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붙잡으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믿음으로 붙잡고 굳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강원도에서는요… 감자를 고추장에 찍어 먹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경상도 사람, 아내는 전라도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고향에서 자라 서로 다른 말을 쓰고, 다른 음식 맛에 익숙했지만,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 사랑으로 매일을 다정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아내가 따뜻하게 삶은 감자를 식탁 위에 올렸습니다.
“여보, 감자 좀 드세요.”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있던 하얀 그릇에 손을 뻗어 감자를 찍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맛이 이상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설탕이잖아!”
남편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습니다.
“우리 경상도에서는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사람은 처음 봤네.”
아내는 그 말에 얼굴빛이 확 변했습니다.
“세상에, 소금에 찍어 먹는다고요?
우리 전라도에서는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요!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사소한 한마디가 오해를 낳았고, 그 오해는 다툼으로 번졌습니다.
서로의 방식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결국 남편은 “당신은 도대체 우리 집안이랑은 도저히 안 맞아!”라는 말까지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두 사람은 끝내 이혼 법정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판사 앞에 선 남편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판사님,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으라니요!”
이에 아내도 지지 않았습니다.
“판사님, 세상에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는다는 말 들어보셨어요? 그게 더 이상하죠!”
판사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두 분 다 참 재미있으시네요.
감자를 소금에 찍든, 설탕에 찍든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강원도에서는요… 감자를 고추장에 찍어 먹습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렇게 별것 아닌 일 하나가 한 가정을 무너뜨릴 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감자 이야기와 같은 일들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마음을 다치고, 별것 아닌 문제에 고집을 세우며, 내가 옳다는 이유 하나로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감자를 소금에 찍든, 설탕에 찍든, 고추장에 찍든, 결국 감자는 감자일 뿐입니다.
먹는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그리스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대수롭지 않은것’, 즉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이라고 합니다.
인생에는 굳이 목숨까지 걸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굳이 싸울 필요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태어난 곳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고, 익숙한 방식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잘못이 아니라, 그냥 다름의 색깔일 뿐입니다.
그 다른 색이 섞여질 때, 더 아름다운 색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더욱 더 아름다워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기에 삼위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올려드리는 복된 추수감사주일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P4.
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 사고를 세 번 당하였다고 기억한다.
첫 번은 귤 과수원에서 일어난 사고이다.
제주도에는 돌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밭의 경계를 돌담을 쌓아서 구분한다.
귤 과수원에서 돌담을 넘어가려고 하다가 돌담이 무너지면서 돌담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었다.
두 번째는 저의 누님이 결혼하던 시절인데, 그때는 제주도에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귤 과수원을 하면서도 기계로 무채를 썰어 말려서 판매하는 무생길리를 했었다.
지금은 무생길리를 하는 가정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저가 청년의 때까지만 해도 제주도에는 무생길리를 하는 가정들이 꽤 많았었다.
무생길리를 하려고 하면 추운 겨울에 들판에서 무를 씻어서 기계로 설고 채반에 널어서 햇빛에 꼬들꼬들하게 말려야 상품이 되는 것이다.
들판에서 무를 씻으려고 하면 경운기에 물을 실어서 운반해 와야 하는데, 저가 경운기를 운전하고 물을 씻고 가다가 오르막에서 물이 너무 무거워서 경운기가 뒷걸음치고 경운기가 전복되면서 경운기 엔진에 머리가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었다.
세 번째는 2009년도에 대전에서 수원신학교에 강의하기 위해서 수원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경부고속도로 천안휴게소 앞에서 뒤따라오던 차량에 부딪치면서 차량은 망가지고 얼굴에는 피범벅이 되는 사고를 당했었다.
누군가가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크게 세 번 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세 번 사고 중에서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저는 이미 세 번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까지는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큰 사고는 당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다.
하나님은 평등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평등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명히 자신에게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거라사인들은 어떨까?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기회를 붙잡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에게 기회를 주셨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놓쳐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D4.
① 거라사인의 땅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동네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광풍을 우여곡절 속에 가라사인의 땅을 찾아오신다.
거라사인의 땅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레기온(Legion), 곧 5000여 병사들로 구성된 군단과 같은 많은 귀신들에게 사로잡혀서 몹쓸 짓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주신다.
예수님은 군대 귀신을 쫓아내 주시면서 그 사람을 얽매고 있던 모든 고통과 시련과 압박에서 해방시켜서 자유함을 허락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으로 찾아오신 이유는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군대귀신을 쫓아내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정결한 사람으로 세워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 사람을 흉폭한 귀신들에게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인으로 세워주신다.
예수님은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서 군대 귀신에게 억압당하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주변 사람들까지도 온갖 무서움과 두려움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사람을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리로 되돌려주시기 위해서 거라사인의 땅으로 찾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서 세상 영의 조종을 당하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고통과 시련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사람을 본래 하나님 자녀의 자리로 되돌려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오신 분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추진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천국의 회복을 위하여, 죄인을 대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환원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어 인간세계로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역은 회복과 치유와 자유와 안식이다.
죄를 대속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사역, 모든 질고를 능력으로 치유하여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세워주시는 사역, 그럼으로 모든 악한 권세들,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들에게서 진정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거라사인의 땅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② 돼지를 사용하시는 예수님.
영적인 존재인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존재들이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로 찾아오신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자신같은 귀신들을 결박하여 무저갱으로 보내고 봉함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더 이상 마귀 사탄 악한 영들이 존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귀신들은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는 대신에 돼지에게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님은 귀신들의 요구를 허락해 준다.
귀신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돼지 떼에게로 들어간다.
돼지 떼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쏜살같이 갈릴리 바다로 달려가서 몰사당한다.
그러면 왜 돼지 떼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일까?
본래 요단강 동편에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아서 정착한 지역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요단강 동편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고 이방인들의 지배를 당하게 된 지역이다.
특히 예수님 시대에는 헬라제국, 로마제국의 지배를 당하면서 이방신들을 섬기는 지역으로 바뀌게 된다.
헬라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지역으로 바뀌면서 제우스신을 비롯한 잡다한 신들에게 재사하는 제물을 키워내는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제우스신을 비롯한 잡동산이 신들은 돼지를 제물로 받는 신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제사를 드리거나 굿을 할 때, 돼지머리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굿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절로 갈릴리 동쪽에서는 이방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돼지를 키우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상 대대적으로 목축업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소나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 이들도 있었지만, 돼지를 키우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역이 된 것이다.
그러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간 귀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마태복음12:43-45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라고 기록한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들어갔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나와서 들어갈만 한 곳을 찾았는데,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처럼 전에 들어갔던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없어서 다시 찾아갔는데, 이미 깨끗하게 청소하고 수리된 모습을 보면서 자신보다 더 악랄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귀신은 자기들이 들어가서 머물 곳을 찾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는 있지만,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는 없다.
귀신들은 죽지 않는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사의 개념이 없는 존재들이다.
단지 거처하는 장소만 바뀔 뿐이다.
군대 귀신들은 2000여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서 돼지들만 갈릴리 바다에 빠져 몰사당하는 것이다.
돼지들만 불쌍하게 몰사당하는 것이고, 귀신들은 그대로 있다.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서 그 누군가에게 들어가서 또 다시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언제든지 귀신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귀신이 접근할 수 없도록 신앙인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먹이를 찾아다니고 있는 맹수들처럼 신앙인들에게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항상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만 귀신들의 올무에서 이겨낼 수 있다.
③ 예수님에게 떠나라고 촉구하는 거라사인들
헬라제국, 로마제국이 섬기는 잡다한 신들의 제물을 키워서 팔면 그 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예수님이란 사람이 찾아와서는 한 사람을 살린다고 2000여 마리가 한꺼번에 몰사당했으니 경제적으로 얼마나 막급한 손해를 보게 되었단 말인가.
2000여 마리만 아니라 3000마리, 4000마리, 5000마리가 있어도 다 몰살당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수님이란 사람이 이 동네에 더 있으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망가지고 말지 않겠나.
그러니 빨리 예수님이란 사람이 이 마을에서 떠나야만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리는 것이다.
37절에서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업터전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란 사람을 빨리 떠나도록 해야만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고 살아갈 길이 열린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빨리 떠나라고 아우성을 질러댄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같이 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목수인 주제에 랍비 될 자격도 없으면서 랍비 행세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쫓아내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 잘 안다고 여겨서 예수님을 떠나라고 촉구하는 것이라면,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 몰라서 예수님을 떠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너무 잘 알아도 문제이고, 너무 몰라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 잘 안다고 하는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만 알았아도 예수님을 환영했을텐데, 육신으로 자신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잘 몰랐던 것이다.
거라사 사람들은 가버나움 건너편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 이미 많은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찾아오시자 예수님 때문에 경제적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면서 경제적인 손실이 너무 크게 생길 것이라 생각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떠났듯이, 거라사인의 땅에서도 더 이상 머물려고 하지 않고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④ 주신 기회를 붙잡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과연 예수님은 정말 아무 미련없이 거라사인의 땅을 떠나고 싶어하셨을까?
한 사람의 영혼을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에 들렸던 한두 사람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거라사인의 땅을 떠나려고 하신 것일까?
거라사인의 땅을 떠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예수님은 거라사인들이 요구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와 의지와 뜻에 따라서 거라사인들에게 축복의 세계를 활짝 열어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거라사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과 비전과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라는 커다란 보타리를 들고 거라사인의 땅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 뭐라해도 인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의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거라사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고 싶어 하신 것이다.
그런데 거라사인들의 집요한 반대로 인해서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땅을 떠나는 것이다.
거라사인의 땅에는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산재해 있다.
물론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멀어진 족속들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기업을 분배받아서 삶의 터전을 일구면서 살았던 곳이지 않나.
그러니 왜 거라사인의 땅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없었겠는가.
거라사인의 땅에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인의 땅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거라사인들도 갈릴리바다 건너편에서 일어난 각종 뉴스들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거라사인들이 갈릴리바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각종 핫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예수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 호기심으로라도 예수님을 좀 더 붙들고 늘어지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나라의 신령한 말씀을 들어야지 하는 소망을 가질만도 한데,...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예수님을 떠나보내야만 되었을까?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제발로 찾아오셨으면 “이야...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어디에 있겠냐? 얼마나 좋은 기회냐”하면서 예수님께서 떠나려고 해도 예수님을 막무가내로 붙들어야 할텐데...
이들은 담 넘어 불구경하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의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떠나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군대귀신에 들려서 죽을 고생하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귀신들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오히려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재산이 크게 손해를 입었다고 하면서 단체로 예수님을 향하여 손해를 배상하라고 고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냐 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영혼이 새로워져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부자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4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마가복음10:23에서는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것에 몰두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을 추구하면 하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신앙인들은 너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려고 하지는 않는가?
물론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것들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것들보다 하나님의 것들에 더 우선권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을 떠나면서 진짜로 거라사인들에게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미련스럽게 놓치지 말고 붙잡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거라사인의 땅에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얻게 될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강하게 붙잡기를 원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속히 떠나달라고 아우성을 치면서 데모하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찾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란 고향이고, 육신의 원가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더 하늘아버지께서 가지신 구원의 계획과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낭떠러지로 몰고 가서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나사렛 마을을 떠나신 것이다.
고향인 나사렛에서 냉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이상 나사렛 동네로 찾아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을 떠남으로 예수님께서는 다시 거라사인의 땅을 찾아오시지 않는다.
거라사인의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버림당한 땅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 기회를 거절함으로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구원의 손길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떨까?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교회로 찾아오시는데, 예수님을 만나려고 예배당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있을까?
이 핑개 저 핑개 되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있지는 않고 있는가?
어떤 결정을 하든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고, 그 결정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을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균등하게, 평등하게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붙잡으면 자신에게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어떤 이유에서건 놓쳐버리면 또 다시 그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온다는 보장은 할 수 없는 것이다.
L4 & B4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찾지 못할 정도가 없을 정도이다.
인터넷에서 좋은 내용이 있어서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어느 초등학교에 여선생님이 계셨다고 한다.
어느 해에 선생님은 5학년을 담임하게 되어서 개학하는 날 자신의 반 학생들에게 “모든 학생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반에는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철수라는 작은 남자 아이가 있었다.
철수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옷도 단정하게 입지 않고, 잘 씻지도 않는 아이였다.
선생님은 철수만 보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시험을 볼 때면 시험지에 크게 X표시를 하면서 커다란 빵점을 주는 것이 즐겁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생님은 아이들의 지난 생활기록부를 다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읽으면서도 철수의 생활기록부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철수의 지난 생활기록부를 읽게 되었다.
철수의 지난 생활기록부를 읽으면서 선생님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철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은 철수에 대하여 “잘 웃고 밝은 아이임. 일을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이라고 쓴 것이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임.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이라고 쓴 것이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함.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이라고 쓴 것이다.
4학년 담임선생님은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친구가 많지 않고 수업 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이라고 써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선생님은 철수가 가진 문제를 깨닫게 되면서 자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스승의 날이 되어서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선물을 가져왔는데, 철수의 선물만 누런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한 선물을 가져온 것이다.
선생님은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애써서 철수가 가져온 선물을 뜯었다.
선물에는 알이 몇 개 빠진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향수병이 들어 있었다.
선생님은 철수가 가져온 팔찌를 차면서 정말 예쁘다며 감탄해 주고,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면서 냄새를 맡아보면서 향수 냄새가 참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날 방과 후에 철수는 “선생님, 오늘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선생님은 아이들이 돌아간 후에 한참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날부터 선생님은 읽기, 쓰기, 국어, 산수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진정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철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대해주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이 철수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면 철수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이 격려하면 할수록 더 빨리 반응하였다.
그해 말이 되었을 때, 철수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선생님이 가장 귀여워하는 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1년 후에 선생님은 교무실 문 아래에서 철수가 쓴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쪽지에는 “선생님이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6년이 흘러 선생님은 철수에게서 또 쪽지를 받게 되었다.
그 쪽지에는 고등학교를 반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아직도 선생님이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4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 있었다.
이번에도 선생님이 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 쓰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다.
편지에는 ‘Dr. 박철수 박사’라는 사인이 되어 있었다.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철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줄 수 있는지를 여쭈어보는 편지였다.
선생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화답해 주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어머니와 함께 보낸 스승의 날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리고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서로 깊게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박철수는 선생님에게 귓속말로
“선생님,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선생님도 눈물을 흘리면서 “철수,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만약에 그 선생님께서 철수의 담임을 맡으면서 처음부터 가졌던 마음으로 철수를 미워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면 선생님은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만 가진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기록부를 읽으면서 마음에 변하는 기회를 붙잡았기 때문에 최고로 존경받는 진짜 선생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격려는 귀로 먹는 보약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렇다. 진심으로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고 사랑을 보여주면 변화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
흘륭한 일꾼은 끊임없이 격려와 칭찬과 사랑의 보약을 먹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어떨까?
다시 말하지만, 기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회가 나에게 항상 찾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한번 찾아왔던 기회를 내가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리면 다시는 나에게 그 기회가 찾아온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다시는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나의 것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① 꿈과 비전과 소망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
꿈이 없는 사람, 비전이 없는 사람, 소망이 없는 사람,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향하여 찾아오고 있는 기회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놓쳐버리고 만다.
꿈을 가진 사람, 비전이 있는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언제든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면 망설임없이 붙잡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꿈도 없고, 아무런 비전도 없고,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사람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마냥 흘러가는 세월만 원망하고, 세상이 이러니까 저러니까 하면서 새상 탓만 하면서 허송세월하면서 세월을 다 허비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시는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꿈과 비전과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② 항상 기회를 찾아다녀야 한다.
자신의 꿈과 비전과 소망과 희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이루어갈 꿈과 비전과 소망과 희망을 이루어갈 수 있는 기회를 엿보면서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회를 찾는 사람, 기회를 구하는 사람, 기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말이 있듯이 계속 자신의 꿈과 비전과 소망과 희망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제 어떻게 자신에게 그 기회라는 것이 찾아올지 모른다.
언제가 되었든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라야 찾아온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기회를 찾으면서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 곧바로 망설이지 않고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기회를 찾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는지도 모르게 슬쩍 왔다가 슬쩍 다른 누군가를 찾아서 떠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항상 기회를 찾아서 다녀야 한다.
나에게 찾아온 기회라는 감동이 왔을 때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붙잡아야 한다.
무조건 붙잡고 봐야 한다.
이 기회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 놓아버려도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인데도 망설이다가 놓쳐버리고 나에게서 떠나버리면 다시는 그 기회가 찾아온다는 보장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인의 마을로 찾아오셨지만, 거라사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쫓아내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라사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는데도, 거라사인들은 예수님을 쫓아냄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려던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빼앗겨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균등하신 하나님, 평등하신 하나님, 균일하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기회를 믿음으로 붙잡아야 한다.
특별히 2025년의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지난 1년 동안 삼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은혜와 사랑과 축복에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를 올려드리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주시는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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