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9:29-36)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

열려라 에바다 2025. 10. 23. 16:00
(시69:29-36)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
 
궁극이추천 1조회 7725.10.19 09:17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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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편 29절-36절: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찌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29절: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마음에 고통이 오고 슬퍼지고, 부요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으니 마음이 기쁘다. 그런데 다윗은 가난하고 슬프다고 한다. 그러면 가난하고 슬픈 사람이 어찌 다윗 한 사람뿐이겠느냐? 세상에는 가난하고 슬픈 사람이 많다. 그러나 다윗이 가난을 느끼고 슬퍼하는 것은 선악과 따먹은 이방 세상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다윗은 어떤 가난으로 슬퍼하는 거냐? 1. “나는 육신생활이 너무 가난해서 슬픕니다.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주셔서 악한 자들이 볼 때 ‘저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세상축복을 많이 받았다’ 라고 하면서 세상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되게 해 주시고, 나로 자랑스러워지게 만들어 주소서” 이런 기도를 했겠느냐? 2. ‘나는 영적인 면에서 말씀을 깨닫고 아는 것이 없어서 이 면에 너무나도 가난해서 슬픕니다. 깨달음이 없어서 악인들에게 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슬픕니다. 그러니 진리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모르는 낮은 차원에 두지 마시고 높은 차원으로 올려주소서’ 라고 기도를 했겠느냐? 다윗의 기도는 어느 기도겠느냐? 두 번째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의 기도는 어느 거냐? 기도가 잘못됐으면 고쳐라. 이방인과 같은 기도는 소용이 없다.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사람마다 자기가 높아지길 원한다. 우리 기독자들도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오직 주님의 도움으로 높아져야 한다. 다윗이 지금 이런 기도를 하는 거다. 주의 구원으로 자기를 높여달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주의 구원으로 높아지길 원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높아지길 원한다.


일반세상에서 사람이 높아지는 것은 일반적인 지혜지식적으로 높아지고, 도덕적으로 높아지고, 능력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일반사람들이 이렇게 높아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바로 된 거다. 뇌물을 써서 올라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죄이고,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죄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신적인 지혜지식성으로 높아지고, 신적인 도덕성으로 높아지고, 신적인 능력성으로 높아져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높아지는 것은 그 효력이 이 세상에서 뿐이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것은 신령천국에까지 효력성을 가진다.


믿는 우리가 공부를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가지고 하면 이 세상에서도 높아지고 영원히 높아진다. 인격적 질적 차원에서 사람이 높아진다. 높아지는 이것을 월급을 많이 타는 것이라고 붙일 필요는 없다. 이런 걸 붙이게 되면 해석이 달라진다. 자기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높아지길 원한다면 지혜지식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능력적으로 그 면에 대한 가난성을 느끼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이방세상은 돈으로만 높아지려고 한다. 버리고 갈 것으로 높아지려고 한다. 그러나 돈이 자기를 높일지라도 이 돈은 언젠가는 자기를 떠나간다. 그러나 믿는 우리의 높아짐은 영원히 높아짐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높아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성경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나가면서 신적인 도덕성으로, 지혜지식성으로, 능력성으로 높아지기를 신경을 써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면에 신경을 안 쓰고, 고칠 생각도 안 하고, 밥 먹고 자고 일하고, 교회에 다니고, 설교 몇 마디 듣고 끝내는 식으로 살면 안 된다.


사회에서 일을 해도 높아져야 한다. 학생들도 공부를 하면 공부실력이 높아져야 한다.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커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재산이야 있기도 하고 없기고 하는 거지만 가능한 한 재산도 까먹지 말고 늘려나가야 하고, 혹 재산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인격 자체가 커진다면, 높아진다면 옳은 거다. 그런데 자기가 커지지도 않고, 재산도 다 날아가고, 기술도 없다면 이게 뭐냐? 교회를 수십 년 다녔어도 아는 것도 없고, 하는 일도 없다면 이게 뭐냐? 무슨 가치가 있느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사는 것은 살아갈수록 자기 나이를 까먹는 것과 같은 거다.


성경에 ‘육신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했으니 믿는 사람들은 이게 있어야 한다. 그 힘으로 자기가 살고, 그 힘으로 주님을 믿고, 그 힘으로 가르치고, 그 힘으로 봉사를 하며 영원히 높아짐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이 아무 데도 필요가 없다. 사회에서도 필요가 없고, 교회에서도 필요가 없고, 집에서도 필요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사람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30절-31절: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주의 구원을 받은 자는 주님만을 찬송한다.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세상을 찬송하게 된다. 누구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그 사람을 찬송하게 된다.


주의 구원을 받고 주님을 찬송하는 성도는 주의 구원의 광대하심을 알고 있다. 무엇이 광대하시냐? 무엇이 넓고 큰 것이냐? 한 사람 한 사람마다에게 하시는 주님의 구원역사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거치면서 신령세계에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 성도가 잠깐 동안 세상을 거쳐 갈 때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의 모든 존재와 사건과 환경이, 그리고 사계절과 온 우주만물이 이 성도의 구원을 위해 다 동원이 된다. 동시적으로 멀리서도 가까이에서도 동원이 되고, 시간적으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가지고 오셔서 깨닫게도 하신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통치 섭리하시고 지배하심의 그 지력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이치적으로 세밀한지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광대하시다.


성도를 위한 주님의 구역역사는 인간 자기 몸 속에서 속속들이 진행이 되고, 몸 밖으로 벗어나면 이웃, 사회, 세계적으로 온 우주가 자기를 중심하여 진행이 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 이치라도 틀림이 없이, 한 법칙이라도 틀림이 없이 역사를 하신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얼마나 광대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바라시느냐? 황소를 바라시겠느냐? 염소를 바라시겠느냐? 어떤 제물을 바라시느냐?


무엇을 드림보다 뭐가 기쁘다?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것이 기쁘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교체시킬 때마다 부지런히 진리 자체화 된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져서 신령세계를 영원히 마음 것 누릴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다. 이를 따라 주님으로 인해 영원히 높아진 자는 오직 주님만을 찬송한다. 주님의 집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직책이나 직분을 맡아서 높아졌으면 주님을 찬송하게 되어있다. 자기가 자기로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오직 진리로써, 오직 하나님의 성품으로써 높아져야 한다. 궁극교회에서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궁극적인 신앙사상을 가지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가정에서 봉사를 하고, 궁극적인 진리신앙의 노선에서 이 사상이 자기의 기업이 되고, 이 기업이 이 세상에서 커지고, 자타를 키울 줄 알고, 그리고 이 신앙실력이 주님 앞에 질적으로 영원히 신령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목사는 교회를 직업 시 하라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신앙사상이 자기 교회의 기업이 되어야 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성도를 키워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을 받을 때는 세상 속화된 교회에서는 받으면 안 된다. 왜냐? 우리 기독자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기업을 가져야 하는데, 이게 구원계대의 하나님의 섭리다. 그래야 인간이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세상 속화된 교회에서는 이것이 되어지지를 않는다.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으면 그 마음은 병이 들고 만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인데, 물질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에서 크게 되려고 하고, 세상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면 이 사람은 이미 세상 병이 든 거다. 교회에서는 자기가 진리로 영원히 높아져야 하고, 이 높아짐으로 주님만을 찬송해야 한다. 이 높음은 여호와께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 기쁘시게 하는 거다. 믿는 효력이 있어야 된다는 거다. 효력이 없는 기쁨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호와께 황소를 한 마리 드리는 것과, 사람이 진리 자체화로 만들어지는 것 중에 어느 게 쉬우냐? 황소를 한 마리 드리는 것이 쉽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어려우냐? 진리 자체화 되는 게 더 어렵다. 그러면 진리 자체화 된 사람과, 황소 중에 어느 게 더 가치가 있느냐? 더 어려운 게 가치가 있느냐, 쉬운 게 가치가 있느냐?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드리는 것보다 무엇이 더 기쁘다? 29절부터 보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것이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 기쁘시게 한다고 한다.


32절: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이’가 무엇이냐? 온유한 자가 어떤 사람을 보고 기뻐한다는 거냐? 주의 구원으로 높아진 사람을 보고 기뻐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는 무엇으로 높아져야 하겠느냐? 무엇으로 높아짐이 참 높아짐이냐?


온유한 자가 주의 구원으로 높아진 사람을 보고 기뻐한다고 하는데, 온유한 자가 누구냐? 다윗 자신이냐, 다른 사람이냐? 온유한 자는 바로 주님이시다. 그러면 온유가 뭐냐? 이름이 ‘온유’냐? 온유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말한다. 이 온유한 성품은 가을에 여문 과일을 땔 때 이 과일이 어제까지 없었다가 갑자기 열린 게 아니라 나무에서 꽃이 피고 이 꽃이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계속 햇빛을 받으면서 수많은 비바람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 여물어진 것처럼 수많은 사건과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핍박과 유혹과 사망을 견디고 정복하고 승리해서 나온 생활과 시간과 생의 발걸음이 들어있다. 이런 것으로 온유의 성품으로 여물어지는 거다.


온유를 성질이 부드러운 것만 생각하지 말아라. 온유의 성질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도, 하나님의 도덕성도, 하나님의 능력성도 들어있다. 그래야 온유한 성품이다. 사람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누가 자기에게 해를 끼쳐도 성질을 낼 줄도 모르고, 누가 건드려도 씩 웃고 돌아간다면 이게 사람이 좋은 거냐? 하나님의 성품이 구비된 속에서 상대의 환경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아주 적절하게 나가는 것이 참 온유성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온유케 된 사람은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과 성품이 온유케 된 자는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다. 거짓된 사람과 진짜 사람을 안다. 물질선에 넘어가고, 인정선에 넘어간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누구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또한 하나님을 찾느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거냐? 세상살이의 행복과 부귀와 명예와 영광을 달라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거냐? 진정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누구냐?


성경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찾으라고 그러는 거냐. 믿는 사람이 예수를 찾느라고 그러는 거냐? 믿는 사람이다. ‘구하라.’ 뭘 구하느냐? 말씀의 배가 고프면 말씀을 구하게 된다. ‘찾으라.’ 누구를 찾느냐? 주님을 찾아야 한다. 진리를 찾아야 한다. ‘두드리라.’ 믿는 사람이 왜 두드리는 거냐? 두드리는 것은 들어가겠다는 거냐? 만나겠다는 거다. 문을 열어주면 안으로 들어가서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진정코 하나님을 찾는 자가 누구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도를 찾는 자들이 하나님을 정통으로 찾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찌어다.’ ‘고통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과 고난과 고통의 세상 속에서도, 환난 핍박 속에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도를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소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살아있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마음으로 갈아 넣으라는 거다. 무엇이든지 영원히 살아날 수 있는 마음으로 바꾸라는 말이다.


마음을 바꾸지 않고 예수를 믿겠다? 마음을 바꾸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 귀신을 받아서라도 목회를 하겠다? 세상 열심으로 목회를 하겠다? 누구로부터 안수를 받아서 목회를 하겠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목회를 하겠다? 예수님은 이런 등등의 마음을 어떻게 보실까?


영원히 소생되는 마음을 가지면 전부는 주님을 행해서 살아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 마음을 가지게 되면 환난 핍박을 무서워하지 않고 이기고 승리하여 나온다. 주님은 이런 자를 높이 올리신다. 그러니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나는 마음으로 바꿔라. 이게 시급하다.


33절: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안 믿는 궁핍한 자의 소원이 무엇이겠느냐? 물질부자가 되는 거다. 그러면 기독자는 어느 면의 부요를 원하느냐? 물질적 부요냐, 영적인 면의 부요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다보니 환난 핍박을 만나서 영과 육에 고난이 왔을 때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서 무엇을 구해야 옳은 신앙이 되겠느냐?


안 믿는 사람이 어느 정도 부유해져야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할런지 모르겠으나 육적인 면이 궁핍할 때 누구에게 구하지 않고도 손을 빨리 놀리면 밥은 굶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일반은총이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 더 궁핍을 느끼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수금’이란 감옥에 갇힌 거다. 갇히는 것도 여러 가지다. 바로 믿다가 어떤 상황에 갇힌 것도 있고, 물질선 인정선이 끊어져서 활동이 축소되는 것도 갇힌 거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힌 경우도 있고, 진리말씀대로 바로 믿으려 하다가 핍박을 받아 생활의 고난으로 갇힌 것처럼 되는 환경도 있다. 그 다음에 자기가 몰라서 갇힌 것처럼 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믿으려는 성도는 이런 일을 당할 때일수록 믿음 변치 말고 신앙정조를 지키며 진리를 붙잡고 나가면 승리를 한다.


34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찌로다.’ 뒤로 나갈수록 점점 축복이 확대가 된다. 온 천하 만물이 누구를 찬송하느냐? 앞에서 답이 나오는데, 산 마음, 살아있는 마음으로 생명운동을 하는 자에 대해 만물이 잘한다고 하며 찬송을 한다.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해와 달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왜냐? 첫 번째는, 해가 넘어가야 달이 뜨는 건데 달이 아무리 기다려도 해가 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달이 해를 찾아가 보니 해가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우는 전쟁을 구경하고 있다. 그래서 달도 해와 함께 그 전쟁을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밤이 오지 않는 거다.


해와 달이 넘어가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성도가 진리를 위한 싸움을 하면 부지런히 싸워서 이기라는 뜻이 있다. 일반전쟁을 보면 어두워지면 못 싸운다. 그러니까 낮과 밤을 밝혀놓을 테니 부지런히 싸워서 이기라는 거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이 어느 쪽 편이냐? 여호수아 편이다. 이 하나님은 지금도 믿는 우리가 여호수아와 같은 싸움을 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신다.


모든 만물은 거룩한 성도의 이룰구원을 위해 지음 받은 것이라서 모든 만물은 성도의 자타의 구원운동에 쓰임받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돈이 구원운동에 쓰임받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걸 생각해 봐라.


사람이 하루를 살다 죽으나, 열흘을 살다 죽으나, 십 년을 살다 죽으나 신령천국이 우리의 고향이니 이 고향에 빨리 가는 게 좋다. 그러나 오래 살려주시면 그만큼 이룰구원을 더 이룰 수 있으니 좋은 거다. 그런데 오래 살게 해 주셨는데 이룰구원이 안 이뤄졌다면 이런 불행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멋있게 살아보자.


선악과 따먹은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존재목적을 전혀 모른 채 죽이는 운동, 사망운동을 하며 살기 때문에 이들로 인해 만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모든 만물은 살리는 운동, 생명운동을 좋아한다. 모든 만물은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일에 쓰임받기를 원한다. 믿는 우리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할 텐데 이게 영 안 된다.


35절: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뒤로 갈수록 점점 커지고 넓어지고 확장이 된다. ‘시온’이란 ‘요새’ 라는 뜻인데, 다윗이 이 요새를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취한 후에 고차원적인 신앙을 상징하는 의미로 많이 쓰여졌다. ‘영원한 도성, 영적 왕국, 주가 거하는 시온산, 택한 백성의 시온산, 구원받은 자의 본거지,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이 섰는 곳’ 등등의 의미로 쓰여졌다. 이 외에도 많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신다고 하는데, 이룰구원을 이루려면 아무리 올라가기 힘이 들고, 들어가기 힘이 들더라도 높은 시온의 요새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들어가서 시온의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안 만들어지면 쫓겨난다.


높은 산을 올라가자면 힘이 들듯이 차원 높은 시온사상의 신앙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편하게 올라가지는 게 아니다. 올라갈 때 ‘힘이 드니 올라가지 말아라’ 라고 하며 사람이 유혹을 하고, 물질이 유혹을 하고, 유혹만 아니라 환난도 주고 핍박도 주고, 또한 고난과 근심도 많다. 물질로 오는 시험, 인정정실로 오는 시험, 목숨으로 오는 시험, 종교적인 유혹으로 오는 시험 등등이 얼마나 많겠냐마는 진리 하나만 붙들고 이런 것을 다 이기고 올라온 신앙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만들어지는 거다. 이 신앙이 시온신앙이다.


시온산은 요새화되었기 때문에 쳐들어가기가 어렵다. 시온사상의 신앙은 쳐부수기가 어렵다. 이런 신앙은 끄집어 내리기가 어렵다. 몇 마디 하면 그만 넘어지고, 몇 마디 하면 그만 끌려가고, 몇 마디 하면 그만 주저앉고 하는 것은 시온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은 앞에서 말한 신앙사상자를 구원하신다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나 부르짖으면 구원하시는 게 아니다. 성경에 무엇이 구원인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신앙을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키워 가시는지 나와 있다.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참 큰 축복이다. ‘유다’란 ‘찬양’이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시온사상으로 된 성도들을 데리고 유다의 성읍들을 건설하신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첫째는 진리신앙의 성도들이 교회를 건설한다는 뜻이요, 두 번째는 시온사상의 성도들은 진리통치를 받으니 전부가 영생이요 건설이요 파괴될 것이 없다는 뜻이요, 세 번째는 시온사상을 가진 성도가 행동하고 활동하는 것마다 전부가 영생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찬송을 돌리게 된다는 거다.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시온사상으로 건설이 된 것은 남의 것이 없고 다 자기 것이다. 죄적인 것이 없고 전부가 의요 선이다. 자기의 이력과 업적, 자기의 모든 것이 자기의 소유다. 진리통치 신정통치를 받고 건설되고 만들어진 것은 전부가 자기의 영원한 소유다.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소유는 전부가 자기 것이요, 자기의 소유는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다. 그러니 걱정할 게 뭐가 있느냐?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기쁜 게 아니라 걱정이 태산이다. 왜냐? 더 가지려고 하고, 가진 것을 안 빼앗기기 위해 자꾸 자기 품 안으로 끌어 모으려고 하기 때문에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데도 더 가지려 하고 더 쌓아놓으려는 사람이 있다. 두 청춘남녀가 결혼을 하면 집이 있던 말던 주님을 위해서라면 한 몸이 되어서 개척으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산 정신이냐? 이런 정신이라면 뭘 무서워하고, 뭘 두려워하고, 뭘 부러워하겠느냐?


36절: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이번에는 구원계대의 축복이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무엇을 상속해 주고 무엇을 상속 받느냐? 상속을 해 주는 시온의 종들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겠느냐? 차원 높은 시온의 사상으로 살았다. 그리고 시온으로 따라 올라온 후손들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진리를 붙잡고 생명을 내대고 신앙정조를 지키며 거룩한 신앙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이다. 이런 후손들이 시온사상을 이어받고, 또한 그 나라를 상속받는다고 한다. 얼마나 멋있느냐? 그런데 세상 속화된 종들의 세계에서는 지금 무엇을 최종적으로 이어받으려고 애를 쓰고 있느냐?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악인의 후손은 세상정신 사상을 받는다. 이들은 결국은 세상과 함께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시온의 정신과 사상으로 고차원으로 이끌어 올려주신 자를 사랑하는 자는 시온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거하게 된다.


이 일이 종국적으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디에 살았던 세상이 끝난 후에 천국에서 이뤄지는 거지만 현실에서도 보면 부분적인 면에서 시온의 신앙정신을 가진 자들은 함께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시온의 신앙을 가진 자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고, 세상정신 사상을 가진 자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믿는 사람이 한 곳에 많이 모인다고 해서 다 시온사상의 신앙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예수 믿는 것은 아무렇게나 믿는 게 아니다. 궁극교회에 다니면서 ‘진리 진리’ 할지라도 자기가 진리 자체화 되지 못하면 자꾸 밀린다. 스스로 떨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다 뛰어서 올라가는데 자기는 자꾸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 떨어진다고 해서 이질적인 아무 교회나 갈 수 있느냐? 안 된다. 이거는 참으로 어렵게 예수를 믿는구나. 참으로 괴롭게 예수를 믿는구나. 그 사고방식이 어렵고, 그 사고방식의 세상살이가 어렵고, 마음이 어렵고 고통이 되니 어떻게 편할 날이 있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