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고백하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당하고 굿굿하게 신앙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쫄따구는 슬퍼요
어느 날 군대 고참과 쫄따구가 목욕탕에 갔습니다.
한참 때를 밀고 있는데 고참이 쫄따구에게 “등 밀어.”라고 했습니다.
쫄따구는 고참 등을 열심히 정성스럽게 밀어주었습니다.
다음으로 고참이 쫄따구 등을 밀 차례가 되었습니다.
쫄따구의 등에 고참이 때타월을 대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automatic 움직여.(자동)”
정말로 이렇게 말하는 선임이 있다면 그 선임이야말로 쫄장부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격, 성품, 됨됨이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건 한결같이 겸손하고 인격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대접받으려고 하면 내가 먼저 대접할 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을 하찮게 여기면서 자기만 대접받기를 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자격이 없습니다.
무시당해야 할 마땅한 이유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P4.
오늘은 2025년 마지막으로 주일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새롭게 2025년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마음의 자세를 이제 마지막 주일까지 한결같은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변함없는 신앙과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시 예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예수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변함없는 관계인가를 재정립하면서 2025년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는 신앙인이 되시길 소망한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
주(主)라는 용어는 나라 안의 모든 백성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주’라는 용어는 ‘아도나이’(Adonai), 키리오스’(Kyrios)라는 단어로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본래 왕이나 황제나 이교도 신들, 남편 또는 노예의 소유주 등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이 용어를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의 구주, 우리의 주님, 우리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라는 단어는 영어로 Lord라고 부른다.
LORD라는 단어는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던 단어이다.
왕, 하나님, 경, 각하, 우두머리, 주인, 지배자, (토지·가옥 등의) 임자, 소유자, 지주, 대저택의 소유자, 봉건 군주, 영주, 귀족, 유력자, 거물, 대가, 장관, 남편이나 서방을 일컬을 때 사용하던 용어이다.
이 용어를 성경에서는 삼위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사용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주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건, 예수님이라고 부르건, 구세주라고 부르건, 주님이라고 부르건 다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내 삶의 주인으로, 내 영혼의 주인으로, 나의 모든 것, 나의 Everything의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앉으나 서나 누우나 공부할 때나 일할 때나 설거지할 때나 다른 누군가와 이바구를 떨 때나 언제든지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나는 철저하게 주님의 종이라고, 하수인이라고, 아랫것이라고, 노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올해도 주님의 종이었고,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나는 예수님의 철저한 종이요 노예요 하수인이요 아랫것이라고 고백하여 주인의 뜻에 따라서 온전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할 수 있을까?
오늘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묻고 계시는가?
예수님의 물으심에 무리들과 제자들은 무엇이라고 반응하고 있는가?
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신앙인들은 어떤 믿음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일까?
D4.
① 따로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
18절에서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떠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하늘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을 나누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동행하고 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홀로 기도하러 가시지 않고 제자들과 동행하여 기도하러 가신 것일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하게 하실 말씀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들과는 별개로 제자들에게 특별히 전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큰 이슈가 되는 말씀이다.
기도는 삼위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기도하면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말씀과 기도라는 두 바퀴가 잘 어울려서 돌아가야만 믿음 생활이라는 인생이 잘 움직여가는 것이다.
말씀만 말씀만 말씀만 강조하면서 기도를 게을리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기도만 기도만 강조하면서 말씀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신앙인은 생명의 양식인 말씀과 영적인 호흡인 기도가 서로 잘 어울리고 조화를 이룰 때, 신앙인의 삶은 더욱더 풍요로워지고 변화 받고 하나님께서 위임해 주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면서 하늘 아버지와 성령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을 나누셨는데, 사람인 신앙인들이야 오죽할까.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기도함으로 영적인 교감을 쉼 없이 누릴 수 있어야 신앙인으로서의 긍지, 자부심, 자긍심,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② 이방 신의 신전에서도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본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구체적인 장소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고도 하고, 빌립보 가이사랴라고도 부른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북부지방인 단 지역 근처에 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빌립의 가이사랴‘라는 의미로 빌립이 만든 가이사랴 성읍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본래 파네이아스((Πανειάς)라는 지역으로 판(PAN)신을 섬기는 성읍이었다.
판신을 섬기는 신전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판신은 쾌락의 신으로 알려져 있고, 신전을 연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판신을 섬기는 파네이아스를 로마의 아우구스투수 황제가 해롯 대왕에게 하사해 주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하사를 받은 헤롯대왕은 자신에게 이렇게 귀한 지역을 하사해 주신 것에 너무나 감사하여 이곳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신전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헤롯대왕이 죽고 헤롯의 아들인 헤롯 빌립 2세가 성읍을 다시 재정비하면서 아우구스투수 황제를 위한 대리석으로 된 신전을 건축하게 되면서 빌립보 가이사랴(Caesarea Philippi)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쾌락의 신이라는 판신을 섬기는 지역이기도 하고,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랴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신봉하는 곳이기도 했던 곳이다.
헬라 신전과 로마 신전이 동시에 세워진 곳이다.
만년설로 알려진 헐몬산에서 건기에 동쪽 광야에서 동풍이 불어오면서 헐몬산의 얼음이 녹아내린다.
얼음이 녹으면서 물이 지하로 스며 들어가게 된다.
지하로 스며 들어간 물은 이스라엘의 북부지방인 단 지역에서 솟아나면서 폭포를 이루고 상요단강을 걸쳐서 갈릴리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도 바위에서 물이 솟아난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물이란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물이 빌립보 가라사랴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바위틈에서 물이 꽐괄 솟아나면서 고고고고고대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을 공급해 줌으로써 기쁨과 쾌락을 주는 신이 판신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고고고고대 사람들은 이곳에 판신 신전을 세우기도 했고, 헤롯대왕 때에는 로마 황제 신전을 세워서 경배하며 섬긴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이 곳을 방문하신 것이다.
더더구나 이곳은 판신과 로마황제 신전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짜 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빌립보 가이사랴를 방문한 것이다.
진짜 주인이 되시는 신은 판신도 아니고 로마황제신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진찌 신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든 제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메시야이신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가르치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우리나라 산에 있는 유명한 사찰이나 성당이나 성황당이나 심지어 굿당을 방문하더라도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선교한다는 분들 중에 마치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번씩,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았던 것처럼 사찰이나 성당이나 성황당에 가서 땅 밟기 하는 이들이 있다.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고귀한 것처럼, 그들의 신앙도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땅 밟기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되지만, 신앙인들은 언제 어디서든 항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은 이방 신들을 섬기는 신전이라 할지라도 조용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③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는지를 물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고 18절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19절에서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마태복음16:14에서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례요한이 되었건, 엘리야가 되었건, 예레미야가 되었건, 선지자들 중에 하나가 되었건 무리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보다는 여러 선지자들처럼 선지자라고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언약한 바로 그 메시야라고 인정하는 무리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없이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바로 그 메시야라고 인정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사야서61:1-3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메시야는 이런 분이라고 소개하신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사야서 61장에서 기록한 메시야관에 따라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해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백성들, 무리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으로 고백한 이들이 상당히 많다.
이들을 “메시야닉 쥬(Messianic Jew)”라고 부른다.
메시야닉 쥬는 메시야를 믿는 유대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믿는다고 신앙 고백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메시야(Messiah)는 구약적인 용어이다.
이 메시야를 신약적인 용어로는 그리스도(Kristos)라는 말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자는 왕과 대제사장뿐이다.
선지자는 기름 부음을 받는 대상이 아니다.
선지자는 기름 부음을 받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일 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로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수많은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다.
소위 지성인이라고 자청하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석가, 공자, 마호멧과 함께 세계 4대 성인들 중에 한 사람일 뿐,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유대인들의 눈에도 예수님을 선지자, 유명한 선생이나 랍비 정도로, 비범한 인품과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구세주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해 오셨는데, 왜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바라고 소망하던 메시야에 대한 개념과 예수님의 실제는 달라도 너무나 많이 다르고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는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야, 죄를 사해주시는 메시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는 메시야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는 강력한 파워를 지닌 메시야로 헬라제국이건 로마제국이건, 헤롯왕이건 상관없이 다윗 왕같이 그들의 압제에서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이스라엘 백성들, 유다 백성들을 회복하여 메시야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갈망하던 메시야는 다윗 왕같은 세상의 강력한 권력과 파워를 지닌 왕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국기에 그려진 별이 바로 다윗의 별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별을 이스라엘 국기에 새겨 놓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다윗 왕같은 강력한 파워를 지닌 왕이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세상적인 강력한 힘과 파워를 지닌 메시야를 갈망했던 반면에 실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적인 강력한 힘과 파워를 지닌 메시야가 아니다.
사탄, 마귀 공중권세 잡은 악의 영들에게 빼앗겨버린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 천국을 회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추구하는 이상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온갖 종류의 이적들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도 들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선지자들이 전하는 것에 비해서 약간 더 비중이 크고 높은 수준일 뿐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선지자들이나 랍비들이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전하는 것보다는 뭔가 특이하고 탁월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는 아니라고 단정 짓고 마는 것이다.
서로 추구하는 이상향이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나 신앙관이 다르면 서로 합일점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밥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부부도 서로 가치관이나 신앙관이 다를 때, 부부로 살아가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치관이나 이상향이나 인생관, 국가관, 세계관, 신앙관이라는 의식 체계를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한번 그것에 몰두해 버리면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한번 이단에 빠져버리면 그 이단에 대해서 올바르게 수없이 가르치고 전하고 알려주어도 좀처럼 그 이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번 좌파,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버리면 좀처럼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갈라지고 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사상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신본주의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존재라고 확신해야 한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사상,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의 말씀에 내 생각과 의지와 뜻과 의식 체계를 맞추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중심으로, 신본주의로, 예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④ 제자들에게 직접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0절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직접적으로 물으신다.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장소가 판신과 로마황제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판신도 아니고 로마황제신도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실존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것이다.
경주에 가면 설굴암, 불국사 등등 유명한 사찰이 있고, 경북 영주 소백산에 가면 부석사가 있고, 속초 설악산에 가면 신흥사가 있고, 속리산에 가면 법주사가 있고, 합천에는 해인사가 있고, 대전근교 계룡산에는 동화사라는 큰 사찰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너는 누구를 믿느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세상의 신으로, 판 신으로, 로마 황제 신으로 보느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으로 보느냐?”라고 질문하시는 것과 같다.
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16;16에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을 헬라어원문직역성경에서는 “당신께서는 그 메시야이시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빌립보 가이사랴가 로마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세워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우리의 신은 세상의 강렬한 군주로 군림하고 있는 로마 황제도 아니고, 기쁨과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판 신도 아니고, 바로 당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는 바로 그 메시야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약속한 그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메시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보내주신다고 언약한 바로 그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17-19에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서 그 믿음의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몸된 교회,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 주님을 머리로 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그리스도라고,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신앙고백하는 그 고백 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처럼 신앙인들에게 물으신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신앙고백을 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신앙고백할 수 있을까?
아니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라고 망설여지고 있는가?
아직까지도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제대로 고백할 수 없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제대로 감동을 주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주님이라고, 구세주라고 믿는 믿음으로 신앙고백한 사람이라야 신앙인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고백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 뿐, 신앙인의 반열에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끝나버리면 그야말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사람과 같다.
교회 다닌다고 시간과 물질을 허비한 사람, 손해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려고 하면 적어도 주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헌금이라는 물질을 투자해야 하고, 자신이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투자했는데도 아직까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예수님을 제대로 배우고 알고 깨달아서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란 분은 이런 분이라고 너무나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드려지는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신앙인들이 드려지는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그 직분에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⑤ 앞으로 일어날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경고하신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신 구원의 메시야 사역을 감당하신 후에는 당당하게 고백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22절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비로소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게도 너무나 엄청난 소식이었지만, 제자들에게도 너무나 쇼킹하는 소식으로 다가온다.
너무나 성격이 급하고 당돌한 베드로는 당장에 예수님을 향하여 항변하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Incarnation하여 오신 분이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배반당하시고 버림당하시고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길만이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와 왕국과 천국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은 정해진 길로 가셔야만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신앙 생활하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모든 일대기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구나 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황당하기 이룰 때 없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2000여년 전 빌립보 가아사랴의 현장에서 제자들의 일원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무엇이라고 반응하고 있을까?
베드로의 반응이 신앙인들의 반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믿음 없는 행동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늘 겸허하게, 겸손하게 생각하고 행동을 유의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비난하거나 함부로 정죄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때도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다.
L4 & B4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메시야라고,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깨닫고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나와 예수님,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과 예수님이라는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된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나란 존재는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과 나라는 개인의 관계는 서로서로 붙어있어야 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나뭇가지가 본 나무에 붙어있어야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언제나 예수님과 나는 한 몸이라는 의식이 살아나야 한다.
팔과 다리, 손과 발, 손가락과 발가락, 매일매일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도 몸에 붙어있을 때, 존재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은 예수님이라는 몸에 붙어있어야 신앙인으로서의 긍지, 자부심, 자존감, 자신감, 소속감, 가치관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몸의 각 지체가 몸을 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나란 존재가 예수님을 떠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의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디.
예수님과 나는 한 몸, 한 지체라는 고백이 바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드렸던 신앙고백이고, 그 신앙고백이 바로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1:12-13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하시는 말씀이 신앙인을 위한 구원의 말씀임을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2:20-21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고백한 그 고백이 모든 신앙인들의 공통적인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5:17-19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신앙인들의 고백에서 우러난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예수님을 붙들고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살으셨던 삶의 흔적을 마음과 영혼에 그리면서 순간순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무사히 2025년 한 해를 마무리 잘하고 이제 2026년을 새롭게 맞이하기를 기대한다.
지난 2025년에는 좋은 일들도 많았고 좋지 않은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2025년은 흘러간 과거의 시간일 뿐이다.
흘러간 과거라는 시간은 우리들에게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들 앞에는 너무나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2026이라는 미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매일매일 순간순간마다 신앙고백하며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예수님을 깊이깊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음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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