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내가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시7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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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시71:20-22)

궁극이추천 0조회 4226.01.11 08:14댓글 

 

 

71편 20절-22절: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0절: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주께서 왜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생을 겪게 하는 거냐? 그리고 고난을 겪게 한 후에 우리를 다시 살리심이 무슨 뜻이냐? 그것은 죽은 신앙을 살리기 위함이다. 세상이면 다인 줄 알고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세상에 처박혀 있는 죽은 신앙을 다시 살리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는 이것이 의의 고난인지, 아니면 땅에 처박힌 신앙 때문에 온 고난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자기가 몰라서, 미련해서 신앙이 땅에 처박혔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많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려다 보니 고난을 겪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 자기의 신앙이 땅에 처박혔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닌지를 살펴보고 진리를 붙잡고, 즉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붙잡고 신앙이 올라가야 한다. 이러려면 결심과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자기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일반 이치적으로 생각을 하면 자기가 구덩이나 바다에 빠졌을 때 위에서 이 사람의 손을 잡고 끌어올릴 때 빠진 사람은 반드시 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는 힘을 다해 잡은 손을 놓지 않아야 올라올 수 있다.


자기의 신앙이 땅속으로 처박힌 생태인데도 순풍에 돛 단 것처럼 일이 잘 풀려 나간다면 이는 요나가 인간의 잔꾀를 쓰다가 하나님의 손에 빠져서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바다에 던져달라고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자기 꾀에 빠져서 뜨거운 맛을 보고 나올 수도 있다. 살아 나오는 것도 요나의 경우의 얘기지 자기가 요나보다 더 악하다면 요나처럼 살아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자기를 엘리야처럼 생각하는 분이 많은 것 같은데, 무슨 말인가 하니 자기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시켜서 엘리야에게 빵을 물어다 준 것처럼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주실 거라고 믿는 목사가 많다. 참 어리석다. 뭔가 착각을 한다. 까마귀가 빵을 물어다 주기까지의 엘리야의 삶이 어떠했더냐? 이런 건 전혀 생각을 않고 자기 신앙이 땅에 처박혀 있는 상태에서 엘리야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도 해 주실 것으로 생각을 하는 목사가 많다.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앉은뱅이는 부자가 되는 게 소원이다. 그런데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세상 땅의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산다면 앉은뱅이는 엉덩이가 땅에 붙어있듯이 영의 눈으로 보면 이 사람은 앉은뱅이다. 자기의 삶의 소원과 목적이 땅에 붙어있기 때문에 영적인 앉은뱅이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앉은뱅이라고 하시는데,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인간들은 정 반대적인 생각을 하며 산다. 이들은 눈으로 보이는 앉은뱅이만 알지 정신적 차원에서 소원 목적이 땅에 붙어있으면 이것이 영적인 차원에서 앉은뱅이인 줄을 모른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일으키는 운동을 한다. 정신과 소원 목적이 땅에 붙어 있는 사람을 땅에서 떼어 하늘을 향하게 하는 운동을 한다. 얼마나 차원이 높으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은 소경이라’고 했다. ‘마귀의 새끼들이라.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육신의 눈을 떠서 다 보는데도 이 말씀을 하셨다. 영적 소경이라는 거다. 영적 소경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신을 못 알아보는 거다.


소원 목적적으로 세상을 구걸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이 사람이 자기 당대에 잘 먹고 잘 살라는 법도 없고, 오히려 더 못 살 수도 있다. 설령 남보다 잘 산다고 해도 이런 정신으로 자녀를 가르치게 될 것이니 자녀교육은 완전히 땅속으로 처박히는 거다. 이걸 무시하지 말아라. 부모의 정신을 받고 그 가르침을 받아서 ‘세상에서 제일, 땅에서 제일’의 정신으로 살게 된다.


앉은뱅이에게 돈이 있다면 최대 목적이 뭐겠느냐? 일어서는 거다. 앉은뱅이에게는 이게 소원이다. 그러면 신앙정신 사상적으로 땅에 붙어 있는 앉은뱅이가 돈이 있으면 그 돈, 그 재산, 그 물질이 자기의 정신을 일으켜 세워주겠느냐? 못 세운다. 불가능이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밖에 없다. 절대적이다.


정신 사상이 땅에 붙은 자기에게 진리가 왔다면 이는 땅에 붙은 자기를 세우고자 함이요, 자유자로 만들어 주고자 함이다. 자유자가 된다는 여기에는 깨달음이 들어간다. 깨달음이 들어가면 이해타산 평가성이 바로 나온다. 이러면 사람이 반듯하게 놓이게 되고, 사람이 반듯하게 놓이면 세상을 반듯하게 살아가게 되고 모든 일처리를 반듯하게 하게 된다. 정신 사상이 바로 서지 못했다면 자기부터 넘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 다음 것은 말할 게 없다.


예수를 믿으면서 지혜지식적 깨달음의 차원이 한 단계 두 단계로 올라가면 점점 더 자유자가 되는 것인데, 이게 없다면 자기가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그만큼 잃어버리는 거고, 계속해서 진리이치의 말씀을 안 듣는다면 자기가 일어설 기회는 영영 없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정신을 가지고 뭐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잠도 안 자고 밤낮으로 뛰다가는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 ‘열심히’라는 말 속에는 지혜가 들어 있는 거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지나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세월 속에 들어 있는 사건 환경을 포착해서 그 가운데서 자기 것을 취해야 한다.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21절: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이 성경구절이나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라는 성경구절을 장사나 사업을 하는 곳에 써 붙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성경구절이 장사하는 곳에 써 붙이라는 말씀이냐? 본 절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기도를 한 것일까? 1. 세상의 사업을 창대케 해서 육신의 복을 많이 받게 해 달라는 기도다? 2. 영능의 신앙실력 면에 창대케 해 달라는 기도다? 어느 거냐? 2번이 맞다. 두 번째 기도가 하나님의 의사에 맞는 기도다. 왜 그런가 하니 정신 사상이 땅에 찍힌 자를 고난을 줘서 깨닫게 해서 신앙심을 살려서 진리의 사람으로 끄집어 올려서 창대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예수 믿게 하는 게 무슨 뜻이냐? 교회에서 설교는 왜 하는 거냐? 교인들 호주머니 짜내는 방법이냐? 설교가 ‘물질축복 축복’ 하고 돌아간다면 뭘 짜내는 운동이냐? 호주머니 짜내는 운동이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진리이치로 깨닫게 해서 영특한 자로 만들고자 하는 설교는 봉투작전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당신께 예배를 하라는 것은 우리를 끄집어 올려서 유능한 자로, 실력자로, 존영자로 만들어 주고자 하시는 뜻이 들어있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이 기도는 썩어질 육을 위해 세상에 속한 불에 타질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다. 옳은 기도는 항상 사람에게 들어가 있다. ‘나를 위로하소서.’ 위로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거다. 마음을 기쁘게 해 준다는 것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코미디 쇼를 해서 사람을 웃기는 것만 생각하면 잘못이다.


위로를 해 달라는 것은 그동안 뭔가가 슬펐다는 거다. 그러면 왜 슬펐느냐? 첫째는 갖가지 고난이 많이 오니까 육신이 편할 날이 없어서 고달프고 슬펐던 건가? 두 번째는 신앙을 고수하려다 보니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이 때 아는 실력이 없어서 이기지 못하고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시련을 겪어서 슬펐던 건가? 신앙 때문에 슬프다면 이 사람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느냐?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 주면 위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이 사람에게 위로다.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남이 도와주는 것보다 내가 힘을 쓰고 지혜를 써서 이기면 기분이 더 좋다. 축구시합을 할 때 내가 상대의 골문에 공을 넣었다면 내가 더 기쁠까, 구경을 하는 관중들이 더 기쁠까? 직접 넣은 자기가 더 기쁘다.


22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주의 성도가 주의 성실과 거룩을 찬양하고 있다. 노래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희로애락의 표현인데, 이 표현은 그 사람 속에 든 대로 나온다. 사람이 잘 만들어졌으면 만들어진 대로 그 표현이 나오고, 사람이 안 만들어졌으면 안 만들어진 대로 자기 속에 든 대로 표현이 나온다.


그러면 본 시편의 기자는 뭘 노래하고 있느냐? 주의 성실과 거룩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는 환난과 핍박과 박해 속에서 시련과 연단을 겪으면서 자기가 성실과 거룩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나왔기 때문에 부르는 노래다. 즉 주의 성실과 거룩을 찬양하는 거다. 자기가 주의 성실과 거룩을 모르면 그 면에 대한 찬양을 못한다. 이치가 그렇지 않느냐? 어린아이들이 사탕을 먹으면 달다고 노래를 하느냐, 쓰다고 노래를 하느냐? 달다고 노래를 한다. 그러면 쓴 것을 입에 넣어주면 쓰다고 노래를 하느냐? 쓰다고 울어버린다. 하기야 이것도 표현이다.


‘성실’이 무엇이냐? 일반적으로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 약속을 잘 지키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착실한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다. ‘주의 성실’이란 인간기준, 세상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에 맞는 사람으로, 질적 본질적으로 인격적 성품적으로 하나님처럼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 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으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 성품, 그 인격, 그 마음이 신령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요소다. 하나님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니 하나님의 것과 같은 성품을 입은 사람도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거다. 이게 얼마나 고상하냐?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적으로도 성실한 사람이 안 됐다면 언제 질적 차원적으로 주의 성실로 올라갈까? 캄캄하다.


사람이 일반적인 성실한 사람이 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 신앙 면에서도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야 지켜야 될 일인지 안 지켜야 될 일인지 구별 분별을 해서 힘을 다해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의 성실은 자기의 목숨을 내대고 지키는 거다. 그러나 세상의 성실은 목숨을 내대고 지킬 성실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에게 이용당하고 죽을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는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존재적으로 분리시켜서 광야로 나오게 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지만 여전히 애굽의 생활과 풍속과 습관이 들어 있으니 애굽의 이 때 국물을 빼내기 위해 시내산에서 광야교회에게 말씀을 집어넣는 거다. 그러니까 먼저는 존재적 분리를 시켜놓고, 그 다음에 광야에서 시내산의 말씀으로 교육을 시키면서 애굽의 성질을 빼내면, 즉 세상 이방풍속 습관의 성질 성격을 빼내면 배우는 말씀으로 인해 영적인 기능과 지능이 실력적으로 신령한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렇게 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세상에 감염이 되지 않는다. 어디에 갖다 놓아도 그곳을 진리로 정복해 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성, 진리, 아가페를 가지고 정복이 들어간다. 이것은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정복이요 영원히 살리는 정복이다. 이게 기독교 복음운동이다.


담배 피는 사람을 담배를 끊게 하려면 노름방 같은 곳에 데리고 가서 끊게 하면 되겠느냐? 안 된다. 먼저 사람을 담배를 피우게 되는 곳에서 분리를 해야 한다. 그 다음에 교육이나 훈련으로 담배를 피울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을 땅에 처박는 세상을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고쳐지고 만들어지느냐? 안 된다. 이건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구덩이에 눕는 것과 같다. 헛 노력이 된다. 먼저는 세상을 가르치는 교회에서 나와야 한다. 교훈에 있어서 이런 면을 지혜롭게 생각을 해야 한다.


주의 거룩성으로 만들어진 자는 주의 거룩을 찬양하게 된다. 왜냐? 거룩이 뭔지 알기 때문이다. 고향을 모르는 사람은 고향노래를 모른다. 고향노래를 부를지라도 진하게 다가오지를 않는다. 6. 25를 겪지 않은 사람은 6. 25 노래를 불러도 진하게 다가오지를 않는다. 자기가 직접 겪지 않으면 하나의 소리로 듣는 지식밖에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말로 해서 못 알아들으면 천상 직접 겪게 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도 일종의 교육의 방법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불행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거나 행복한 사람의 행복을 더 연장시켜 주느냐?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하실 때 인간들처럼 사람의 형편을 보지를 않는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이 사정없이 지나가듯이 인간의 형편이 어떻건 우리의 구원을 설정한 그대로 자기에게 밀고 나간다. 이런 주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인간 자기의 일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아느냐, 자기를 온전케 해 주시려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부족한 면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 주려고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붙잡고 오시는 주님으로 알고 있느냐?


주님께서 성도의 구원을 위해 세상만사를 돌리시는데, 자기는 이런 세상에 살면서 성실과 거룩으로 만들어져 나오느냐, 아니면 쓸모없는 인간, 고약한 인간으로 만들어져 나오느냐? 이것에 따라 노래가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노래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건 환경 속에서 잘 깨달은 사람은 마음이 부드럽다. 그리고 지혜가 있기 때문에 자라나는 젊은이들이 바로 살 수 있도록 지도를 할 수 있다. 반대로 노래가 없는 사람은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짜증만 부린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뭘 가르치겠느냐? 무슨 대화가 되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영원을 깨닫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22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노래를 할 때는 악기가 동원되기 마련이다. 악기가 없으면 냄비뚜껑이라도 두드린다. 짐승들은 즐거워도 뭘 두드리는 것은 없다.


주의 성실을 체험한 사람은 입으로 주를 찬양하고 악기로 주를 찬양하는데, 이 사람이 악기를 가지고 자기 마음을 손끝에 담아서 줄을 튕길 때 영감의 느낌에 따라 장단이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고, 가락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음폭이 두꺼워지기도 하고 얇아지기도 하고, 음질이 진해지기도 하고 엷어지기도 한다.


마음에 따라, 느낌에 따라 손끝이 춤을 추는데,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고, 격해지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고,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한다. 마음의 감화가 손끝에 전달이 되어서 줄을 튕기다 보면 자기 마음이 악기소리에 도취가 되어서 마음이 악기가 된 건지, 악기가 마음이 된 건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되어서 입과 손끝으로 찬양을 한다.


고통과 눈물의 세월 속에서 진리를 붙잡고 이겨 나온 세월 동안에 주님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이어지고, 멀어질 듯 멀어질 듯 하면서 더 가까워지고 한 삶의 여정을 손끝에 담아서 줄을 튕길 때 그 영감의 감화성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섬세한지? 이렇게 나오는 찬양이 얼마나 아름다운 찬양이겠느냐?


피아노를 칠 때 어떤 사람은 악보대로 잘 치는데도 소리가 짜증나게 들린다. 그런데 포도원제일교회의 공부시간(주-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공부 모임)에 kbs악단이던 심OO목사가 나왔었는데, 이 분이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고 내가 홀딱 반해버렸다. 피아노를 치는 손끝을 보면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 가락과 함께 음폭의 강함과 약함이 아주 섬세하게 움직여서 정말 아름답다.


악기를 잘 다루면 소리가 아주 좋은데, 사람의 목소리 역시 참으로 아름답다. 악기 중에 사람의 목소리가 제일 좋은 악기다. 사람의 목소리는 모든 소리를 다 낼 수 있다. 새소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때 뿐이다. 우리교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어떤 악기든지 연주하면서 찬양을 하면 좋다. 노래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감격을 일으킨다. 좋은 노래는 그 고운 음색에 듣는 사람의 마음이 빨려 들어간다. 사람의 목소리가 어찌 그리 맑고 아름다운지? 신의 선물이다. 흑인영가를 들으면 천국을 소원하며 노예생활의 고통을 이겨내는 마음이 어려 있다.


진리정신을 담아서 악기를 연주하면 무엇이 나가는지 아느냐? 귀신이 나간다. 다윗이 악신이 들린 사울 왕 앞에서 진리정신을 담아서 악기를 연주할 때 사울 왕에게 들어간 악신이 나갔다. 진리정신으로 악기를 연주하면 악신이 나가고, 육적인 정신으로 악기를 연주하면 미친 귀신이 들어온다. 이걸 알아라. 악기를 연주하는 자체는 좋은 거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다.


주를 찬양하는 데는 조용한 악기가 좋다. 왜냐하면 시끄럽게 연주를 하면 듣는 사람이 마음 속에서 감화 감동성이 적다. 좋은 노래나 연주를 듣고 속에서 감화 감동을 입은 후에 신이 나서 춤이 나온다면 좋은 거지만 춤을 추게 해서 마음이 즐거워지게 하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거다. 주를 찬양하는 노래는 마음 속에 끓어 나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