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물한계곡교회] 산삼 캐면 “심봤다” 안해… 이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물한계곡교회는 충북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에 있다. 곳곳에 계곡물이 흐르는 물이 많은 지역이라 ‘물한이’로 불리다 물한리로 굳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충북·전북·경북 등 3개 도의 경계에 있어 삼도봉(三道峰)이라 불리는 민주지산 봉우리 아래다.
교회 맞은편에 20㎞ 길이의 물한계곡과 이어지는 작은 하천이 흐른다. 울창한 원시림이 잘 보존돼 있고 계곡물도 깨끗해 삼도봉 석기봉 각호산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삼도봉으로 오르는 길에 볼 수 있는 옥소·의용골·음주암 폭포가 절경을 이룬다.
“심봤다”가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27일 찾아간 물한계곡에는 오전 일찍부터 쏟아진 비로 불어난 계곡물이 거셌다. 오후에 빗줄기는 한여름 장맛비처럼 굵어졌고 계곡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했다.
교회 주변에는 낮은 곳부터 황점·핏들·괴재·중말·가정·한천이라 불리는 6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한천(寒泉)은 마을 가까이에 있는 계곡물이 차다는 뜻에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 나머지 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거나 분명치 않은 설들만 있었다.
“임진왜란 때 피를 흘린 희생자가 많아 핏들이라고 불렀지.” “임진왜란이 아니라 6·25전쟁 때 아닌가?”
“괴화나무가 있는 고개라고 해서 괴재라고 했어.” “아니지.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가정은 아름다울 ‘가(佳)’ 자(字)를 썼다고 하더라.”
“중말은 아마 6개 마을의 중간쯤에 있어서 중말이지.” “황점은 왜 황점인지 아무도 모르나?”
해발고도 600m가 넘는 이들 마을 6곳을 다 합쳐도 주민은 80여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70세 이상의 고령이다. 이 가운데 교회에 나오는 주민은 주일학교 어린이 10명을 포함해 20여명이다.
이날 종일 내린 비 때문에 논밭 일을 쉬게 된 주민들은 교회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민 대부분은 벼, 콩, 들깨, 고추, 곶감, 호두 등을 재배한다. 복숭아 포도 농사가 돈이 되지만 손이 많이 가고 농약도 자주 쳐야 해서 고령의 주민들이 많이 하지는 못한다.
산삼을 캐는 어르신도 있었다. 교인들은 한천에 사는 김귀현(77) 집사를 ‘산삼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김 집사는 “주로 농사를 짓고 부업으로 삼을 캐는데 캔 거에 비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고 했다. 수령이 얼마 안 됐거나 인삼씨가 동물의 배설물 등을 통해 다른 곳으로 퍼져 자란 것이라 한 뿌리에 수십만원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김 집사는 아직 천종(天種)산삼을 캐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천종산삼은 씨를 뿌려 재배한 삼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깊은 산에서 자란 삼이다. 워낙 희귀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최근 그는 천종산삼은커녕 산삼 자체를 캐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햇볕이 많이 안 드는 북향이면서 습도가 좀 유지되는 곳에서
삼이 자라는데 이제는 멸종이 됐는지, 캐러 다니는 사람이 많아져서 씨가 말랐는지 2년 전부터는 수십 킬로(미터)를 다녀도 잘 없더라고.”
김 집사가 심마니와 다른 점은 삼을 캐더라도 산신령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 산신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선 산삼을 캘 수 없다고 믿는 심마니들은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라고 외친 뒤 그 자리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을 오르기 전에도 입산제를 올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접한 김 집사는 “귀한 선물을 주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다. 김 집사가 미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한 것처럼 다른 주민들도 오랫동안 받든 무속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됐다.
괴재에 사는 박래섭(65) 권사는 50여년 전 이월밥 때문에 세 살 아래 남동생이 아팠다며 얘기를 꺼냈다. 이월밥은 음력 2월 1일 귀신에게 지어 바치는 밥을 가리킨다. 상당수 주민들은 가을걷이를 하고 따로 빼놓은 쌀로 지은 밥을 양푼에 담은 뒤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꽂고 가족의 건강과 복을 비는 무속의식을 지냈었다. 박 권사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으니까 이월밥을 하지 말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우리 어머니가 이월밥을 지어 바친 다음에 동생 몸에서 열이 올랐었다”며 “한 신학생이 집에 와서 동생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고 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해줘서 간신히 열이 내렸다”고 했다.
핏들에서 온 최인자(91·여) 권사는 “교회에 처음 나온 날이 가물가물해서 기억도 잘 안 난다”며 “교회 다니니까 거시기도 안 하고 참 좋다”고 했다. “옛날에는 미신을 많이 숭배했고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점쟁이를 데려다 굿을 많이 했는데 그런 거시기를 안 하니까 좋은 거지.”
천막교회로 시작해 어린이를 품는 교회로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소속된 물한계곡교회는 1964년 10월 10일 창립됐다. 이전에는 전도사 한 명과 몇몇 교인들이 천막을 쳐놓고 예배를 드렸었다. 신학생들이 천막교회에 찾아와 여러 차례 부흥집회를 열었다. 한 주민은 “천막교회 땐 부흥집회를 하면 어린이들부터 어르신들까지 마을잔치 하듯 이 좁은 골짜기에 100명 넘게 모였었다”고 말했다.
성도 수는 차츰 10여명으로 늘어났지만 주변에 큰 사찰이 들어서 전도가 쉽지 않았다. 또 천막교회를 걷어내고 예배당을 건축하는 공사를 도울 일손이 크게 부족해 애를 먹었다. 가까스로 교인들의 땀으로 흙벽돌 예배당이 세워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 저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특히 비만 오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받기 위해 큰 대야 여러 개를 갖다놔야 했다.
붕괴 위험 때문에 96년 현재의 자리에 교회를 새로 지었다. 성도들이 공사비를 조금씩 보탰으나 턱없이 부족해 여러 교회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공사를 마무리했다. 김영자(86·여) 권사의 아들이 교회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새 교회도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 특히 2002년 8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루사 때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고 바닥에도 물이 차올라 큰 공사를 했다. 여러 차례 무너질 위기를 넘긴 것은 예배당만이 아니었다. 성도 수가 10여명 수준에 머물러 교회 명맥이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은혜롭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11년 1월 부임한 김선주(48) 담임전도사가 맺은 열매는 주일학교의 ‘부흥’이었다. 그는 마을 6곳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어린이 10명을 모두 교회에 나오도록 했다. 비결은 예상 외로 간단했다. 눈이 내리면 비료포대를 눈썰매 삼아 놀고 역할극 놀이를 하면서 어린이들과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된다는 것.
김 전도사는 어린이에게 눈높이를 맞추려는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갔다. 또 대부분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는 산골 어린이들에게 그는 영어를 가르쳤고 김은숙(44) 사모는 피아노 레슨을 했다. 김 전도사는 어린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신학 동화’를 써야겠다는 비전도 세웠다.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들도 그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어린 왕자’와 같은 동화책을 내겠다고 한다. 그는 한 지역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문예지에 글을 내기도 했다.
어르신 성도를 위해 김 전도사는 생일파티를 열어드렸다. 작은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과일과 따뜻한 커피를 준비한 뒤 생신을 맞은 어르신에게 고깔모자를 씌워드리고 노래를 불러드리는 것. 어르신들은 처음에 “왜 쓸데없이 이런 데다 돈을 쓰느냐” “남이 보면 흉봐요. 남사스럽게…”라면서 책망했다. 하지만 김 전도사는 나중에 그 어르신들이 “생일날 고깔모자도 써봤다”면서 이웃에게 자랑했다는 말을 듣고 보람을 느꼈고 모든 어르신 성도의 생일을 챙겨드리게 됐다.
물한계곡교회는 외부 지원을 받는 미자립교회지만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교회’라는 교회 표어대로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정은 어느 ‘부흥한 교회’보다 따뜻해보였다. 정계순(71·여) 권사는 “다른 교회 사람들이 보면 성도가 20명 좀 넘는 초라한 교회라고 하겠지만 싸우지 않고 한집 식구처럼 단합도 잘 되고 다들 따뜻하게 잘 챙겨주니까 좋다”고 말했다. 정연기(87·여) 권사는 “전도사님, 사모님이 교회를 떠나지 마시고 오래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 우리 전도사님은 나한테 자꾸 몸 생각해서 쉬엄쉬엄 일하라고 하는 것만 빼고 다 마음에 든다”면서 웃음을 지었다.
김 전도사는 말로 하는 전도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는 전도를 하려고 힘쓴다. 그는 “밭일 하시는 어르신 곁에 가서 곡괭이질 한 번이라도 거들려고 한다”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로만 권하는 방식보다는 시간이 꽤 걸리더라도 주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목회자가 모범을 보여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전해지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란 김 전도사는 2003년 침례신학대학을 나와 목원대 신학대학원을 2010년 졸업했다. 이 교회가 첫 부임지다.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며 완성이라고 선포했듯 강단과 현장이 분리되지 않으며 주민 삶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전도를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마을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더욱 깊숙이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비전입니다.”
영동=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물한계곡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40여분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황간IC로 빠져나와 황간삼거리에서 영동(대전)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4번 국도를 타고 3㎞를 가다 신탄삼거리에서 상촌·매곡(물한계곡) 방면으로 좌회전해 6㎞를 간다. 돈대삼거리에서 상촌·용화 방면으로 우회전해 49번 지방도로로 진입해 7㎞를 이동한다. 어촌교 쪽으로 좌회전한 뒤 차유교를 지나 우회전, 7㎞를 가다 보면 교회가 보인다.
교회 맞은편에 20㎞ 길이의 물한계곡과 이어지는 작은 하천이 흐른다. 울창한 원시림이 잘 보존돼 있고 계곡물도 깨끗해 삼도봉 석기봉 각호산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삼도봉으로 오르는 길에 볼 수 있는 옥소·의용골·음주암 폭포가 절경을 이룬다.
“심봤다”가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27일 찾아간 물한계곡에는 오전 일찍부터 쏟아진 비로 불어난 계곡물이 거셌다. 오후에 빗줄기는 한여름 장맛비처럼 굵어졌고 계곡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했다.
교회 주변에는 낮은 곳부터 황점·핏들·괴재·중말·가정·한천이라 불리는 6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한천(寒泉)은 마을 가까이에 있는 계곡물이 차다는 뜻에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 나머지 마을의 유래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거나 분명치 않은 설들만 있었다.
“임진왜란 때 피를 흘린 희생자가 많아 핏들이라고 불렀지.” “임진왜란이 아니라 6·25전쟁 때 아닌가?”
“괴화나무가 있는 고개라고 해서 괴재라고 했어.” “아니지.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가정은 아름다울 ‘가(佳)’ 자(字)를 썼다고 하더라.”
“중말은 아마 6개 마을의 중간쯤에 있어서 중말이지.” “황점은 왜 황점인지 아무도 모르나?”
해발고도 600m가 넘는 이들 마을 6곳을 다 합쳐도 주민은 80여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70세 이상의 고령이다. 이 가운데 교회에 나오는 주민은 주일학교 어린이 10명을 포함해 20여명이다.
이날 종일 내린 비 때문에 논밭 일을 쉬게 된 주민들은 교회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민 대부분은 벼, 콩, 들깨, 고추, 곶감, 호두 등을 재배한다. 복숭아 포도 농사가 돈이 되지만 손이 많이 가고 농약도 자주 쳐야 해서 고령의 주민들이 많이 하지는 못한다.
산삼을 캐는 어르신도 있었다. 교인들은 한천에 사는 김귀현(77) 집사를 ‘산삼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김 집사는 “주로 농사를 짓고 부업으로 삼을 캐는데 캔 거에 비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고 했다. 수령이 얼마 안 됐거나 인삼씨가 동물의 배설물 등을 통해 다른 곳으로 퍼져 자란 것이라 한 뿌리에 수십만원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김 집사는 아직 천종(天種)산삼을 캐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천종산삼은 씨를 뿌려 재배한 삼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깊은 산에서 자란 삼이다. 워낙 희귀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최근 그는 천종산삼은커녕 산삼 자체를 캐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햇볕이 많이 안 드는 북향이면서 습도가 좀 유지되는 곳에서
삼이 자라는데 이제는 멸종이 됐는지, 캐러 다니는 사람이 많아져서 씨가 말랐는지 2년 전부터는 수십 킬로(미터)를 다녀도 잘 없더라고.”
김 집사가 심마니와 다른 점은 삼을 캐더라도 산신령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 산신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선 산삼을 캘 수 없다고 믿는 심마니들은 산삼을 발견하면 ‘심봤다’라고 외친 뒤 그 자리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을 오르기 전에도 입산제를 올린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접한 김 집사는 “귀한 선물을 주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다. 김 집사가 미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한 것처럼 다른 주민들도 오랫동안 받든 무속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됐다.
괴재에 사는 박래섭(65) 권사는 50여년 전 이월밥 때문에 세 살 아래 남동생이 아팠다며 얘기를 꺼냈다. 이월밥은 음력 2월 1일 귀신에게 지어 바치는 밥을 가리킨다. 상당수 주민들은 가을걷이를 하고 따로 빼놓은 쌀로 지은 밥을 양푼에 담은 뒤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꽂고 가족의 건강과 복을 비는 무속의식을 지냈었다. 박 권사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으니까 이월밥을 하지 말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우리 어머니가 이월밥을 지어 바친 다음에 동생 몸에서 열이 올랐었다”며 “한 신학생이 집에 와서 동생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고 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해줘서 간신히 열이 내렸다”고 했다.
핏들에서 온 최인자(91·여) 권사는 “교회에 처음 나온 날이 가물가물해서 기억도 잘 안 난다”며 “교회 다니니까 거시기도 안 하고 참 좋다”고 했다. “옛날에는 미신을 많이 숭배했고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점쟁이를 데려다 굿을 많이 했는데 그런 거시기를 안 하니까 좋은 거지.”
천막교회로 시작해 어린이를 품는 교회로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소속된 물한계곡교회는 1964년 10월 10일 창립됐다. 이전에는 전도사 한 명과 몇몇 교인들이 천막을 쳐놓고 예배를 드렸었다. 신학생들이 천막교회에 찾아와 여러 차례 부흥집회를 열었다. 한 주민은 “천막교회 땐 부흥집회를 하면 어린이들부터 어르신들까지 마을잔치 하듯 이 좁은 골짜기에 100명 넘게 모였었다”고 말했다.
성도 수는 차츰 10여명으로 늘어났지만 주변에 큰 사찰이 들어서 전도가 쉽지 않았다. 또 천막교회를 걷어내고 예배당을 건축하는 공사를 도울 일손이 크게 부족해 애를 먹었다. 가까스로 교인들의 땀으로 흙벽돌 예배당이 세워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 저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특히 비만 오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받기 위해 큰 대야 여러 개를 갖다놔야 했다.
붕괴 위험 때문에 96년 현재의 자리에 교회를 새로 지었다. 성도들이 공사비를 조금씩 보탰으나 턱없이 부족해 여러 교회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공사를 마무리했다. 김영자(86·여) 권사의 아들이 교회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새 교회도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 특히 2002년 8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루사 때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고 바닥에도 물이 차올라 큰 공사를 했다. 여러 차례 무너질 위기를 넘긴 것은 예배당만이 아니었다. 성도 수가 10여명 수준에 머물러 교회 명맥이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은혜롭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11년 1월 부임한 김선주(48) 담임전도사가 맺은 열매는 주일학교의 ‘부흥’이었다. 그는 마을 6곳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어린이 10명을 모두 교회에 나오도록 했다. 비결은 예상 외로 간단했다. 눈이 내리면 비료포대를 눈썰매 삼아 놀고 역할극 놀이를 하면서 어린이들과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된다는 것.
김 전도사는 어린이에게 눈높이를 맞추려는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갔다. 또 대부분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는 산골 어린이들에게 그는 영어를 가르쳤고 김은숙(44) 사모는 피아노 레슨을 했다. 김 전도사는 어린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신학 동화’를 써야겠다는 비전도 세웠다.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들도 그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어린 왕자’와 같은 동화책을 내겠다고 한다. 그는 한 지역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문예지에 글을 내기도 했다.
어르신 성도를 위해 김 전도사는 생일파티를 열어드렸다. 작은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과일과 따뜻한 커피를 준비한 뒤 생신을 맞은 어르신에게 고깔모자를 씌워드리고 노래를 불러드리는 것. 어르신들은 처음에 “왜 쓸데없이 이런 데다 돈을 쓰느냐” “남이 보면 흉봐요. 남사스럽게…”라면서 책망했다. 하지만 김 전도사는 나중에 그 어르신들이 “생일날 고깔모자도 써봤다”면서 이웃에게 자랑했다는 말을 듣고 보람을 느꼈고 모든 어르신 성도의 생일을 챙겨드리게 됐다.
물한계곡교회는 외부 지원을 받는 미자립교회지만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교회’라는 교회 표어대로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정은 어느 ‘부흥한 교회’보다 따뜻해보였다. 정계순(71·여) 권사는 “다른 교회 사람들이 보면 성도가 20명 좀 넘는 초라한 교회라고 하겠지만 싸우지 않고 한집 식구처럼 단합도 잘 되고 다들 따뜻하게 잘 챙겨주니까 좋다”고 말했다. 정연기(87·여) 권사는 “전도사님, 사모님이 교회를 떠나지 마시고 오래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 우리 전도사님은 나한테 자꾸 몸 생각해서 쉬엄쉬엄 일하라고 하는 것만 빼고 다 마음에 든다”면서 웃음을 지었다.
김 전도사는 말로 하는 전도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는 전도를 하려고 힘쓴다. 그는 “밭일 하시는 어르신 곁에 가서 곡괭이질 한 번이라도 거들려고 한다”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로만 권하는 방식보다는 시간이 꽤 걸리더라도 주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목회자가 모범을 보여야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전해지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란 김 전도사는 2003년 침례신학대학을 나와 목원대 신학대학원을 2010년 졸업했다. 이 교회가 첫 부임지다.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며 완성이라고 선포했듯 강단과 현장이 분리되지 않으며 주민 삶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전도를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마을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더욱 깊숙이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비전입니다.”
영동=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물한계곡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40여분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황간IC로 빠져나와 황간삼거리에서 영동(대전)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4번 국도를 타고 3㎞를 가다 신탄삼거리에서 상촌·매곡(물한계곡) 방면으로 좌회전해 6㎞를 간다. 돈대삼거리에서 상촌·용화 방면으로 우회전해 49번 지방도로로 진입해 7㎞를 이동한다. 어촌교 쪽으로 좌회전한 뒤 차유교를 지나 우회전, 7㎞를 가다 보면 교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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