 시몬(Simon)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반석이라는 의미로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신다.
성경의 인물이 가진 이름에는 주종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한국인이 가진 이름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맺어진 이름이 아니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 돌림자를 사용하거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용하다고 하는 무당이나 작명가를 찾아가서 이름을 지어 주는 경우도 있다.
신앙인들 중에는 본래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는 유교문화, 샤머니즘의 문화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성경적인 의미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하는 가정에서 돌림자를 사용하더라도 가능하면 성경적인 의미를 담아서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다.
설령 내 이름이 전혀 성경적인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 아니더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온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한반도에 찾아오시고, 우리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께서 찾아오시고 이 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역사하셔서 나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구나. 라고 믿었으면 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조부모님이나 부모님께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믿고, 자신의 본명을 사랑하고 좋아했으면 좋겠다.
내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하는가? 어떻게 재해석하여 나의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 본명을 성경적으로 재해석하여 아름답고 고운 의미로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라고 믿으면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내 본명, 내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시고, 생명책에 내 이름을 기록해 주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시고, 열어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매일매일 찾아오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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