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선한 이웃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눅10:25-37)

열려라 에바다 2025. 8. 2. 12:02
선한 이웃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눅10:25-37)
 
권호만barnabak추천 0조회 12525.08.01 12:20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선한 이웃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
누가복음 10 25~37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유명하기에 무슨 내용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하기도전에 오늘 무슨 말씀을 하실지 대충 감을 잡은 분들이 많으시라고 봅니다.
문제는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했던 율법학자도 그렇고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도 그렇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지 못한다는 데에 큰 약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율법교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보게 되는데요, 이 대화는 단순한 지식의 논쟁이 아닙니다.
이 대화는 율법을 꿰뚫는 예수님의 통찰, 그리고 인간 마음의 중심을 겨누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전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교사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영생에 대한 종교적인 질문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 마음에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 절박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교만한 시도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을 잘 아는 율법교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또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자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질문을 합니다.
정말 내 이웃을 몰라서 묻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 알면서도 이웃을 외면하기 위해 물을 때가 많습니다.
내 가까이 있는 자들만이 이웃으로 생각하며 그 외의 사람을 일부러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내 이웃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웃의 개념을 넓게 열지 않으면 우리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혈육을 나눈 형제자매 부모만이 이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을 형제자매 부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나와 친분관계가 있는 자들로만 한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더 넓게 더 멀리 확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이웃은 누구며 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매우 험한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m의 높이에 있는 도시인 반면, 여리고는 수면보다 낮은 -250m 밑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이 두 도시를 연결하는 길은 35Km나 되는 먼 거리일 뿐 아니라,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 있고, 터널처럼 좁게 꾸불꾸불 급경사를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이 길을 통해 여리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각종 과일 등의 농산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팔고 돌아가는데,
그런 상인들을 노린 강도들이 낮 시간에도 자주 출몰하는 매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긴 후,
죽도록 두들겨 맞아 죽기 직전 상태에 빠져 길가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람은 특정한 인물이 아닙니다.
민족도 계급도 성별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무명의 사람입니다. 왜일까요?
그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인 반면에 여리고는 세속적인 도시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볼 때, 그는 하나님을 떠나 세속으로 내려가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보려는 그 인생은 결국 강도를 만나고, 벗김을 당하고,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은 우리 인생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강도당한 자와 같습니다.
죄는 우리를 약탈하고, 상처 입히고, 고립시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적으로 강도 만난 자들입니다.
교만과 이기심이라는 강도에게 얻어맞고, 욕망이라는 강도에게 옷이 벗겨지고, 결국 삶의 길가에 쓰러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는 누군가의 자비와 긍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죽게 됩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강도 만난 자 옆을 지나가는 자가 있었는데 먼저 지나간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기 위해 올라가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시체를 만지면 제사 드리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종교인이었지만 자비는 없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 다음은 제사장을 도우며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강도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어쩌면 그의 마음속에도 내가 관여하면 의무가 생기고, 일이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이 비유는 예수님이 꾸며내신 이야기가 아니고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사료됩니다.
만약 꾸며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큰 해코지를 당했을 것입니다.
없는 일을 꾸며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종교를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멀어진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귀한 직분을 맡았지만 말씀에는 충실하지 못한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보는 사람이 없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외면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척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래 전에 뉴욕에서 있었던 "128인 사건"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길에서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여인은 소리를 질렀지만,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닫았습니다.
마지막 비명 소리가 들려 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을 껐다고 합니다.
그 여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경찰이 증인을 찾기 위해 조사해 보니, 여인의 비명 소리를 들은 사람이 128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28명이나 되는 사람이 나만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못 본체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무관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신앙인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교회 안에도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종교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찬양, 예배가 뜨겁다고 해도 상처 입은 영혼 앞에서 차갑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율법교사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등장한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원수였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멸시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며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소외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가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꾸며낸 이야기라면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켜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면 엄청난 분노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기에 창피하고 모욕적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이 모습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사랑입니다.
사랑은 다가서는 용기이며 자기희생이요 섬김입니다.
어떤 남자가 오랫동안 마음에 두던 한 여인에게 용기를 내어 프로포즈를 하자,
앞으로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제 방 창문 앞에서 꽃을 들고 찾아오신다면 당신 사랑의 진실함을 믿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이 여인의 방 창문 앞에는 매일 밤 한 남자가 꽃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그 여인의 방 창문 앞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꽃을 들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습니다.
100일을 하루 앞 둔 99일째 저녁, 창문 밖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감동받은 그 여인이 마침내 그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비에 흠뻑 젖은 남자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는 알바 생인데요.”
여러분, 사랑을 거짓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뒤따라야지 말로만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거짓 없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용기이고, 상처를 싸매는 수고이며, 내 것을 나누는 헌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가진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했습니다.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들였고 짐승에 태워 자신의 편안함도 포기했습니다.
여관비까지 부담하며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율법의 정신을 완전히 실천한 자였고 이웃 사랑의 진정한 모델이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 죄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러 낮고 천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고, 자신의 피와 살을 주시며, 우리를 여관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불한 여관비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신 그분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마지막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도덕적인 권유가 아니라 제자를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그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부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강도 만난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 상처 입은 자들, 낙심한 자들, 외로운 자들, 삶의 길가에 쓰러진 자들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다가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웃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는 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웃은 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은혜로 선택되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네 이웃은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사역이 많든 적든, 신앙의 연수가 길든 짧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이웃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겠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사람은 그렇게 큰 부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그만 사업을 하면서 그럭저럭 가계를 꾸려가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그럼에도 그는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었고 그를 살렸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기름, 있는 포도주, 있는 돈을 가지고 상처를 씻고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들어 도와 준 것입니다.
우리가 큰 부자가 되어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빵조각을 나누어 먹고 내가 입는 옷, 내게 있는 것으로 이웃을 도와주고 구제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월 만원, 2만원을 가지고 기아에 굶주리고 있는 자들의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붙잡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 시대는 고독한 시대입니다.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신앙도 점점 개인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혼자 걷는 자가 아니라 길가에 쓰러진 자를 일으켜 함께 걷는 자입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그것이 제자도이고 그것이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핑계할 수 있었지만 죽어가는 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사마리아인의 심정을 가지고 아니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강도만난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시간을 내려놓고, 자원을 나누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