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어르신들을 존중해 드리면서 살아요 = 누가복음2;40-52(250202)

열려라 에바다 2025. 1. 31. 15:12
어르신들을 존중해 드리면서 살아요 = 누가복음2;40-52(250202)
 
한상원목사추천 1조회 4625.01.30 07:50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PW : 믿음             BIW : 존중히 여기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어르신들을 존중히 여기며 효도하는 것이다.


산수놀이


우리들은 많은 숫자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산수 놀이 해볼까요.
5-3=2  오해로 인한 말을 3번만 곱게 되새김질하며 생각해보면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가 됩니다.
2+2=4  이해하고 또 이해하면 사랑이 모락모락 싹터 오릅니다.
2+2+2=6  이해하고 이해하고 또 이해하면 우리의 육신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집니다.
2+4=6  이해하고 사랑하면 모든 것들이 유쾌해지고 즐거워지고 행복으로 채워집니다.
4+4=8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우리 인생의 팔자가 확 바뀌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사랑하고 평안해지고 유쾌해지고 우리 인생의 팔자가 확 바뀌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우리들이 들어 있으면 우리들은 정말 팔자 고치는 인생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팔자가 사나워서 되는 게 없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이 있는 인생은 팔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성공과 행복이 가득 채워진 인생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예배 드리면서 이해하고 사랑하고 평안해지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채워지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우리나라 사극에서 보면 양반댁의 어린 아들 딸들은 그 집에서 일하는 나이 많은 하인들, 몸종들에게 함부로 하대하는 모습을 본다.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예의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에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을 존경하지는 못할망정, 함부로 하대하고 욕지거리하고 폭행까지도 일삼는다.
그러면서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라고 자랑한다.
아무리 주종관계에서 노예, 하인, 종이라는 신분이라 할지라도 평생을 살아온 어르신들이지 않은가.
일제강점기에 나라와 주권을 빼앗겨서 식민지 통치를 당하던 한민족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독립운동하면서도 양반, 상인이라는 신분을 차별하면서 양반 독립운동가들과 상인, 중인, 천민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합석하는 일조차 없었다고 한다.
양반들은 양반들끼리, 상인은 상인들끼리 따로 모여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잃어버린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겠다고 독립운동하는데, 양반, 상인이라는 신분 차별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잘난 왕족들, 귀족들, 양반들 때문에 일제에게 나라와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나.
그러면 양반들이 빼앗긴 나라와 민족의 주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싸워야 하지 않나.
거기에 상인들, 중인들, 천민들이 합세해서 잃어버린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아와야겠다고 독립운동을 했다면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합석하여 예우해 주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그런데도 양반들이란 사람들이 상인들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독립운동한다고 하니까 상인들은 상인들끼리 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신분사회가 엄격하다 하더라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랑하는 유교문화가 얼마나 잘못된 사회였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서로 양반과 상인들이 겸상하지 않을 때, 유일하게 양반과 상인들의 연결고리가 되어서 함께 했던 사람이 바로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이었다.
이승만박사는 자유대한민국이 자유로운 신분을 가지고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고 기독교입국론이라는 책을 쓰고 그 기본에 근거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르신들에게 어떻게 하셨을까?
비록 어린 나이의 예수님이셨지만, 예수님께서 사셨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서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았으면 좋을까?


D4


 성령 안에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40절에서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라고 말씀하신다.
52절에서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특별히 발달장애, 성장장애를 가지지 않는 한, 자라고 성장하면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당연히 키도 성장하고, 마음과 지식과 성품도 자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걸치면서 학교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인간관계도 넓히고 지혜와 지식과 성품이 풍성한 어른으로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이다.


누구나 일반적인 과정에서 자라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자라고 성장하느냐 일반적으로 자라느냐 하는 차이점이다.
예수님께서도 일반적인 아이들이 자라듯이 똑같이 자라고 성장한다.
예수님도 마리아의 젖을 빨아 먹으면서 갓난아기의 시절을 보내고, 점점 자라고 성장하면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걸치면서 성인으로 성장해 가셨지만, 예수님에게는 독특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예수님이 자라고 성장하는 전 과정에서 역사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자랄 때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붙잡고 자라고 성장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하심 가운데 자라고 성장함으로 가족들, 주변 사람들, 동네 이웃 사람들, 더 나아가 하늘 아버지 앞에서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 자녀들도 다른 아이들처럼 자라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붙잡아주시고 인도해 주심을 받으면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서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느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자라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삶의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자녀들, 아이들도 성령의 강력한 임재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자라고 성장하여 가족들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교회와 학교에서 칭찬받고 인정받고 사랑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고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우리 자유대한민국과 한민족과 교회와 세계 선교의 일원으로 자라고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3차례에 걸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성소가 있는 성막 또는 성전으로 올라가서 제물을 올려드리면서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반드시 성전으로 올라가야만 하나님께 자신의 얼굴을 뵈어드리는 것이다.
성막, 성전이 아닌 다른 곳에 아무리 좋은 제물을 드리면서 절기를 지킨다고 장담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임재하신다는 지성소가 세워진 성막이나 성전으로 올라가서 제물을 올려드리면서 자신의 얼굴을 뵈어드려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3가지 절기는 농사철과 연결된다.
농사철에는 시간과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바쁜 시기이다.
하루만 시간을 허비해도 농사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져 있는 지역에는 하루 동안에 성전을 다녀올 수 있지만,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오랜 날을 걸어서 성전에 다녀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중간기 시대에는 산해드린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1 3차례 성전을 방문하도록 지정하였다.
동시에 먼 거리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1차례만 방문하도록 제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유월절에 방문하도록 권장하게 되었다.
유월절은 곡식을 추수하기 전에 지키는 절기이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다녀가더라도 충분히 곡식을 추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 절기를 맞아서 170만 명 이상의 수많은 인파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예수님의 가족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과 동생들도 나사렛에 거주하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져 있는 예루살렘 성을 방문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갈 때,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하여 올라가서 제사장들에게 인계시켜 주면 제사장들이 어린 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번제단에 뿌리면서 제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율례에 따라서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율법을 준행하면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서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면서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간 때는 예수님이 12살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12살 되던 해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해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12살 되었을 때의 사건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12살이었을 때는 성인식을 하기 전이다.
이스라엘의 남자로 태어나면 만 13살이 되었을 때 성인식을 거행한다.
성인식을 거행하면 어른들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 형님들의 세계, 삼촌들의 세계, 할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서 어른들에게서 장차 성인으로써의 삶을 배우고 익히면서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셉의 장자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요셉이 절기를 지키러 올라가면서 예수님을 대동하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록 어리지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이미 다 알고 있고, 잘 지키면서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읽고 배우고 지키면서 자라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학교 공부보다 더 앞세우고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 삶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고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먼저 읽고 배우면서 자라야 성령의 감동을 입고 은혜를 입어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해지고 학교 공부에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AD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망하면서 전 세계로 흩어졌지만, 유대인의 정서와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대인의 독특한 특성을 유지하다가 1948 514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던 요인은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읽고 배우고 실천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 지구촌에서 왕따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와 정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 요인이 바로 모세 5경인 토라와 구약성경을 붙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삶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끈질지게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바보 천치라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말씀을 생명처럼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읽고 배우고 지키면서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절기를 잘 지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자랐음을 신앙인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도 잘 지킨 절기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례, 규례, 법도, 계명, 말씀을 잘 지키면서 자라셨듯이 신앙인의 자녀들, 신앙인의 삶에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도록 하시는 하나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 나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 해에 다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된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당연히 함께 있어야 할 예수님이 없는 것이다.
12살밖에 안 된 아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혹시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가?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면서 아이들을 키우지 않던가.
아이를 잃어버리면 온 세상이 까맣게 보인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순간 아이를 잃어버리고 평생 그 아이를 찾아 헤메고 다니는 부모들도 얼마나 많은가.
평생 아이를 잃어버린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주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면서 저 아이만큼 자랐을까? 살아는 있는 것일까? 어디에서 밥은 먹고 살고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하면서 그야말로 죽지 못해서 겨우겨우 목숨 부지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와 뜻대로 임신하여 낳아서 키우는 아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12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예수님을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의 심정은 어떨까?
다른 부모들처럼 요셉과 마리아도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을 찾아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온다.
자신들이 머물렀던 집에도 가 보았을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면서 찾아다니면서 성전에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그 성전에 예수님께서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가족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전에 있었던 것일까?
예수님은 예전에도 부모와 함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었을텐데, 그때에는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아마도 하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성전에서 머물라고 감동을 주셨을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나중에 부모님이 찾아와서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도 50절에서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나셨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신 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언약의 메시야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12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아직 성인식도 거행하지 않은 어린아이, 아직까지는 부모의 보호와 양육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세상에서의 부모님이지만,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꿈꾸고 계시는 구원 계획에 따라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오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이번에는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 머물라고 감동을 주셨으리라 믿는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감동 주시는 그 음성에 순종하면서 성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으로 돌아가던 길에 하룻길을 갔는데,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사흘 동안 찾아다녔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3-4일 동안 혼자서 지내셨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3-4일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먹으면서 지내셨을까?
예수님은 3-4일 동안이 아니라 그 이상도 어디서든 지내실 수 있는 분이고,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육신이 상하지 않고 얼마든지 튼튼하게 지낼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서 홀로 지내면서 하늘 아버지와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리라 짐작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공급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고 성령 하나님과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지내셨으리라 짐작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입으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Coram Deo)하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전에 머물러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기도하면서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자라고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머물면서 성경을 읽고 배우면서 자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의 아이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랍비를 중심으로, 토라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유대인의 아이들은 회당에서 랍비를 통하여 토라를 배우고 소리내어 낭독하고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전에서 담론하게 하시는 하나님.


46-47절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고, 성전에 와서 봤더니 예수님께서 비록 12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과 담론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46-47절에서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 랍비들과 담론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처소이다.
성전 남쪽에 있는 훌다문을 지나면 정결탕이 있고, 정결탕을 지나면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처소가 있다.
솔로몬의 행각은 사람들이 주로 왕래하는 남쪽에 설치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행각에서 랍비들과 함께 토라를 가르치고 배우고 토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곳이 솔로몬의 행각이다.
솔로몬의 행각을 지나면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는 소렉(Soreg)이 있다.
이방인은 솔로몬의 행각까지는 들어갈 수 있지만, 솔로몬의 행각을 지나서 소렉을 통과하여 들어갈 수는 없다.
소렉에는 이방인이 이 문을 지나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한다.‘라는 경고문이 붙여져 있다.
성전을 방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솔로몬의 행각에서 쉬기도 하고, 랍비들이 가르치는 토라를 배우면서 교제하는 처소가 솔로몬의 행각이다.
오늘날 교회당으로 말하면 성도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거나 성경 공부할 수 있는 친교실이나 카페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베드로가 성령의 임재하심과 충만하심을 입고 성전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담대하게 선포할 때, 뭇 백성들이 형제들아, 그러면 어찌할꼬?”라고 하면서 3,0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소개하는 처소가 바로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처소이다.


12살밖에 되지 않은 예수님께서 랍비들이 가르치는 토라를 들으면서 질문하기도 하고, 랍비들이 질문할 때 대답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담론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12살밖에 안 된 예수님의 당돌함, 담대함, 당당함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워했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아직은 12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이지만, 천지 만물을 직접 설계하시고 창조하시고 주관하며 다스리고 있는 삼위 하나님 중에 한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거나 꿀리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갓난아기로 태어나서도 여전히 하나님이셨고, 점점 자라고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신 분이다.
예수님은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본래부터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잠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계시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비록 12살밖에 안 되었지만, 여전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랍비들을 비롯한 어른들과 담론하는 것이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12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담론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무언가를 잘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러워하는 것이다.
과연 저 녀석 천재구나. 재능꾼이구나. 뭘 해도 될 녀석이구나...‘ 하면서 놀라워하고 감탄스러워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녀들이 이렇게 칭찬받고 인정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많은 달란트와 재능을 주셔서 하나님께도, 이웃들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자녀로 자라고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믿음의 자녀로 자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며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51절에서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 동네로 돌아와서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동생들을 돌보면서 장자로서, 큰 형으로, 큰 오빠로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하던 일을 예수님께서 배우면서 자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3:55에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요셉을 목수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목수 일을 배웠을 것이다.
유대인의 정서에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원리 가운데 살아가는 민족이다.
아버지가 목수이면 아들도 목수라는 직업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목수라는 직업은 단순하게 나무만을 다르는 기능공이 아니다.
목수라는 직업은 나무뿐만 아니라 돌로 무언가를 만드는 석수의 일도 동시에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제로 나무와 돌로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집을 건축하는 일도 하면서 지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와서 절기를 지키면서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고 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께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에게도 깍듯하게 모시고 순종하고 효도하면서 사셨을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이 땅으로 보내시는 통로의 역할을 감당하는 부모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도록 육신의 부모님으로 세워주신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육신의 부모님이라는 신분으로 너무나 중요한 사람들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님을 지구촌으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셔도 육신의 부모님을 통하지 않으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지구촌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꾸며낸 각종 신화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분명한 탄생의 역사를 지닌 메시야로 지구촌에 구세주로 보내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님이라는 통로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요셉과 마리아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부모님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이라는 신분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없다면 역사적인 메시야 탄생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요셉과 마리아를 육신의 부모님으로 깍듯하게 모시면서 순종하고 효도하는 삶을 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부모로 세워주신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듯이, 믿음의 사람들, 신앙인들은 마땅히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육신의 부모님을 업신여기거나 조롱하거나 거역하면서 육신의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육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주변에 계시는 어르신들을 존중하며 순종하고 효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육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에게도 공손하게 순종하고 효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L4 & B4


우리 한민족은 무속신앙과 유교문화에 뿌리를 두고 형성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대대적으로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문화 속에서 어르신들을 먼저 모시고 우선시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어르신들을 먼저 해 드리고, 대우해 드리고, 존중해 드리면서 아름다운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이다.
우리나라는 위계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는 나라이다.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문화이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와 직장과 군대의 선후배 관계가 뚜렷한 나라이다.
연예계에서도 누가 먼저 데뷔했느냐에 따라서 선후배 관계가 뚜렷하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종종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어르신들의 권위, 부모님의 권위, 원로들의 권위가 끝 모를 정도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의 추세는 부모님의 권위, 어르신들의 권위가 추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부모님의 권위가 사라지니 어르신들의 권위도 동반 추락하고 말았다.
어르신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권위도 추락하고, 동반적으로 학교 선생님들의 권위도, 목사님과 장로님들과 권사님, 집사님에 대한 권위도 사라지고 없다.
사회구성원의 어르신들, 정치인들의 권위도 추락하고 말았다.
어르신들이 한 마디라도 꾸중하고 책망하려고 하면 묻지마 폭행을 당하는 세대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배고프고 힘들고 어려웠던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가정과 학교를 위해서 자신의 온 몸을 헌신하면서 오늘날의 위치로 올려놓은 원로들의 권위가 추락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무리 사회에서 어르신들, 원로들의 권위가 추락한다는 안타까운 소리가 들려온다 해도 신앙인들마저 사회적인 흐름에 편승하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교회에서마저, 가정에서마저 그런 추세가 나타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이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단단하게 박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십계명에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길이 장수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부모님을 업신여기거나 대적하거나 폭행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불행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의 가정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당연히 부모님들을 비롯한 어르신들, 원로들을 공경하고 잘 모시고 효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도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효도하셨는데,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부모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고 묻지마 폭행하면서 웃어르신들을 업신여긴다면 어떻게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인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의 말씀과 감동하심을 따라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님이신 요셉과 마리아를 잘 모시고 순종하면서 효도하신 것처럼 신앙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 속에 육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주변의 어르신들과 교회의 어르신들을 잘 모시고 존경하며 효도할 수 있는 신앙인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