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기쁨-Helper’s High] “결혼하면 남편에게도 후원 권할겁니다”
순천 선혜학원 시각장애인 유난희 교사
유난히 밝고 따뜻한 날이었다. 지난해 12월 30일 전남 순천의 선혜학원을 찾았다. 이 곳은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을 교육하는 특수학교다.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진 학교 벽이 우리를 맞았다. 이 학교 중등 1학년3반 담임 유난희(25) 선생님을 찾았다. 2012년 임용된 그에게 이 학교가 첫 부임지다. 지난해부터는 굿네이버스를 통해 미얀마에 있는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 사회초년생이지만 서둘러 후원을 시작한 이유가 있었다. 유 선생님 자신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까지 왔기 때문이다.
그는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눈도 망막에 문제가 있어 시력이 약하다. 야맹증이 있어 밤에는 바깥을 돌아다니기 어렵다. 아버지도 맹인이었고, 어머니는 자신이 3세 때 집을 떠났다.
유난히 표정이 밝은 젊은 여성이 1학년3반 교실에서 나왔다.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지금 임용고시 준비하는 분들을 봐주고 있거든요.” 교사인지 대학생인지 잠시 헷갈렸다. 구김살 전혀 없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 이 아가씨가 바로 유난희 선생님이었다.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제 모습만 봐선 어렵게 큰 줄 전혀 몰랐다고들 하세요.”
어릴 땐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유 선생님은 “나는 왜 태어났지. 차라리 없어지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아버지가 혼자 저를 키울 처지가 안되니까 전북 고창 할머니집에서 자랐어요. 다 쓰러져가는 흙집에서 할머니랑 사는데다 눈도 잘 안 보였으니. 애들이 던진 돌에 맞은 적도 있는걸요.”
유난히 어려움이 많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갈수록 내성적이 됐다.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말썽도 부렸다. 그러다 광주의 영광원으로 갔다. 시각장애인들을 보살피는 기독교시설이었다. 그 곳에는 세광학교라는 특수학교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 곳에 혼자 남겨졌다.
인생의 막다른 곳일 줄 알았다. 매일 새벽 5시40분이면 일어나 체조를 하고 새벽기도도 해야했다. 학교에 빨리 적응하지 못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언니와 오빠들에게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곳이 동앗줄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저를 정말 사랑해주셨어요.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과도 가족처럼 지냈어요. 저보다 더 눈이 안 좋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서로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꿈이 생겼어요. 나도 선생님들처럼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육 교사나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가 되면 좋겠다고.”
영광원에서는 광주 지역의 주민들을 후원자로 연결해줬다. 후원자 가족들은 영광원을 찾아와 사랑을 나눴다. 마치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았다. “나도 돈을 벌면 꼭 다른 어린이를 후원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세광학교에서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조선대 특수교육학과에 진학을 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집과 같았던 곳을 떠나 대학 기숙사에 가게 된다는 것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아니 서러움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가 와서 냉장고에 반찬도 넣어주고, 필요한 것도 사주고 세심하게 살펴주는데 저는 아무도 없었어요. 세살 때 우리 곁을 떠난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유난히 좋은 선생님을 만난걸까. 세광학교의 김동복 선생님, 영광원의 박미화 선생님은 대학까지 찾아와 보살펴 주었다. 고민이 있을 때면 이 선생님들을 찾아가 털어놓았다. 선생님들도 집에까지 초대해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다. “저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 같아요.” 유 선생님은 이 선생님들과 지금도 연락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해 발령을 받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학교에 와보니 저는 그냥 파릇파릇하기만 한 새내기 교사였던거에요. 학생들 앞에 서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처음 맡은 반은 정규교육과정을 마치고 사회 생활을 준비하는 전공과였다. “학생 중에 저와 동갑내기가 있을 정도로 큰 아이들이었어요. 학부모님들께 전화를 드리니 ‘선생님 너무 어리시네요’라며 걱정하셨어요. 현장학습을 나갔는데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사라져 버리기도 했어요. 아이들에게 팔뚝을 물리고 목을 졸린 적도 있었어요. 제가 해줄수 있는게 없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유 선생님은 “그래도 코뼈가 부러졌던 분들보다는 낫다”며 또 웃었다. 유난히 긍정적이다. 이듬해는 중학생을 맡았다. 나이는 중학생이지만, 밥 먹을 때 침 흘리지 않기, 식판 깨끗이 사용하기부터 바로 잡아줘야했다.
“애들과 함께 하는게 이제는 즐거워요. 학기초에는 침 흘리던 아이가 이제는 먼저 침을 닦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아이들이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아 줄 때, 수업시간에 저에게 윙크를 할 땐 더 없이 기뻤어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요.”
유 선생님은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달라진다는 것이 참 좋다”고 했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얘길 나누지 못한다는 것.
“제가 처음 시설에 들어갔던 게 바로 중학교 1학년 때였잖아요. 저희 반에도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있어요. 조금만 더 말이 통한다면 제 얘기도 들려주면서 용기를 주고 싶은데, 그런 점은 아쉽기도 하죠.”
후원 이야기를 물어보니 책상에서 한 장의 사진을 가져왔다. 미얀마에 사는 7살 사내 아이였다.
“후원 시작할 땐 정말 잘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편지도 못 썼어요. 얼마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빨리 답장을 해줘야겠어요.”
유 선생님은 “주변의 다른 분들께도 후원하라고, 나도 한다고 막 그러고 다닌다”며 “나중에 결혼하면 남편에게도 후원하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남자친구는 아직 없다. 첫사랑이 언제였냐고 물었더니 “매번 사랑할 때가 첫사랑이잖아요”라며 생글생글 웃었다.
유난히 웃음이 많은 유난희 선생님,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이 마음이 웃음의 비밀이었다.
유난히 밝고 따뜻한 날이었다. 지난해 12월 30일 전남 순천의 선혜학원을 찾았다. 이 곳은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을 교육하는 특수학교다.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진 학교 벽이 우리를 맞았다. 이 학교 중등 1학년3반 담임 유난희(25) 선생님을 찾았다. 2012년 임용된 그에게 이 학교가 첫 부임지다. 지난해부터는 굿네이버스를 통해 미얀마에 있는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 사회초년생이지만 서둘러 후원을 시작한 이유가 있었다. 유 선생님 자신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까지 왔기 때문이다.
그는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눈도 망막에 문제가 있어 시력이 약하다. 야맹증이 있어 밤에는 바깥을 돌아다니기 어렵다. 아버지도 맹인이었고, 어머니는 자신이 3세 때 집을 떠났다.
유난히 표정이 밝은 젊은 여성이 1학년3반 교실에서 나왔다.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지금 임용고시 준비하는 분들을 봐주고 있거든요.” 교사인지 대학생인지 잠시 헷갈렸다. 구김살 전혀 없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 이 아가씨가 바로 유난희 선생님이었다.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제 모습만 봐선 어렵게 큰 줄 전혀 몰랐다고들 하세요.”
어릴 땐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유 선생님은 “나는 왜 태어났지. 차라리 없어지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아버지가 혼자 저를 키울 처지가 안되니까 전북 고창 할머니집에서 자랐어요. 다 쓰러져가는 흙집에서 할머니랑 사는데다 눈도 잘 안 보였으니. 애들이 던진 돌에 맞은 적도 있는걸요.”
유난히 어려움이 많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갈수록 내성적이 됐다.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말썽도 부렸다. 그러다 광주의 영광원으로 갔다. 시각장애인들을 보살피는 기독교시설이었다. 그 곳에는 세광학교라는 특수학교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 곳에 혼자 남겨졌다.
인생의 막다른 곳일 줄 알았다. 매일 새벽 5시40분이면 일어나 체조를 하고 새벽기도도 해야했다. 학교에 빨리 적응하지 못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언니와 오빠들에게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곳이 동앗줄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저를 정말 사랑해주셨어요.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과도 가족처럼 지냈어요. 저보다 더 눈이 안 좋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서로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꿈이 생겼어요. 나도 선생님들처럼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육 교사나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가 되면 좋겠다고.”
영광원에서는 광주 지역의 주민들을 후원자로 연결해줬다. 후원자 가족들은 영광원을 찾아와 사랑을 나눴다. 마치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았다. “나도 돈을 벌면 꼭 다른 어린이를 후원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세광학교에서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조선대 특수교육학과에 진학을 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집과 같았던 곳을 떠나 대학 기숙사에 가게 된다는 것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아니 서러움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가 와서 냉장고에 반찬도 넣어주고, 필요한 것도 사주고 세심하게 살펴주는데 저는 아무도 없었어요. 세살 때 우리 곁을 떠난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유난히 좋은 선생님을 만난걸까. 세광학교의 김동복 선생님, 영광원의 박미화 선생님은 대학까지 찾아와 보살펴 주었다. 고민이 있을 때면 이 선생님들을 찾아가 털어놓았다. 선생님들도 집에까지 초대해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다. “저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 같아요.” 유 선생님은 이 선생님들과 지금도 연락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해 발령을 받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학교에 와보니 저는 그냥 파릇파릇하기만 한 새내기 교사였던거에요. 학생들 앞에 서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처음 맡은 반은 정규교육과정을 마치고 사회 생활을 준비하는 전공과였다. “학생 중에 저와 동갑내기가 있을 정도로 큰 아이들이었어요. 학부모님들께 전화를 드리니 ‘선생님 너무 어리시네요’라며 걱정하셨어요. 현장학습을 나갔는데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사라져 버리기도 했어요. 아이들에게 팔뚝을 물리고 목을 졸린 적도 있었어요. 제가 해줄수 있는게 없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유 선생님은 “그래도 코뼈가 부러졌던 분들보다는 낫다”며 또 웃었다. 유난히 긍정적이다. 이듬해는 중학생을 맡았다. 나이는 중학생이지만, 밥 먹을 때 침 흘리지 않기, 식판 깨끗이 사용하기부터 바로 잡아줘야했다.
“애들과 함께 하는게 이제는 즐거워요. 학기초에는 침 흘리던 아이가 이제는 먼저 침을 닦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아이들이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아 줄 때, 수업시간에 저에게 윙크를 할 땐 더 없이 기뻤어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요.”
유 선생님은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달라진다는 것이 참 좋다”고 했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얘길 나누지 못한다는 것.
“제가 처음 시설에 들어갔던 게 바로 중학교 1학년 때였잖아요. 저희 반에도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있어요. 조금만 더 말이 통한다면 제 얘기도 들려주면서 용기를 주고 싶은데, 그런 점은 아쉽기도 하죠.”
후원 이야기를 물어보니 책상에서 한 장의 사진을 가져왔다. 미얀마에 사는 7살 사내 아이였다.
“후원 시작할 땐 정말 잘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편지도 못 썼어요. 얼마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빨리 답장을 해줘야겠어요.”
유 선생님은 “주변의 다른 분들께도 후원하라고, 나도 한다고 막 그러고 다닌다”며 “나중에 결혼하면 남편에게도 후원하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남자친구는 아직 없다. 첫사랑이 언제였냐고 물었더니 “매번 사랑할 때가 첫사랑이잖아요”라며 생글생글 웃었다.
유난히 웃음이 많은 유난희 선생님,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이 마음이 웃음의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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