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이끌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오직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자랑하며 사는 것이다.
대나무 모죽 이야기
대나무 중에 최고로 알아주는 ‘모죽’이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이 대나무는 씨를 뿌린 후 5년 동안 아무리 물을 주고 가꾸어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손가락만 한 죽순이 돋아납니다.
4월이 되면 이 아주 작은 죽순은 갑자기 하루에 80cm씩 쑥쑥 자라기 시작하여 30m까지 자라게 됩니다.
이 모죽이라는 대나무는 5년이란 세월 동안 자라지 않았을까요?
의문에 의문을 더한 학자들이 땅을 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대나무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 10리가 넘도록 땅속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5년 동안 숨죽인 듯 아래로 아래로 땅속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내실을 튼튼하게 다지다가, 5년 후에 당당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은 팔팔 끓기까지 변화 없이 계속 유지하다가 갑자기 팔팔 끓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물에는 임계점이 존재하여 여기에 도달하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 실패와 고생을 거듭해도 분명 성공할 날이 올 것이라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차곡차곡 내실을 다지는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지금의 이 시간이 미래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발전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제자리 걸음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5년 동안 땅 속 깊게 뿌리를 내리다가 급속히 자라는 모죽이라는 대나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100℃ 물이 끓기까지의 순간들이라 생각하면 어떨까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견디면 언젠가 모죽처럼 쑥쑥 자랄 때가 있습니다.
100℃의 물이 팔팔 끓을 때가 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없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축복받는 교회, 축복받는 가정, 축복받는 일터, 축복받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할 수 없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한주간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어떤 이는 인생을 마라톤 경주와 같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마라톤 경주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정확한 마라톤 경주는 42.195km를 달리는 경주이다.
본래는 42.195km를 달려야 하는 것인데, 너무 길고 힘들어서 42.195km의 절반 거리를 달리는 하프마라톤이 있고, 5km, 10km를 달리는 단거리 마라톤 경주도 있다.
인생을 마라톤 경주와 같다고 할 때, 마라톤 경주를 달리는 선수는 오직 목표점을 향하여 쉬임없이 한발자국씩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뛰고 또 뛰고 뛰면서 달려가는 것이다.
인생을 마라톤 경주와 같다고 한다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신앙인들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마라톤을 경주하는 선수는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목표점만을 마음에 그리면서 달리고 달리고 계속 달려 나가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계속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목표점을 향하여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은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았을까?
요한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인들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요한이 살았던 모습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
D4
①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히도록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에 모여서 요한이 전하는 말을 들고,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면서 의아한 느낌을 받는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 그리스도를 보내주신다고 언약하셨는데, 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숙덕거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 대망 사상에 꽉 붙들려서 살아가던 민족이다.
그런데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단지 유다 지파 다윗 왕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올리브산을 통해서 오신다고 예언하셨기 때문에 그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반드시 올리브산을 통해서 오신다고 믿고 있다.
메시야가 올리브산을 통해서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면 가장 먼저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서 올리브산에는 사람들로 북적북적거린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리브산을 통해서 오신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올리브산에는 죽었던 사람들이 부활하여 가장 먼저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서 무덤들로 넘쳐난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올리브산을 가보면 온통 무덤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만 해도 자칭 메시야라고 떠벌리면서 무리들을 끌고 다니는 이들이 대략 삼사십 명이 올리브산을 중심으로 떼 지어 다녔다고 한다.
이런 관계로 요한도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니면서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떠벌리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들을 지어서 “혹시 저 요한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메시야,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닐까?”라고 숙덕거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자신에 대하여 숙덕거리는 모습을 본 요한은, 무리들을 향하여 16-17절에서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선포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바로 그 메시야라고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가 바로 그 메시야라고 선포하면서 이미 메시야가 이스라엘 땅에 와 계신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람은 어느 누가 특출하게 보이면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요한이 강력하게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면서 무리들은 “저 요한이라는 사람이 메시야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요한은 자기는 그 메시야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자기 자신은 어느 정도의 수준임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이 가진 수준보다 높게 판단하면 교만의 늪에 빠지는 것이고, 자기가 가진 수준보다 낮추게 되면 자학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게 자기 자신의 올바른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의 정체성, 자존감을 올바르게 깨달을 때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의 한계점을 정확하게 깨달음으로서 겸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요한도 무리들이 자신을 향하여 메시야가 아니냐? 라고 하면서 숙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든지 교만의 늪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요한은 자기 자신의 수준, 자기 자신의 한계점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교만의 늪에도, 자학의 늪에도 빠지지 않고 정도(正道)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요한에게 맡겨진 사역은 요한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에게 맡겨진 사역은 철저하게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높이고 전하고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요한이 감당해야 할 사역은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쳐주는 나침판, 등대, 그림자 역할이다.
요한이 나침판, 등대, 그림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실체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나침판이나 등대나 그림자는 말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연극이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철저하게 주연을 돗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주연을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조연이나 엑스트라에게 맡겨진 배역을 감당하는 것처럼,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려나가시는 구원이라는 커다란 드라마에 주연배우가 아니라 조연배우이다.
요한은 철저하게 구원의 주연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돗보이도록 하는 배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② 메시야의 정체성을 밝혀주시는 하나님.
그러면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메시야는 어떤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말씀하신다.
ⓐ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물을 가지고 겨우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줄 수준밖에 안 되지만, 자신의 뒤에 오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물로 세례를 줄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직접 하늘의 권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지상에 속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뒤에 오시는 메시야는 하늘에 속하신 분으로 하늘의 신령한 권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분이라고 소개한다.
요한 자신은 땅에 속한 사람이요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은 메시야에 비하면 종, 하인, 노예보다도 더 미천한 존재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은 높고 높은 하늘에 속한 분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감히 그 분의 센달 끈도 매어 드릴 수 없는 대단하고 위대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요한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감히 눈뜨고 쳐다볼 수도 없는 위대하신 분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 분에게 노예도 하인도 종으로도 살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한 분이라고 소개한다.
자기 자신은 그분에게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높으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메시야는 하나님이시고, 자기 자신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소개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물이라는 은혜의 수단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지만,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 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세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
메시야는 하늘에 속한 분이기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모든 죄악들을 해결해 주시고 사해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예수님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용서하심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 심판의 권세와 권한을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의 문제조차도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뒤에 오시는 메시야, 그분은 모든 문제, Everything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권세와 권한까지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예수님은 죄악을 심판하여 빛과 어둠으로 갈라놓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죄악을 심판하여 구원과 저주로 갈라놓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죄악을 심판하여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갈라놓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방향으로 갈라놓으시는 것처럼 심판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죄악을 심판하여 양의 방향으로, 염소의 방향으로 갈라놓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죄악을 심판하여 오른쪽으로, 양의 방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영원한 천국, 영원한 하나님 나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죄악을 심판하여 왼쪽으로, 염소의 방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의 길로, 지옥의 길로, 죽음의 길로 이끌어가는 분이다.
신앙인들은 그림자, 등대, 나침판을 쫓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실체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꽉 붙들고 오직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③ 순교자의 면류관을 씌어주시는 하나님.
19-20절에서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문에서 기록한 분봉 왕 헤롯은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이다.
안디바에게는 헤롯 빌립2(Herod Philip)이라는 동생이 있는데, 빌립의 아내가 헤로디아(Herodias)이다.
빌립과 헤로디아 사이에 태어난 딸이 살로메(Salome)이다.
안디바는 빌립과 헤로디아를 강제로 이혼시켜서 동생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를 자기 부인으로 삼아버린다.
이런 모습을 알게 된 요한은 헤롯 안디바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하면서 책망한다.
이에 화가 난 헤롯은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했지만,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두려워서 죽이지 못하고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
헤롯 안디바가 요한을 감옥에 가둔 곳이 요한의 순교터로 알려진 마케루스(Machaerus)라는 요새이다.
마케루스는 지금은 요르단에 있는 광야 지역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에 속한 지역이었다.
마케루스는 해발 700m의 산꼭대기에 요새가 만들어졌는데, 하스모니안(Hasmonean) 왕 왕조 때에 알렉산더 아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27년간)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헤롯 왕이 재건하면서 헤롯 안디바의 별장, 여름 궁전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케루스에 있는 감옥에 요한이 갇혀 있는 것이다.
별장, 여름 궁전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연회장이 있다.
헤롯 안디바의 생일을 맞아서 대소신료들이 모여서 큰 연회를 열게 된다.
큰 연회장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게 된다.
살로메가 춤을 추는 모습에 헤롯은 너무나 흡족해하면서 기뻐한다.
헤롯은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라고 맹세한다.
그러자 살로메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달려가서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라고 한다.
헤로디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라고 한다.
살로메는 왕에게 나가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요청한다.
헤롯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요한을 죽이면 백성들이 크게 동요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맹세까지 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한다.
헤롯은 호위무사에게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면서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이는 참사가 일어난다.
요한은 이렇게 헤롯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순교자의 피를 뿌리도록 하면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순교자의 면류관을 영광중에 씌어주시는 것이다.
L4 & B4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은 철저하게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을 살다 간 선지자이다.
요한은 본래 사가랴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버지를 따라서 제사장으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빈 들에서 홀로 지내면서 하늘 아버지와 깊고 깊은 영감을 나누면서 철저하게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요한은 그야말로 죽으나 사나 예수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다.
헤롯 안디바가 동생 빌립 부부를 억지로 이혼시키면서 동생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리는 죄악을 저지른다.
안디바가 저지른 죄악은 의로운 요한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죄악이었다.
요한은 가차없이 안디바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책망한다.
이로 인하여 요한은 절대권력자의 압제에 의하여 마케루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안디바의 생일날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 요한은 안디바의 죄를 지적하면서 책망했을 때, 자기 자신에게 처참한 불익이 닥쳐올 것을 몰랐을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몰아닥칠 위기 때문에 속으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책망, 욕,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절대로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는다.
입 밖에서는 최대한 아부하고 그에게서 좋은 점수 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안달한다.
민주당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저지른 죄악을 왜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모를까?
이미 온 세상에 다 알려진 사실인데, 민주당 국회의원들만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가진 당대표라는 권력 앞에 굴복해야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아부하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막상 공천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민주당을 탈당하고 온갖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었다.
요한도 인간적으로 자신이 살려고 했다면 헤롯 안디바의 죄악을 굳이 들추어내어서 비난하고 책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직장에서 짤리지 않으려고, 점수 깍이지 않으려고, 어떻게 하든 살아남으려고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요한도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사건을 보면서 그것은 그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지 않나. 하면서 얼마든지 묻어들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요한은 안디바의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랬을 때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미움을 받게 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급기야는 처참하게 목이 잘려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요한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빈 들에서 온갖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누구 못지 않게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요한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감옥에 갇힐 것이고, 무자비한 헤롯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헤롯의 손에 의해서 죽을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헤롯 안디바의 죄악, 헤로디아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책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강력하게 외치던 사나이 중에 사나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었던 요한은 그렇게 순교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 신앙인들은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진실을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절개를 가지고 신앙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자신에게도, 가족들 앞에서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그 일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이익이 휘몰아치더라도 신앙인은 신앙인의 삶을, 올곧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이란 확실한 팩트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삶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로마서14:8에서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의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모든 것들을 헌신짝처럼 버리면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들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인간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아끼는 자신의 생명도, 직업도, 명예도, 수치도, 권세도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삶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교회를 위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시고 걸어가신 십자가 보혈과 복음만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내어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10:29-30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가장 먼저 주님만을 위하여 살면 하늘 아버지께서 100배의 복과 영생의 복으로 역사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3;2)”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 높이고, 증거하면서 뭇 백성들에게 오직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르도록 촉구했던 선지자이다.
우리 신앙인들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증거하고 높이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 시기를 알라 ! (0) | 2025.02.20 |
---|---|
스크랩 십계명을 통해 보는 사랑의 영역(출 20:1-17) - 사랑 (0) | 2025.02.20 |
스크랩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눅6:20-26) (0) | 2025.02.15 |
여호와를 멀리하는 자와 가까이 하는 자 / 창 4 : 16-26 (0) | 2025.02.15 |
에덴 동산으로 복귀하는 길(창 3:14-24) (0) | 2025.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