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77:1-13)

열려라 에바다 2026. 7. 7. 16:35

77편 1절-13절.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궁극이추천 1조회 4226.07.05 08:24댓글 0

 

1절-13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1절-2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환난’에는 가견적인 환난과 영적인 환난이 있는데, 가견적인 환난과 영적인 면의 환난이 중복적으로 왔을 때 예수 믿는 자기는 어느 면을 위해 기도를 하겠느냐? 마음이 어느 쪽으로 쏠려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기도를 하겠느냐? 이게 아주 중요하다.

 

말씀을 붙잡고 살겠다고 하는 진리성도에게 가견적인 환난이 없어서 육신생활은 무난한데 진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영적인 환난이다. 쉽게 말하자면 가견적 유형적으로 부흥이 되는 교회는 많지만 어느 교회에서도, 어디에서도 진리말씀을 전하는 진리의 종들을 찾기 어려운 것이 영적인 환난이다. 이 영적인 환난은 개인적인 환난이 있고 기독교 전체적인 환난이 있는데, 자기가 물질적으로 아무리 잘 살지라도 진리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서도 이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면 이는 환난에 접어든 거다. 이렇게 되면 눈에 보이는 환난이 금방 찾아온다. 왜냐? 영적인 환난을 모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 육적인 환난을 주시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적으로 볼 때 진리의 옳은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을 때는 주님 오실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 이럴 때 자기는 어느 환난을 더 진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자기에게 영적인 환난이 왔음을 가르쳐 줘도 깊이 느낄 줄 모른 채 육적인 면을 위해 기도를 하다가는 영적인 면은 메마르고, 머리는 둔해지고 녹슬어 버린다.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밤’이라고 하면 시간적인 밤이 있고 시대적인 밤이 있는데, 신앙 면에서 시대적 전체적인 밤이란 선지자가 없는 시대요, 옳은 종이 없는 시대다. 그리고 신앙사상 면에서 개인적인 밤이란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막막하고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다.

 

시간적인 캄캄한 밤에 등불도 안 가지고 불빛이 전혀 없는 곳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느냐? 자기의 움직임을 남이 못 보게 하려는 사람은 등불이 없이 캄캄한 곳으로 간다. 일반적 시대적인 밤에는 사회질서가 세워져 있지 않거나 정화되는 성질이 없고 여기저기서 무리들의 폭동이 일어난다. 영적으로 시대적인 밤은 선지자가 없고 비진리가 진리인 것처럼 교주노릇을 하며 교권을 부리는 세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물질적으로 아무리 잘 살지라도 세상을 따라다니고 세상을 목적하며 사는 것은 개인적인 환난이고, 어두운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눈으로 보이는 고통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밤에 목적지를 향해 가려면 불을 들고 다녀야 한다. 밤에 불빛이 없이 다니면 자기만 답답하고 걸려 넘어진다. 개인적인 환난의 밤이던 시대적인 환난의 밤이던 믿는 우리는 주를 찾고 별을 찾아야 한다. 기독자가 진리의 빛을, 말씀의 빛을, 생명의 빛을 버리고 다니면 자기는 암흑세상이 된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아삽이 환난의 밤에 연속적으로 기도를 하는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삽이 영적인 면을 위한 자신의 기도에 응답을 바라는 마음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거다. 영적인 면의 위로는 주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위로가 오는 길은 없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위로가 안 오면 위로를 받을 길이 없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모든 위로는 잠깐이고, 이 위로가 끝나면 또 슬픔이 찾아오고, 이런 위로를 자꾸 기대하면 자꾸 거기에 빠진다.

 

3절-4절: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불안하고, 걱정 근심이 많고, 마음이 상한데 잠이 오겠느냐? 사람이 어떤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자기의 재산이 다 날아가 버리게 생겼을 때 잠이 안 온다. 누구와 다투었을 때 원통해서 잠이 안 온다. 사람의 목숨이 위급해질 때 잠이 안 온다.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명과 재산에 피해가 났을 때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잠이 안 온다.

 

예수 믿는 사람의 경우에는 별별 생각이 더 날 거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내가 교회에 나오는 날을 빼먹어서인가? 십일조를 떼먹고 딴 데 써서 그런가? 나는 회개를 한다고 했으나 아직 회개가 안 돼서인가? 성경을 안 봐서인가? 누구에게 미운 마음을 가져서인가?’ 이런 등등의 생각을 한다.

 

우리 믿는 사람은 어떤 일로 해서 근심과 걱정과 고통이 왔을 때 성경을 놓고 자기를 살펴야 옳은 것인데 이게 아닌 자기가 한 일 안 한 일 등의 일을 놓고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 해 준다고 원망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원망한 것이 양심에 찔려서 하나님께 미안해하기도 하고, 이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등 일과 사건과 세상 것으로 인해 마음이 요동을 치면 이 사람은 골치가 아프다. 그러면 아삽도 과연 이렇게 생각을 해서 속이 상하고 불안한 거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거냐?

 

5절: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아삽은 현재적인 환난을 겪으면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했는가?’ 하는 것을 성경을 보고 생각을 한다. 환난 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면 이 이상 좋은 것이 없다. 자기의 어떤 행동에 기준을 두고 ‘잘 했네. 잘못 했네’ 하면 회개가 안 된다. 말씀을 붙잡은 상태에서 고쳐져야 바른 회개가 된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 무엇을 붙잡고 기도를 했느냐? 주님이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라고 하는 그 말씀 그 예언을 붙잡고 회개를 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말씀을 붙잡고 자살한 게 아니라 인간적인 자기의 양심을 붙잡고 괴로워서 자살을 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을 하니 양심이 그렇게 괴로운 거다.

 

예수님이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 속히 네가 할 일을 하라’는 등등의 말씀을 하실 때 가룟유다가 ‘아, 이 말씀이 나를 고치라고 하는 말씀이구나’ 하고 이 말씀을 붙잡았다면 회개가 되어서 예수님을 팔아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살을 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이것은 생각지 않고 뜰 안에서 주님이 고초당하는 것을 보니 자기 양심이 괴로워서 목매달아 죽은 거다. 이건 회개가 아니라 후회일 뿐이다. 말씀이 생각이 나서 말씀으로 들어가서 회개를 한다면 이것 이상 좋은 것이 없다. 이걸 모르면 기도원에 가서 목이 쉬도록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6절-9절: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이 말씀을 보면 아삽이 하나님의 언약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도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하나님께서 신령천국을 누구에게 주려고 인간을 만드신 거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중에 우리 모두 내가 들어 있었는데 왜 나를 잊으시겠느냐? 나를 잊으셨다면 하나님이 아니다.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인생들을 일반은혜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또한 산천초목이나 동물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일반은혜를 주셨는데, 특히 믿는 우리들에게는 기본구원의 특수은혜를 입혀주신 것은 앞으로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성령님의 보증이다. 그래서 ‘다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하며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인자하심이란 하나님의 사랑하심인데, 하나님은 무한 자비하시고 그 사랑도 무한이시다. 이는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는 한 하나님의 인자가 무한히 있다는 증거다. 역사가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다. 인간 자기의 자연생명을 아직까지 거두어 가지 않은 것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다는 증거다.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인간 자기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또 받을 수 있다는 증거다.

 

여기 기도하는 자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라는 등등의 말을 하는데,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 자기 보기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사랑을 안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깨닫게 해 주시는 사랑의 연속임을 말해주는 거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하나님에게 치매가 와서 잊었겠느냐? 지상에 워낙 사람이 많다보니 인간 자기 하나쯤은 잊을 수 있는 거냐? 하나님께서는 워낙 잘난 사람을 날마다 만나니까 이런 사람은 잊지를 않지만 볼품이 없는 사람은 금방 잊으실까? 수천 년의 인류의 개인정보를 하나하나 취급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 하나쯤은 빠뜨릴 수 있을까? 우주 삼라만상을 다 관리 운영을 하다 보면 인간 자기 하나쯤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이해를 해 드려야지? 안 그러냐?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다가 가만 생각을 해 보니 그 전에 회개를 안 하고 얼렁뚱땅 지나간 게 있어서 그만 그것 때문에 노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사랑과 미움이 서로 싸우다가 사랑이 이기면 긍휼이 나오고,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미움이 나오면 그만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솟구치는 거냐? 인간 자기마음처럼 하나님의 마음도 그런 거냐? 하나님은 인간 자기의 속마음을 다 감찰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을 늘 말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고 있지 않느냐?

 

10절-11절: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인간이 안다면 무엇을 얼마나 알겠느냐?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느냐? 자기가 세상에 왜 나왔는지? 세상에 있으면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왜 자기를 인격을 가진 자로 만들었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현재 자기 앞에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느냐? 인간 자기가 안다면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똑똑하다고 하며 날 뛸 수 있느냐? 몇 분 몇 초 후에 자기에게 일어날 일도 모르는데 미래적으로 무엇을 안다고 장담을 하며 큰소리를 칠 수 있느냐? 니고데모는 모세 때부터 1,500년 이상을 기다려 온 메시아를 자기 앞에 두고 같이 대화를 하면서도 못 알아보았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냐?

 

인간을 만드시고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산다고 할 게 아무 것도 없다. 밥 먹고 일하는 것만 안다면 이건 짐승만도 못하다. 짐승은 농사를 안 짓고도 잘 먹고 산다.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게 인간으로 안다면 이건 짐승만도 못한 거다.

 

성도가 환난과 핍박을 받거나 시련과 연단을 받을 때 우리에게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당신의 마음을 기록한 성경이 아니고는 알 길이 없다. 그 역사를 자기에게 왜 들고 왔는지, 왜 지나가게 하는지 그 마음을 알 길이 없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금식기도를 할지라도 알 수가 없다. 성경 66권을 떠나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라.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사건과 상황적으로 항상 우리에게 와서 가르쳐 주려고 하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 날마다 나에게 있다. 성령님께서 항상 역사를 하신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여호와의 옛적 기사는 성경에 있다. 연약한 우리 인간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잘 깨달아서 자기 것으로 삼으면 사람이 강해진다. 여호와의 기사가 기록된 성경은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살아서 역사하는 사람을 살리는 역사와 강해지는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다.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가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강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온전이라는 말에는 신적인 지혜지식성, 신적인 도덕성, 신적인 능력성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으면 옳고 바르고 정직하고 지혜롭게 되니 이 사람은 강할 수밖에 없는 거다. 자동적으로 강해진다. 이와 같이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만드는 것은 여호와의 행하심의 진술이다. 즉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진술이다. 성경에 그렇게 써 놓았다는 거다.

 

진술의 내용에 있어서 기사의 표면만이 아니라 표면적인 것은 하나의 방편이고 이 표면 속에 자기를 강하게 하는 심오한 영적인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성경의 이적 기사의 진술 속에는 오늘날 자기도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 들어 있는 거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강하게 해 주겠다는 거다.

 

그러면 무엇이 강한 거냐? 우리 인간은 아무 힘이 없고, 맥이 없고, 정신을 한 번 살짝 건드려 놓으면 쓰러진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는 이런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고, 우리가 그 분을 향해 가질 마음도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가지지 않고 버리고 있다면 어떻게 강해질 수 있겠느냐? 내가 가져야 할 강한 것이 이적 기사 속에 없다면 그런 것이 나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다.

 

12절: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왜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고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을 하느냐? 그럼으로써 유익한 점이 있느냐? 우리가 성경의 모든 사건들을 생각할수록 성령의 감화 감동이 오고 하나님과 친해진다. 하나님과 친해지면 진리이치에 밝은 사람이 되고 영능의 실력화 되니 영원히 존영자가 된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왜 만들었을까? 물질계의 모든 존재와 자연법칙과 인간들의 문물의 발전과 세상의 끝을 왜 정해놨을까? 한 개인에게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왜 교체가 될까? 세상에 왜 선과 악이 공존을 할까? 인간에게는 왜 영혼이 있는 것인가? 유황불못은 왜 만들었을까? 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애굽에서 빼내서 광야로 인도해서 40년간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렸을까? 국가나 단체나 개인이나 세계를 들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심일까? 하나님의 행사를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면 신령한 이치의 보화가 무한히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캐는 자의 소유가 된다.

 

지금 굉장한 개발과 발명이 되었는데, 이게 언제까지 가겠느냐? 자기가 이것을 영원히 누리겠느냐? 아니다. 이것 때문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고, 자기에게 앙화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의 이치를 깊이 아는 사람은 복된 자요, 인간 위의 인간이요, 세상에는 이런 인간이 없다. 이 사람은 신령한 이치를 무진장 가진 인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찾으신다.

 

목회를 하려면 무진장의 보화를 가지고 이것을 전해줘야지 그냥 사람을 많이 모아놓고 떠드는 게 아니다. 수만 명이 모였더라도 깨달음의 차원이 세상 판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쓰레기다. 우리는 예수 믿는 값어치를 톡톡히 해야 한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처럼 고작해야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충성봉사를 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충성봉사가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에는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가 전폭으로 들어가는 거다. 일상생활, 사람 관계, 일 관계, 사건 관계가 다 들어 있다. 달랑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마음은 없고 세상 타락되고 속화된 정신을 가지고 인간 자기의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을 이루려고 성경을 이용하는 자가 많다. 우리는 자기 속에 절대로 세상적인 무엇을 세워놓지 말아라. 자기 속에 뭘 세워놓고 그 위주로 자꾸 하려다가는 네 스스로 속는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리 저리 돌리면 너는 넘어진다. 그럼에도 뭘 기준을 세워놓고 뭘 세우는 거냐? 말씀을 자체화 시키면서 말씀이 자기를 끌어가도록 해야 한다. 내가 말씀을 붙잡고 자체화 되면서 나가면 말씀이 나를 끌고 간다. 인도자는 이것밖에 없다. 스스로 속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기사를 진술할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기사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전할 수 있겠느냐? 귀신이 속삭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사라고 전할 수 있겠느냐? 세상적인 종교사업을 한 것을 하나님의 행사라고 전할 수 있겠느냐? 개인적인 체험이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인가? 개인적인 체험이 예수 바로 믿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인가? 개인적인 체험이 먼저 목사가 된 후에 성경을 배우라는 뜻인가?

 

목사가 되려면 목사가 되기 전에 성경부터 바로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뜻을 모른 상태에서 목사가 되었다면 거짓된 영을 받은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거짓 영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가르치고 전한다. 거짓 영은 미혹의 영이다. 보혜사 성령의 영을 받은 사람은 교만이 꺾이면서 자기가 낮아지면서 진리지식의 사람으로 바로 서는 일을 한다. 자기가 다각적인 면에서 바로 서는 일을 한다.

 

13절: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주의 옳은 말씀을 받다보면 사람이 거룩해진다. 지식적으로 분별이 되어 들어가니 바른 선택을 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분별이 되니 바른 선택을 하게 되고, 능력적으로 분별이 되니 바른 선택을 하게 된다. 주의 도는 거룩하니 주의 도를 받는 사람은 거룩해지고, 거룩해지는 사람은 옳은 선택을 빠르게 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빠르다. 사람이 게으르면 빠르지 못하다. 이러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된다.

 

자기의 말과 함께 행동도 따라가면 더 좋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모든 일에 동참하고 참여하고 모든 행동에 같이 하게 된다. 이러면 사람이 신적 도덕성적으로 높아지니 성격적으로나 성질적으로 고상해진다. 품행적으로나 행동적으로 활동적으로 고상해진다. 주의 거룩한 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진리 인격화로 되지 않았으니 바른 선택이 있을 수 없고, 그만큼 저질적인 상태로 있게 된다.

 

이방 종교인들과 악수를 하는 교회의 인도자들,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는 자들, 신비체험으로 교회를 하겠다고 하는 자들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주의 도를 모르는 자들이요, 사람을 영원히 멸망에 빠뜨리는 거짓 영, 미혹의 영을 받은 자들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이 말을 하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기사를 보고 묵상하고 생각을 해서 주의 도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과 큰 신을 발견한 거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사를 묵상하고 생각해서 큰 신을 바로 찾아야 하는데, 큰 신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어느 게 작은 신이고, 어느 게 큰 신이냐? 하나님의 기사를 모른 채 큰 신을 알아볼 수 있느냐? 알지도 못하면서 큰 신을 전할 수 있다고 보느냐? 거룩성을 입지 않고 큰 신이 무엇을 하는 분이신지 전할 수 있겠느냐? 세상 속화된 미혹의 영을 받은 자들이 거룩한 큰 신을 전할 수 있겠느냐?

 

큰 신의 역사는 사람을 성경으로 깨닫게 해서 신의 성품으로 거룩한 자가 되게 하고,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게 한다. 따라서 전하는 자는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스스로 심사를 해야 한다. 무엇이 큰 신인지, 무엇이 큰 사람인지, 뭐가 큰일인지? 일 중에 큰일은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 속에 하나님의 이 일의 불을 댕기는 게 큰일이다. 이 이상 큰일은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