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6:8-10)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열려라 에바다 2025. 4. 22. 09:56
(시66:8-10)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궁극이추천 1조회 4325.04.20 08:58댓글 0
 
66편 8절-10절: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소리로 들리게 할찌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8절: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소리로 들리게 할찌어다.’ 이 말이 이웃사람이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찬송소리를 들려주라는 말은 아니다. ‘송축’은 체험하고 경험하고 깨닫지 못하면 못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송축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만민에게 송축소리로 들리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상생활 속에서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며 진행하심을 만민들에게 확실하게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라는 거다.


9절: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귀중히 여기셔서 우리가 신앙 면에 한 치라도 실족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매사에 간섭을 하시는데, 왜 일일이 간섭을 하시는 거냐?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제 일의 대상자요 제 일의 목적물이기 때문이다. 즉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의 피의 구속으로 당신의 자녀로 만드셨다. 당신의 자녀를 일일이 간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속사람, 즉 영인의 성장과 영능의 실력을 위해 일일이 간섭을 하신다. 즉 지혜지식적으로나, 신적인 도덕성적으로나, 신적인 능력성적으로 하나님처럼 온전한 성품을 입히시기 위해 간섭을 하신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영광중에 행복의 극치로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간섭을 하시는 거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이유로 나에게 일일이 간섭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껴봤느냐? ‘아, 이건 하나님의 간섭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봤느냐? 한 번도 못 느꼈느냐? 전혀 못 느끼며 사느냐? 그러면 집안의 부모형제의 간섭을 느낀 적은 있느냐? 느끼며 산다면 왜 자기에게 간섭은 하는 것 같으냐? 사랑하기 때문이냐, 미워하기 때문이냐? 미워서 그러는 거라고 대답을 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간섭은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하느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하느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한다.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해서 간섭을 하는 거고, 자기가 잘못을 해도 간섭을 한다. 돼지를 키우는 사람이 돼지에게 간섭을 하는데, 이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다. 어쨌든 간섭을 하는 것은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섭하시는 게 좋으냐, 간섭을 안 하시는 게 좋으냐? 간섭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도 우리를 간섭하시는 거다. 성경 속에는 우리가 바로 사는 길, 손해 보지 않는 길이 다 들어있다. 성경을 통해 이것을 모르면 속게 된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은 사람은 반드시 남을 속이게 되어있다. 이게 이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도 속은 줄을 모른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사람은 참 사람을 모르는 거다. 영육 구별을 못하면 다 속아 넘어간다.


마귀는 왜 눈에 안 보이는 거냐? 마귀는 영물인데, 믿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에서 속는 것이 있음을 알라고 영물인 마귀를 만들어 놓은 거다. 그런데 보이는 사람에게도 속아 넘어간다면 이 사람은 안 보이는 마귀에게 속는 것은 당연한 거다. 성경은 이걸 밝혀주고 있다.


사람은 무엇에든 속으면 자기 것은 다 날아가고 손해만 본다. 육적으로 속으면 자기의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기 몸도 망가지고, 육적인 생명도 단축이 된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영의 눈이 어두우면 마귀에게, 거짓 종들에게 다 속아 넘어간다. 이러면 영적으로 깨닫는 실력은 없어지고, 이런 교회는 충성봉사를 강조하고 헌금강조를 하게 되는데, 이런 것을 아무리 잘 해도 신앙성장에 효력이 없다. 이건 영의 눈으로 보면 속고 산 거고 강도를 당한 거다. 이런 사람에게는 몰랐을 때는 알게 하느라고 여러 가지 작은 사건을 보내서 ‘이래도 모르겠느냐?’ 라고 하지만 알게 한 후에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살면 큰 몽둥이가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간섭하시는 것은 실족을 원하지 않고 당신처럼 영광자가 되길 원해서다.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하나라도 실족이 되어서 넘어졌다면 그것은 두고두고 후회거리가 된다. 왜냐하면 한 번 실족하는 것에는 엄청난 손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금방 넘어졌다가 일어날지라도 후회거리지만 넘어졌다가 오랜 후에 일어난다면 그 동안은 전부가 사망으로 내려간 거다.


음식을 한 번 잘 못 먹어서 설사를 하게 되면 설사를 하는 동안은 몸 속의 물이 계속 빠져나간다. 이러면 기운도 빠지고, 일도 못하고, 병원에 다니며 돈도 갖다 줘야 한다. 또한 대학입시에서 열 문제를 틀린 것도 아니고 한 문제만 틀리면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이 한 문제를 틀림으로 낙방이 될 수도 있다. 내가 한 문제를 알고 모르고에 따라 자기가 수십 만 명을 앞설 수도 있고, 수십만 명보다 뒷 설 수도 있는 거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번이라도 실족함을 원하지 않는 거다.


그러면 실족이 뭐냐? 실족이란, 일반적인 면에서는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다. 발을 헛디뎌서 웅덩이를 밟는 거다. 발에 무엇이 걸려서 넘어지는 거다. 악한 자들에게 꾀임을 당해서 자기 일생을 망치는 거다. 이런 게 다 실족이다. 영적 신앙사상으로 말을 하면 영적 생명 길로 가다가 넓은 길로 가버리는 것이 실족이다. 이 실족은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 넘어진 거다. 하나님의 말씀의 도의 정로를 떠난 게 실족이다. 영으로 가다가 육으로 가는 게 실족이다. 좁은 길 생명 길로 가다가 세상 넓은 길로 가는 것은 사망 길이기 때문에 실족이다. 자타의 이룰구원 목적으로 살다가 세상 누림성으로 살면 실족이다. 세상살이에 대해 늘 근심 걱정으로 사는 게 실족이다. 진리로 가다가 종교적인 세상으로, 종교적인 사역주의 업적주의로 나가는 것이 신앙 면의 실족이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거의가 실족이 되었다. 거짓 종이란 실족이 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들에게 실족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정로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 길로만 가면 실족지 않는다. 성도들에게 선지사도들을 주었고, 진리생명의 말씀을 주었고,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럼에도 안 믿는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세상과 세상 것을 위해 주님을 믿는다면 이것이 실족인데 이 길을 가는 교인들은 실족인 줄을 모르고 있다.


거짓 목사들은 교인들을 세상을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성경을 가지고 주님의 신부인 교회에게 세상바람을 불어넣어서 세상정신으로 간음을 하게 하고 혼음을 하게 한다. 진리이치의 말씀으로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정신 사상과 인격 면에서 세상바람이 안 들어있다. 정신 면에 세상바람이 든 사람을 믿었다가는 큰일 난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방인처럼 사는 것도 원치 않으시고, 하나의 기독교 종교인으로 사는 것도 원치 않으시고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은 참 신앙인을 원하시기 때문에 이를 위해 성도를 징계도 하시고, 시험을 주기도 하시는 거다. 절대 정확한 정로로만 가기를 원하신다. 믿는 내가 정로로만 간다면 신앙정신 사상 면에 손해가 없다. 상처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한 번이라도 마음과 정신 면에 상처를 받으면 미쳐버린다. 그걸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미쳐버린다.


10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마: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세 가지의 시험은 인간이 먹고 사는 의식주 문제, 기독교 종교운동에 관한 문제, 세상부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 즉 사람의 존귀에 관한 시험인데,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격어야 할 종합적인 시험이다. 이 세상에는 늘 이런 시험이 있다. 사람문제에 있어서 부모형제, 자녀, 이웃문제, 친구문제, 원수문제, 도덕성 문제 등등의 시험이 많다. 그리고 사건문제에 있어서 물질문제, 사람문제, 목숨문제, 즉 ‘무엇보다 무엇을 우선적으로 여기느냐?’ 하는 등의 시험이 있다. 그 다음에 물질문제에 있어서 ‘무엇보다 무엇을 더 귀중히 여기느냐?’ 하는 시험이 있다.


이런 시험에 있어서 시험의 의미가 어떤 면을 더 알게 하려는 시험이 있는가 하면, 부족한 점을 더 채우게 하기 위한 시험 등등이 부분 부분마다에 들어있다. 그리고 진리지식적인 면에서 어떤 면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면을 알게 해 주시려는 시험이 있는가 하면, 참지 못하는 면을 잘 견딜 수 있게 해 주려는 시험도 있고, 세상의 찌꺼기를 빼내려는 시험도 있고, 날카롭게 날을 세워주려는 시험도 있다. 올려주기 위한 시험이 있는가 하면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 있다.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많고 그곳에서 필요한 사람은 몇 명이 안 될 때 부득이 시험을 치게 해서 떨어뜨리려는 시험이 있는데, 하나님의 시험에도 이런 게 있다.


마귀는 무조건 떨어뜨리려고 시험을 한다. 말하자면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은 그 어떤 방편이건 다 성도들을 진리로 명철한 자, 영능의 실력자로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기 위해 시험을 하시는 거다.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사람을 단련을 시키려면 불속에 넣어야 한다. 고통 속에 넣어야 한다. 많은 사람 가운데 집어넣어야 한다. 특별히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 속에 집어넣어야 하고, 많은 사람 속에 있다면 그 가운데서 혼자 있을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바로 만들려면 뜨거운 불속에 넣어야 찌꺼기가 제거가 된다. 찌꺼기가 제거되려면 불 맛을 봐야 한다. 찌꺼기가 제거되어야 순수한 사람이 된다. 큰 고통을 겪었음에도 이 사람 속에 찌꺼기가 제거되지 않으면 연단의 효과가 없다.


불에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들기면 표면에 붙은 찌꺼기는 다 떨어진다. 그러나 속에 든 찌꺼기는 그대로 있을 수 있다. 이 찌꺼기까지 빼내려면 그 쇠를 녹여서 위로 떠오르는 찌꺼기를 다 제거한 후에 만들고자 하는 모양의 틀에 부으면 원하는 모양이 나온다. 이게 일반계시로 보는 신앙의 이치다. 낫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날을 숫돌로 날카롭게 갈면 이 낫은 추수가 잘 된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속화된 교인들은 연단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편히 살다가 천국에 가서도 제일 높고 영광스런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쇠로 좋은 연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풀무불과 망치의 연단이 필요한데, 연단성을 보면 칼날을 날카롭고 예리하게 세우기 위한 연단이 있듯이 사람을 예리한 구별력을 가지게 하는 연단성이 있고, 쇠의 찌꺼기를 빼내기 위한 연단이 있듯이 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에게 여러 가지 압력을 가하는 연단성이 있다. 날카롭고 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연단을 할 때 이 연단을 받는 자신은 먼저 지식전환이 바로 되어야 한다. 진리지식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연단을 받을지라도 예리한 구별력이 있을 수 없게 된다. 무디다.


사람의 머리를 무디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날마다 노는 데 정신을 팔게 하면 된다. 이러면 노는 데는 신이 나지만 정신 면은 무뎌진다. 그 다음에 육적인 활동을 무디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먹는 걸 잔뜩 주고 일은 하지 말라고 하고, 잠이 오면 잠을 자라고 하면 된다. 신앙 면에서도 예수를 육덩이로 믿으면 같은 결과가 온다. 결과는 죽는 거다. 이게 이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