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은 포기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영성을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금욕경성의 상호 작용이 빚어내는 것으로 본다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성 안토니일 것이다. 그는 251년 이집트 코마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인 양친은 그가 스무 살 즈음 25만평이 넘는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교회 가는 길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저버리고 어떻게 주님을 따라갔는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몇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서 사도들의 발 아래 놓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어떤 큰 소망이 하늘에 쌓여 있는지…”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재물을 선택한 부자 청년
그가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그때 주께서 부자 청년을 향해 하신 말씀을 들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그는 이를 자신에게 주신 음성으로 받았다. 결단한 대로 땅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안토니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는 주님의 말씀을 읽고 조금 남겨둔 재산마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 뒤 하나 있는 여동생을 동정녀들의 공동체에 그 몫의 재산과 함께 맡긴 뒤 자신은 수도자의 길을 떠났다.
안토니의 행위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순종한 결과였다. 부자청년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보다 재물을 선택함으로 이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하늘의 보화를 약속한 주님의 음성도 재물에 붙잡힌 그의 영혼에 자유를 주지 못했다. 물질의 힘은 그만큼 크고 강했다. 그러나 3세기 후반 이집트의 부자청년은 달랐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길은 ‘온전’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
안토니가 자신의 재산을 포기함으로 인해 수도원운동은 시작됐다. 그는 35년간 금욕훈련을 한 후 55세 즈음 흔들림 없는 완성의 경지에 이른다. 치른 대가는 엄청났지만 주님의 약속은 이뤄졌다. 그때 그를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4세기 말에는 동서방에서 안토니를 따른 수도자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중세에도 넘치는 것이 수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완벽한 가난을 실천하지 못하자 11세기부터 개혁운동들이 일어났다. 수도사들은 중세인들의 탐욕을 비난했다. 그들의 가난은 주님을 본받는 행위이자 탐심의 죄에 대한 참회였으며, 모으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는 현 세상을 바꾸는 행위였다.
평생 가장 완벽하게 가난을 추구한 개혁자는 앗시시의 부자청년 프란시스코였다. 그는 1209년 예배 중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10:9∼10)는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거지 같은 옷을 입고, 지팡이와 샌들도 포기했다. 그는 돈을 인생을 망치는 마약과 같이 여겼다. 돈을 가진 수도사는 사기꾼, 배교자, 도둑, 그리고 강도로 취급했다. 이것은 프란시스코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한 결과였다.
안토니의 길을 따른 수도사들은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 가난에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무슨 권한으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아도 되는 명령으로 분류하는가. 우리의 욕심 때문에 비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제자들이 실천한 것을 보면 포기는 제자됨의 표지요 증거였다.
포기는 제자됨의 표지요 증거
우리에게는 이런 포기가 없다. 가진 것을 안 버리려고 청부론까지 만들며 청빈을 부정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가난의 삶을 포기했을 때 그 시대 교회는 항상 쇠퇴하고 타락했다. 돈이 교황 교회를 망쳤던 것처럼 우리는 돈 때문에 망해가고 있다. 그래서 포기하는 자들이 필요하다. 이 시대를 사는 부자청년에게 주님이 말씀하신다면 그가 순종할 수 있는 길은 열어두어야 한다. 안토니와 프란시스코가 있어야 교회가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김진하 교수
김 교수는
총신대 신학대학원(M. Div.), 영국 리즈대 신학박사(교회사 전공). ‘생명의 삶’ ‘새벽나라’ 편집장, 영국 셰필드한인교회 담임목사 역임, 현 백석대 기독교학부 및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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