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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룡 목사의 기독교, 안티에 답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사실이 아니다?

열려라 에바다 2013. 1. 17. 08:29

 

[박명룡 목사의 기독교, 안티에 답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사실이 아니다?

 

안티들의 도전: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동정녀 탄생은 한국의 시조설화와 동일하다.” “동정녀 탄생은 허구다.”

‘처녀(알마)가 잉태하여…’서 ‘처녀’가 ‘아하스왕 새부인’이란 주장은 억지

 


‘알마’ 기혼녀로 쓰인 용례 한군데도 없어


성탄절이 가까워졌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탄절 때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극과 공연을 펼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위에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는 없다’의 저자인 오강남씨와 ‘기독교성서의 이해’를 쓴 도올 김용옥씨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남자와 상관없이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아기가 태어날 수 있는가’를 반문하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허구로 취급한다. 특히 도올은 “기독교인들이 동정녀 탄생설화와 같은 하찮은 복음서 기사의 진실성에 매달리게 되면 진정한 복음의 내용을 망각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

다.

그러면 도올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도올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마태복음 1장 23절에 인용된 동정녀 탄생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도올은 마태가 인용한 이사야 7장 14절의 인용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처녀’는 다름 아닌 아하스 왕의 새 부인을 가리키며, 이사야의 예언은 “아하스 왕의 새 부인이 곧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사야 7장 14절에 쓰인 히브리어의 ‘알마’(alma)는 젊은 여자를 뜻하는 것이지 처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도올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 아니다! 도올의 주장은 매우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 우선 이사야 7장 14절에 쓰인 ‘알마’는 결혼한 여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처녀성을 전제로 한 젊은 여자 또는 젊은 소녀를 가리키는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 7:14) 이 본문에서 분명히 처녀를 나타내는 말로 ‘알마’라는 단어가 쓰였다. ‘알마’는 ‘젊은 여자’(a young woman) 또는 ‘젊은 소녀’(a young girl)를 나타낼 때 쓰이는 히브리말이다.

중요한 점은 구약 성경에서 ‘알마’가 ‘결혼한 여인’을 나타낼 때 사용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힌슨(Edward Hindson)은 “성경에서 사용된 알마는 단 한 번도 결혼한 여자를 가리킨 적이 없으며 항상 미혼의 여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 ‘알마’는 총 7번 사용되었는데, 단 한 번도 ‘결혼한 젊은 여자’를 가리킨 적이 없다.

구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알마’의 모든 용례는 그 문맥 속에서 이미 처녀성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사야 7장 14절도 처녀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도올은 구약에서 사용된 이러한 ‘알마’의 용례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알마’는 처녀가 아니라 단순히 ‘젊은 부인’을 뜻하며,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처녀’는 아하스 왕의 새 부인을 가리킨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신앙의 핵심이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초기 교회 속에서 확고하게 가르쳐졌던 사도들의 전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의 규범으로서 사도들의 전통은 초대 교부들에게 온전히 전수되었다.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주후 110년 경에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모태에서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스승 사도 요한으로부터 이 신앙을 물려받았다. 또한 주후 125년경에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쓴 ‘로마 황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변호’라는 글을 통하여, ‘예수는 성령에 의해 히브리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게다가 주후 150년 경,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트라이포와의 대화와 변호’라는 글을 통해서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 교부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처음부터 예수님의 신성과 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굳게 믿고 있었다는 증거들은 많으며 확고하다.

이러한 확고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올과 오강남씨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한국의 시조설화와 동일한 수준의 설화로 취급해 버린다. 즉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것과 김알지가 계림 금궤 짝에서 나온 것, 그리고 주몽이 큰 알에서 나온 것과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같은 수준의 설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박혁거세나 김알지, 그리고 주몽과 같은 설화들은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지 최소한 1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역사적 인물과 그 인물에 대한 기록의 시간 간격이 너무나 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엔 역사성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언제 문자로 기록되었는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가 죽은 지 약 40년에서 50년 후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 기록은 한국 시조설화들과는 그 역사성에 있어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찾아 오셨고, 그 예수께서 나의 구원자로 오셨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고통 한가운데 함께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임마누엘! 그분 안에 우리의 안전함이 있다.

(서울 큰나무교회· 기독교 변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