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72::16-17)

열려라 에바다 2026. 2. 17. 15:02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궁극이추천 1조회 3926.02.15 08:44댓글 0

 

72편 16절-17절: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보면, 첫 번째는 진리지식이 있는데, 이 지식은 성경지식이요 하나님의 지식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사성, 하나님의 가치판단, 하나님의 이해타산, 하나님의 평가성,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성 전부는 하나님의 것이요, 위의 것이요, 하늘의 것이요, 신령한 것이요, 영원히 가는 거다. 두 번째는 일반 종교적인 지식이 있고, 세 번째는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은 데서 나온 타락된 세상지식이 있다. 성경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은 타락적인 세상지식을 가지고 산다. 이 세상지식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을 쫒는다. 이런 사람은 영이 중생하지 못한 상태요, 이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사람이 되고, 사망 아래 사는 거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나 설교를 들을 때 위에서 말한 세 자기 지식 중에 어느 지식을 기준으로 성경을 인용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 지식구별이 없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중심이 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 분석하고 이해타산 가치판단을 따지게 되면 세상적, 물질적, 가견적인 현상세계의 것에 성경구절을 둘러씌워서 말을 하게 되니, 이것은 진리지식이 아니라 두 번째에 속하는 일반적 종교적 지식이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두 번째의 지식을 따라 움직이게 되면 자기의 몸은 악의 병기가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식이 주격이 되어서 이 지식을 따라 행동하고 활동을 하면 자기의 몸은 의의 병기가 된다. 하나님의 지식이 주격이 되어서 자기의 육신을 활용하고 이용을 하면 여기에 쓰이는 것마다 전부는 생명계로, 영생계로 들어간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된다 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두 번째의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들고 아무리 종교적인 활동을 열심히 해도 이것은 종교적인 세상지식이기 때문에 하나의 종교적 건설이요 종교적 사업일 뿐 성령의 활동이 아니다. 이건 이방종교와 같은 개념으로 예수를 믿는 거다. 원리가 그렇다. 그래서 지식이 매우 중요한 거다.

 

성도가 첫 번째의 지식을 기준으로 하고 지혜지식적인 면이나, 도덕성적인 면이나, 능력성적인 면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붙들고 환경이나 존재를 통해 역사가 되어나가는데,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지식을 가지고 아무리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할지라도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인 건설이요 종교적인 사업일 뿐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생명과인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영생의 말씀을 들으면 모든 가치판단 평가성이 영생적으로 되어지는 건데 두 번째의 지식으로 예수를 믿게 되면 아무리 말씀을 들을 지라도 그 정신 사상은 땅의 것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신앙은 첫 번째의 신앙과 모양새만 같을 뿐 속 중심은 세상 판이다.

 

마귀는 세 번째 사람에게서는 수입이 없다. 타 종교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를 믿으니까 영은 중생이 된 것이니 마귀가 이 사람에게서는 수입을 볼 수 있다. 이 두 번째의 사람은 현재적으로 어떻게 예수를 믿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속 중심의 사고방식은 세상성이고, 지식의 성장적인 면에서는, 믿음의 성장적인 면에서는 자라지를 못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최고의 교사인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니 천국의 대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세상지식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신학을 하고 오랫동안 믿었을지라도 그 속에 든 성격과 신앙의 성질은 완전히 세상이다. 이 둘은 질이 다르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지식의 출처가 다르다. 하나는 하늘이요, 하나는 땅이다. 땅의 지식은 하늘을 쳐다보지만 하늘의 지식은 땅을 내려다본다. 나는 어느 신앙의 지식을 가졌느냐?

 

사람은 옳은 지식이 들어가면 옳은 사람이 되고, 비뚤어진 지식이 들어가면 비뚤어진 사람이 되는데, 신앙 면에서도 신앙의 지식이 비뚤어져 있으면 이 사람의 신앙은 항상 비뚤어져 있다. 목사가 비뚤어진 지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면 어찌 되겠느냐? :에서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말씀을 굳게 잡고 있으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너희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라고 하셨다. 진리말씀으로 무장한 성도가 악의 세력을 때려 부숴도 악한 자들이 덤벼들 수 없다. 교훈적으로 말하면 이치가 옳기 때문에 반박을 하지 못한다. 악한 세력을 때려 부수는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다.

 

지금 시대적으로 유형교회가 많으니까 천국이 오는 것 같으냐? 아니다. 주님께서는 말세에 거짓 종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세지말인 지금 별별스런 목사가 다 나오고 별별스런 교회가 다 나오고 있다. 가짜가 횡행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성도들은 먼저는 교회들이 어떤 지식을 기준으로 신앙을 하고 있는지 분별을 하고, 그 다음에 교인들이 어떤 감화로 살고 있는지 영을 분별을 하라.

 

우리는 성경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지식적 차원으로 올라가려고 애를 쓰고, 그 다음에는 판단 분석을 해서 진리를 쫓아가다 보면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현재적으로 생명적 지식을 따라가거나 사망적 지식을 따라가게 되면 미래에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는 현재의 신앙 믿음에서 결정이 되는 거다. 그래서 미래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타나게 하려면 현재적으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지식 면에서도 사망적인 지식이 생명적인 지식에게 삼킨바 되고, 모든 면에서 예수님에게 삼킨바 되어야 예수님을 닮는다. 성도 속의 세상의 것이 예수님에게 삼킨바가 되면 성화가 된다.

 

하나님께서 왜 심판을 하시는 거냐? 교회에 안 다녔기 때문에 심판을 하느냐? 그게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자녀냐? 그렇다면 네가 누굴 닮았느냐? 성품적으로 누굴 닮았느냐?’ 하는 것으로 심판을 하신다.

 

16: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이 용어를 들고 신앙 사상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 하는 것을 모르면 이 말씀이 해석이 안 된다.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산꼭대기의 땅에 어떻게 농사를 짓겠느냐? 일반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비가 오면 아래로 물이 흘러버리고, 햇볕이 나면 땅과 곡식이 말라버린다. 영적인 뜻으로 보면 산꼭대기란 교만한 사람, 또는 지도자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의 말씀을 영접하니 곡식이 풍성해지듯이 그 지도자의 머릿속에서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지혜지식이 곡식처럼 풍성하게 나온다는 거다.

 

그 열매가 레바논같이 흔들리며.’ 레바논에는 백향목 나무가 많은데, 바람이 불 때 이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은 말씀으로 변화된 지도자의 활동상을 말한다. 영능의 실력으로 나타나는 활동들을 말한다.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하나님의 생명권 안에 있는 자들이, (라인) 안에 있는 자들이 백성들에게 진리통치를 하니 이 관할권 안에 있는 자들의 신앙이 잘 번성한다는 말이다.

 

스바여왕이 솔로몬이 통치하는 나라에 와서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감탄을 하며 따르는 신하들을 보고 복이 있다고 한 것은 솔로몬의 수준 높은 지혜를 말한다. 생명권 안에 있는 자들이 진리통치를 하면 이 관할권 안에 있는 자들은 신앙이 번성한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일반이치로도 좋은 학교란 건물이 좋아야 좋은 학교냐, 선생님들의 실력이 좋아야 좋은 학교냐? 우리는 진짜를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차원 높은 진리성도는 진리이치로 연결, 도덕이치로 연결, 생명이치로 연결, 성장이치로 연결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연결이 된 이 모든 이치가 확장이 된다. 성장만 되는 게 아니라 연결이 된 것이 확장도 된다. 이렇게 연관이 되는 확장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종적인 면을 제외하면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횡적 확장은 잘 가지는데, 인인관계 연관관계성은 잘 가지는데 종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로다. 대신관계를 끊어놓은 채 대인관계를 열심히 가지고 있다.

 

대나무나 아카시아 나무는 나무의 줄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뿌리에서 뿌리로 확장이 잘 된다. 이런 것을 보면서 교육 면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데, 수학에서 답만 알면 되느냐, 답을 낼 수 있는 이치를 알면 어느 문제든 풀 수 있느냐? 이치를 알면 답은 쉽게 풀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신앙사상이 이치로 연결이 되면 성장이 빠르다. 이게 아닌 어림잡는 신앙, 적당주의 신앙은 자기 꾀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이치가 아니거든 버려라.

 

신앙의 이치가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시니 지식 면도 공의롭고, 지혜 면도 공의롭고, 도덕성도 공의롭다. 절대 공의로운 것은 절대적이다. 이걸 기준으로 하고, 그 다음에 인간적인 정서 면이나 생활 면 등은 자타의 구원에 활용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근본적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상대는 영적인 뜻을 가지고 사는데 눈에 보이는 면이 일반사람들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이는 일을 당하게 되면 신앙이 나쁘기 때문에 당하는 거라고 한다. 사람을 이렇게 보는 것은 비뚤어진 눈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믿는 사람을 몽둥이나 전쟁 등으로 내려치는 일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그럼에도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다 보니 이치는 없고 제 마음대로 말을 하게 되는 거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신앙은 어림잡는 게 아니라 명확한 진리이치적인 지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거다. 그래야 생각 속에 빈틈이나 허점이 없어진다. 사단 마귀가 끼어 들 수 있는 허점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뱀은 구멍만 있으면 기어 들어간다. 우리의 신앙 면에도 허점만 생기면 마귀가 들어온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인데, 이 지식은 다양하게 적용이 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이 사건을 만나면 이런 지식을 가져라. 이런 환경을 만나면 이런 지식을 가져라 하고 가르치는데, 이건 절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옳다는 말이다. 믿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구석구석마다 구비구비마다 부분부분마다 옳은 지식을 못 가지면 하나의 인간의 감정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게 뭐냐? 성경을 통해 인간 자기에게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말씀하시고, 선지사도를 보내서 당신의 마음을 다 말씀을 하셨으니 왜 그렇게 하셨는지?’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하나님을 아는 거다. 성경 속에 있는 역사적 사건만 알면 소용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어떤 마음으로 일으키셨나?’ 하는 그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식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자식이 많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 안 된다.

 

인간은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해서 좋은 것을 가지되 최고로 좋은 것을 가져라. 모르면 바보가 된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대화가 안 된다. 모르면 고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쳐다보고 빨리 고치는 자가 빨리 성장을 한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살펴보고 빨리 고쳐야 한다. 진리지식을 받고 소원성이 고쳐져 나가야 한다.

 

17: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영구하다는 것은 시간적인 개념으로 오래 간다는 것이고, 해와 같이 장구한다는 것은 존귀적 영광의 장구성을 말한다. 사람이 오래 산다면 오래 사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장구성이란 그냥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존귀 영광자로 오래 오래 영원히 라는 말이다. :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 영광자로 영원히 이름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자기는 무슨 일을 한 어떤 이력이 영구할까? 영원히 갈까? 믿는 사람은 이 면을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에서 뭘 해서 부자로 살고 이런 것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내 이름이 영구히 갈까?’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일반세상에서도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하면 그 사람의 동상을 세우고 자자손손 기념을 한다. 삼일운동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정부에서 돈을 준다. 이건 옳은 거다. 6. 25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을 국가에서 위해주는 것도 일반 계시적으로 옳은 거다.

 

이게 우리에게 뭘 보여주는 거냐? 땅의 것을 위해 이름을 날렸다면 땅이 있는 동안에 기념적으로 자기 이름이 남을 것이고, 천국을 위해 이름을 남겼다면 천국이 없어지지 않는 한 신령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천국에서 어떤 사람을 붙들고 기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이룰구원 차원에서 영능의 실력을 말하는 거다. 그렇다면 자기의 이름을 어디에 어떻게 남기고 싶으냐?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서 남기고 싶으냐?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라.’ 해는 밝음이고, 뜨거움이고, 생산적이고, 영광이고, 빛남이다. 해는 어둠을 물리치고 높이 솟아오르듯이 주의 복음은 변질 없이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영원히 빛난다. :에 보면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피로 당신의 백성을 사시고 제사장을 만드시고 라고 하면서 주님을 하는 찬송하는 게 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나는 내 이름을 어디에서 빛나게 할 거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다 빛을 남기고 죽어야 한다.

 

오늘날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변질이 없는 복음을 전하느냐? 목사님들은 자기가 전하는 것을 구별 분별해서 말 한 마디로 인해 교인들의 신앙심령이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 믿고 이 땅에서 복 많이 받아라 라고 하면 세상적인 교인들이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이런 교훈을 받으면 사람의 정신이 세상으로 향한다. 그러니 나쁜 말이다.

 

예수님께서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사셨는데, 세상의 명절이나, 이스라엘의 명절에 이웃사람을 만나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했겠느냐?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까? 이게 매우 중요하다. 목사의 말 한 마디에 교인들의 마음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이게 무서운 거다. 사람을 말로 교훈으로 통째로 망하게 할 수도 있다.

 

자기가 전하는 것이 질적 본질적으로 천국에까지 그대로 직통이 되는 것인지? 성도들이 자기의 말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부활을 통과해서 영원히 존귀케 되는 참 복음이 확실한 것인지? 자기 교훈을 받은 성도들이 영원 궁극적인 결과를 염두에 두고 생각이 천국으로 향하는 건지, 아니면 세상으로 향하는 건지?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부자가 되겠다고 목사가 되려는 것은 도둑이다. 목사는 가난과 부요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종은 가난과 부요와 관계가 없다. 종은 주인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되고 주인이 하라는 대로 순종만 하면 된다. 이게 종의 자세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목사들이 그렇더냐? 신유은사 주의로 나가는 그 자체가 복음이냐? 병 낫게 하고 예언하고 방언하고 입신하는 그 자체가 신앙이냐? 신령천국에 가면 진리 자체화, 진리 실상화 된 자들만 있지 병고치고 예언 방언하는 자들은 없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특수은총의 복과 자연은총의 복 모두는 그로 말미암아 받는다. 특수은총의 복은 영능의 실력화 된 복, 그리고 천국에서 누릴 복이다. 그러면 뭐가 세상에서 참 복이냐? 돈이 많은 거냐? 아니다. 참 복은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어진 거다. 자기 속이 세상성으로 차여 있으면 그것이 그만큼 자기에게 고통으로 작용을 한다. 특수은총의 복은 영능의 실력화 된 복으로 천국에서 누릴 복이다. 이 특수은총의 복을 위해 세상만물을 만들어서 당신의 백성들이 사용하고 활용하게 한 것이다. 이건 일반 자연은총의 복이다.

 

신령천국은 하나님의 성격 성질에 좋도록 되어 있다. 하늘나라의 노래도 하나님의 귀에 듣기 좋도록 되어 있다. 타락된 자기 귀에 듣기 좋게 된 게 아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온전히 적응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살 동안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물질의 활용적인 복도 가감이 된다.

 

참 복은 하나님의 온전한 실상으로 만들어지는 거고, 이 실상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자기의 참 복이요 참 실상이다. 현재 육신의 몸은 껍데기다. 껍데기는 시간이 가면 쪼그라진다. 참 복은 하나님의 온전한 실상에 있고, 덤으로 받는 복은 물질의 사용성에 있다. 이방인들의 물질의 복도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실상을 닮게 하는 자극제로 쓰는 거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잘나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성도들의 덕으로 사는 거다. 세상의 주격을 알아야 한다. 성도가 없으면 세상은 불로 태워버린다. 휴거가 되면 세상은 불로 태워버린다. 성도가 있는 한 불로 안 태운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성도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물질을 바르게 활용을 못하는 자는 실상적인 복을 받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물질을 아끼느라고 학교에 안 다닌다면 이 사람은 아는 면에 실력이 없다. 우리가 자기의 참 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고 물질을 바로 사용하다 보면 참 복을 더 받을 수도 있다. 있는 자는 자꾸 더 받는다.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신정정치, 지혜의 정치는 백성들을 말씀으로 진리 실상화 되는 부자로 만들어 놓는다. 천국의 부자로 만들어 놓는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는 부자다 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아이고, 가련하고, 헐벗었고, 눈이 멀었고, 모든 병자는 다 모였구나 이렇게 보셨다. 우리는 실상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은 실상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방인들이 솔로몬 왕을 지혜의 왕이요 복된 왕이라고 하며 부러워하고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원하면서도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신앙심은 멀리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줄 리가 없다.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무엇을 보고 복되다고 하는 건지? 사람의 속을 보고 복되다고 하는 건지? 개는 개를 알아보고, 돼지는 돼지를 알아본다. 그러면 누가 주님을 잘 알아보느냐?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주님을 다 잘 알아보더냐? 신유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주님을 잘 알아보느냐? 예언 방언을 한다고 해서 주님을 잘 알아보느냐? 바리새인들은 종교생활을 철두철미하게 했고, 율법사와 서기관들은 성경박사들인데 이들이 주님을 잘 알아봤느냐? 이들은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를 했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를 죽여 버렸다. 자기의 복된 주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의 복덩어리를 죽였다.

 

그러면 누가 주님을 복되다고 알아보느냐? 복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람을 알아본다.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진리의 성도가 복이 되는 주님을 알아보는 거고, 주님 역시 그 성도를 알아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