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생명으로 살자
성경을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모르면
마귀가 노략질을 해도 모르고 살아간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인생의 과정과,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성경을 계속 읽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기도하며 낮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마음이 공명하는 것이 있는데..
만약 성경을 읽어도 감동이 없다면 무엇인가 막힌 것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토하고 자신을 낮추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계속 성경을 읽어나가야 한다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나의 어떠함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상주실 것이라 오해하고,
자신의 행위에 근거한 열심 때문에.. 자꾸 잘하려고 하고... 긴장하고..
내가 뭔가 잘하면 뿌듯해지고, 내가 뭔가 못하면 극도의 자책에 빠지고, 남을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랑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을 따라서 상주시고 버리시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서 그 분의 의를 바라 보라고 하시기 때문에
성경대로 그리스도를 아느냐, 그리스도를 붙들었느냐..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여 성경대로 올바른 방식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면 지치지 않는데..
내 힘으로, 내가 열심히 애쓰면 거룩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내가 할수 있는 줄 알고, 잘하려 노력 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자기 노력, 자기 상태에 집중하여, 일희일비 하면 지치고 피곤하고 평안이 없다.
우리 스스로는 승리할 수가 없고 잘할 수가 없다는 그 기본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 승리가 없다..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복음의 기본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날입니다.
지옥의 문이 닫히고 하늘 문이 열린 날이며
모든 영계에서 모든 천사들이 화답하며 기뻐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지옥문을 닫고 저주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하늘이 열리고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옥을 파괴하고 부활은 천국을 열었습니다.”
부활의 역사란 얼마나 기가막힌 것인지 모릅니다.
부활절은 온 마음으로 감격하고 기뻐하고 기념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저 계란 하나 먹고 끝나는 형식적인 날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활이 뭔지 그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날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부활은 우리 생애의 최고의 자산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았든 재산이 얼마 되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고 많은 사람을 얻었던 상관없이 우리의 모든 기초는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 뿐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제일 불쌍한 존재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신앙에 있어서 부활의 의미가 큰 것입니다.
부활 생명으로 살라는 말씀을 통해, 부활절이 어떤 보배와도 비할 수 없는
귀한 것이고 전 재산을 팔아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로마서 5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5:12~21)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에 속하던지, 아니면 그리스도에 속하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아담에 속해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총각 때 죽었으면 우리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에 우리는 아버지 허리 안에 있었습니다.
또, 할아버지가 총각 때 죽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나요?
할아버지가 총각 때 우리는 할아버지 허리 안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쭉 올라가면 결국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우리는 모두 아담의 허리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죄를 지어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기에..
그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범죄의 씨를 갖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거듭나기 전까지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고,
또한, 아담이 범죄할 때 우리가 그 안에 있었으니..
우리 이름 앞에 ‘아담’ 혹은 ‘죄’ 라는 성을 붙여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성이 바뀝니다. 그것이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성이 바뀝니다 아담 안에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하여 나왔지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애굽에서 있었던 많은 삶의 습관들과 모습들,그 영향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겉표면은 예수의 의로 덧입었는데 속은 여전히 아담의 성분으로 가득해서
예수의 마음, 예수의 감정, 예수의 기질.. 이것이 하나도 수혈이 안되어 있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나는 싫어하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나는 좋아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살면서 그 애굽적인 성향, 찌꺼기들을 다 처리 받아야 했습니다.
애굽적인 사랑, 자아적인 이상형, 자아적인 우정, 내가 좋아하는 기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이 모든 속성, 생명이 하나 하나 다룸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혈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고 출애굽 하지만
이런 것들을 처리 받기 위해서는 광야의 십자가가 임해야 하고,
그 광야의 십자가가 임한 만큼 가나안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내가 아담으로 사는가, 그리스도로 사는가.. 봉사할 때, 내가 아담으로 하는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는가
말할 때, 아담으로 말하는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는가
기도할 때, 아담의 소원과 목적으로 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는가
항상 여기에 집중해야 그리스도의 영이 불일듯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이런 전체적인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의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보혈. 십자가. 부활.
이것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혈은 죄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완전한 죄 씻김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소멸입니다.
피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하지만, 십자가 죽음이 역사하면 죄성을 깨뜨립니다.
부활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부활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복음의 기본을 이해하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6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로마서 6:3~11)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장에 세례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세례식은 약식으로 머리에 물을 뿌림으로써 행해지지만
제대로 하자면,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요단강에서 물에 들어갔다 나오셨고
그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9~11)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식는 물속에 잠기는 수장을 상징하며..
노아의 때에 온 세상이 물에 잠겼듯이,
물 아래 있다는 것은 내 옛사람의 완전한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물속에 들어가서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6장 4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와 “함께” 장사 됩니다.
결국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만큼 애썼는가, 얼마나 착하게 살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열심히 봉사하였는가.. 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설정에 달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상태에 굉장히 집중하고 신경쓰는데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은 나의 어떠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통해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고 기도 많이 하고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의 의의 백만분의 일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떠함. 이것이 우리의 운명과 팔자를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께서 받으신 저주를 통해서 내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지옥의 저주를 끊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내가 잘했다, 못했다를 가지고 계산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고 신앙생활을 할수록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설정..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히 알고
관계설정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세요?’ 하는 질문에..
그냥 ‘4대 성인이라고 생각해요’ 한다면 그는 구원과는 상관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해요.’ 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신 그 예수님과 내가 연합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셨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나도 같이’ 죽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일 뿐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죄사함은 예수님의 어떠함에 근거한 것이지 나의 어떠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내 죄가 사함을 받고 소멸되는 것이지
그저 내가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울고 불고 한다고 해서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해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하나님의 의가 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세례의 장면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37~3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오순절날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놀라서 성령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했고..
38절에 보면..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회개를 합니다.
이 회개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죄를 시시콜콜 하나 하나 다 회개한다는 의미 보다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의 죄로 인함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찔림과 나 중심의 삶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꾸겠다는..
인생의 중심 방향을 바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셋째, 죄사함을 얻고
넷째,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세례는 죽음입니다.
세례 즉 물에 잠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나도 거기에서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빚 독촉을 할 수 없지요.
아무리 지독한 채권자라고 하더라도, 채무자가 죽었을 때,
[네가 죽었어? 좋다. 내가 어찌하더라도 빚을 받고야 말거야..] 하고
자살해서 채무자를 따라가는 사람은 없어요.
그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정죄와 심판이 나에게 적용되지 않고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서 다음 세 가지가 이루어지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에 들어감은,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이요
물에 가라앉는 것은, 예수와 함께 장사 지낸바 되는 것이요
물에서 다시 일어나서 올라오는 것은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관계를 맺었습니다. 예수께 딱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고, 함께 무덤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실 때 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죽었으면,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롬6:6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세례는 이것을 고백하고 마음에 받아 들이고 온몸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천하에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을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결혼식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주고 받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확인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세례란 예수와 함께 죽고, 연합되고, 장사되고 부활하는 것이고
우리 인생과 운명을 뒤흔드는 우리 삶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세례에 참여한 사람들은 오열하고 통곡하고,
충격과 감사와 기쁨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이 세례받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군 천사들이 환호하고 박수하는 놀라운 장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는 한 생명이 예수와 함께 죽고, 아담의 생명이 장사되고,
다시 예수와 함께 새로운 생명, 부활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처음 태어날 떄는 누구나 아담의 생명 갖고 있습니다.
각 사람의 자연적인 특질, 땅의 속성, 땅의 특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나고 나면 새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부활생명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4절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한다’ 는 말씀은 주님께서 살아나실 때 우리도 같이 살아난다는 뜻일 뿐 아니라
이 땅에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자는 부활에도 같이 연합되어 부활생명, 새 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부활생명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생명은 그냥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곧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부활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담의 속성을 갖고 있는데
세례받고 죄사함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면
부활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은 과정을 통과한 영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성령역사와 신약의 성령역사는 성격이 다릅니다.
구약의 역사는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 등..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시적으로, 외적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임하시다가 그 사람이 범죄하면 떠나가십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밖에 임하는 성령의 외적 역사가 나타나고, 권세, 기적, 능력이 나타날 뿐 거듭남이나, 성령의 내주하심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장사지낸 후 삼일만에 다시 일어나셔야..
그 다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영으로 오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한명도 거듭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오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이고,
그 당시에는 거듭나고 성령이 내주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믿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셨는데..
생수의 강은 안에 있을까요, 밖에 있을까요?
배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보면 배 속에서, 안에서 흘러넘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거듭남으로 인하여 내적으로 임하시고 흘러넘치는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이 안에 임하신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 구약에 벌써 이뤄진 것이라면 예수께서 이런 약속의 말씀을 따로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맏은 사람에게 성령께서 하늘에서 임하셔서 나타날
표적은 밖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타는 내면의 표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3:30~31)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예수께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나가는 유다를 보고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영광이 바로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한복음 7장의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인 이유는, 죽으시고 대가를 지불하신 이후에야 죄의 세력이 소멸되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시작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가복음 3:2)
하셨을 때의 그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거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지만
그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옛세상, 아담을 끝내시고
장사 되셨다가 사흘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지옥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바로 그 때였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셔야 그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고 하나님의 왕국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자..
그 때 모든 지옥이 끝나고 부활생명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아직 성령께서 사람의 속에 오실 수 없었고 내주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아무리 외적인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이들도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거듭날 수 없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고, 권능이 임해서 마귀를 쫓아 내지만
근본적인 아담의 죄성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삼손도, 기드온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서 원수들을 물리친 후에
바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이방 여인에게 빠지는 등.. 엉망이 되곤 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특징인 것입니다.
외적인 성령의 역사.. 은사와 기적과 능력..
내적인 성령의 역사.. 거듭남과 죄에서의 해방, 인격의 성숙..
이 성령의 이중사역을 꼭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에는 외적인 역사만 있었지만
신약에는 성령의 이중사역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밖에 임하시는 성령의 외적 역사와 안에 속으로 임하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역사는 능력으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많은 기적과 영적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깥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안이 궁핍해 지듯이
외적으로 요란할수록 내적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요란한 사람일수록 인격과 성품의 열매가 없습니다.
유명한 부흥사들이나 세계적인 사역자들 중에서 기적을 행하고 역사가 나타나는데
삶과 인격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분들이 흔히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영을 경험하지 않고 외부적인 권능의 영만 경험하면
능력은 행하나 내면의 성품과 삶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사역을 할 때는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지만 삶에서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혈기와 음란과 정욕과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최고가 되기 원하고 으뜸이 되기 원하고 가까운 이들과 화목하지 못하고,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예배를 이벤트처럼 생각하고.. 예배나 집회에 참여할 때는 잠깐 신나지만 집에 가면 바로 혈기를 내고 엉망이 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처럼 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내면의 본질적인 역사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내면의 역사는 절대 보이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적인 역사가 많아도 그것은 겉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너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일수록 바깥에 나타나는 강력하고 신기한 것, 표적을 좋아하지만, 영이 자랄수록 점점 바깥보다는 안을 향하게 되며 그러므로 삶에서 해방과 아름다움, 예수의 형상이 가득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내면의 영이 열리면 점점 영의 실제를 감지하게 됩니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 순결한 것과 불순한 것,
하나님께 속한 것과 인간에 속한 것 사이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은 밖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이지만 신약은 내주하시는 부활의 영이 중심이므로..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진정으로 깨닫고 믿는 사람이라면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단한 표적을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표적에 대해서 별로 좋게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마태복음 16:4)
요나의 표적이란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의 옛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같이 부활하였습니다.
나의 육신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지만..영은 주께서 부활하실 때 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역사입니다.
진정으로 영원한 놀라운 기적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기적입니다.
죄성을 소멸시키시고 내면을 바꾸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사함이나 옛사람의 장사지냄.. 그런 것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로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사람의 속에 들어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령은 육체에, 밖에 임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구약에서는 한명도 거듭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요한이 먼저 죽었으니 세례요한은 아직 구약의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구약에 모세, 엘리야, 이사야, 다니엘.. 등등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목적은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인데 요한은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서 뵙고 세례를 드렸으니 그가 가장 큰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신약의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가까우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도들의 신앙은..앞으로 오실 주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사모할 뿐, 그들의 생시에는 거듭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이미 이루어진 일을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22)’
하셨을 때.. 그 성령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과정을 통과한 영이었습니다.
죄를 사하고 새 생명을 주시는 부활 생명의 영이었습니다.
이제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의 성령이 왔을 때.. 그것은 구약 성령의 역사와 다른 것입니다.
이제 주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새 시대가 열리고,
그 영을 보내셨으므로 이제 누구나 외적인 성령의 역사와 함께,
내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영접한다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영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십자가 사건, 장사지내는 사건, 부활의 사건..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이루셨고
나도 그 죽으심과 부활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례사건은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외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시고, 부활하신 그 영을 내가 받아들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으며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줄 때에는 예식을 진행하기 전에 복음의 의미, 세례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기 원하는 이들이 분명히 이해하고 동의하는지, 이러한 것을 물어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주님과 함께 죽는것을 의미하는데 정말 그것을 원하느냐고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곧 더 이상 내 멋대로의 삶, 내꿈, 내비전, 내취미,
내애정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인데..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과 함께 부활해서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인데, 그것을 믿는지 묻고 확인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주님과 함께 죽기를 원하는지를 항상 물어보고 확인 해야 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내 멋대로 살 수 없다고.. 더 이상 내멋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그것을 원하느냐고 물어 봐야 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주와 함께 죽기 원합니다.”깨닫고 받아 들이고
이것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합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이제 아담의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 부활의 사람이다!!”
하는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한달 정도 그 기쁨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참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아나서
부활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이렇게 기가 막힌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세례, 성찬, 부활의 의미를 모르고 예수와 나의 관계를 맺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저 멀리 떨어진 수퍼스타인 줄로만 압니다.
그것은 아담의 삶이며, 저주에서 벗어난 삶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구약에는 외적인 사역만 있습니다. 구약의 은사와 능력은 밖에, 육체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잠깐 임했다가 다시 떠나십니다. 성령께서 임했을 때는 충만하다가
떠나시면 다시 두렵고 연약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항상 함께 계신다고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이런 말씀이 구약에는 없습니다.신약에 임하신 성령은 구약처럼 밖에 왔다가 가신 분이 아니라 내 안에 오셔서 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떠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 깨어나고 거듭나서 주와 합한 자는 주와 한 영이 됩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린도전서 6:17)
내 영이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합하여 함께 죽고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 합하여 함께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나도 함께 죽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순간 나도 함께 부활했음을 내 영이 받아들이면..
세례를 통해 믿고 받아들이고 고백하면, 내 영이 깨어나게 됩니다.
반복 해서 선포 하십시다 “부활하신 주가 내 안에 거하신다.”
“부활하신 주가 내 안에 거하신다.” “부활하신 주가 내 안에 거하신다.”
이것이 신약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가 내 안에 계신다. 그것이 신약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모든 축복, 영광, 승리, 모든 것이‘부활하신 주가 내 안에 거하신다.’이 한가지에 근거합니다.
주의 부활생명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것이나..
하버드 대학을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런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놀라운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내가 이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자산이고 보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서 기뻐서 웃고 감격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혼자서 실실 웃고, 기뻐하고 난리가 났을 때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봅니다. 그 사람이 [주님이 부활하셨어! 그래서 나도 부활에 동참하게 돼! 이게 내게 최고의 자산이라고!] 한다면 미친 줄 알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입니다.
주의 부활처럼 우리 인생에 영광이 되고 보화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보화는 어떤 세상의 보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과 영광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부활의 영광, 그 기가막힌 역사를 체험 하기 위해 사모하고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고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십자가의 주님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있으므로 나는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영이 내 안에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모든 열매가 맺힙니다.
사랑, 기쁨, 능력, 헌신, 자유, 해방, 거룩함의 열매들이 속에서 올라옵니다.
생수의 강이 넘칩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주님을 아는 사람은 내 힘으로 노력하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냥 너무 벅차기 때문에..내 안에 거하시는 주를 바라만 보고 있으면
놀라운 일을 주님께서 계속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렇게 꼴보기 싫고, 무섭고, 하던 것이
‘왜 없어지지?’ 할 정도로 나도 모르게 서서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본은 내가 뭘 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그 역사를 내가 믿고 받아들이느냐 그리고 고백하고 신뢰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약속의 말씀인 에스겔서 36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에스겔 36:20~28)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서 36장에는, 세상의 성공을 위해, 자아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마귀에게 신음하며 영적으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회복시키시는 이유는..너희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할 때,
사람들은 항상 ‘나같이 못되고 더러운 것을 어떻게 사랑하실까..’
하면서 자신의 행함에 기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과 꺼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나의 조건에 속한 어떤 것을 가지고 우리가 가진 긍지의 근거를 삼으려고 한다면..
‘나는 착한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한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오실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이 봉사하고, 노력한다 해도, 아무리 많이 울고 회개한다고 해도..
그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일으킬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것이지
나의 어떠함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성품. 거기서 모든 것이 옵니다.
그래서 너희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룩한 이름을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그들을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고토, 옛땅, 가나안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는 마태복음 5장 5절의 말씀은 온유한 자가 부동산 투기에서 성공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음이 낮고 부서지고 상한 자, 심령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자는 가나안 땅, 약속의 땅 천국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그처럼, 고토. 옛 땅, 가나안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는다는 것은
천국을 누리게 된다는, 생수의 강이 심령에 흐르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고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너희 속’ 이라는 구절입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는 이런 약속이 없습니다. 구약에는 ‘너희 속’ 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위에서 여러번 말했지만 구약에는 아직 죄사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에 잠깐 능력을 주실 수는 있을지라도..
죄가 가득한 사람들 속에는 거룩한 성령께서 들어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 달리시고.. 부활하시자..
‘너희 속에 내 영을 주겠다. 새 마음을 너에게 주겠다
육신에서 굳은 마음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 준다.‘
하시는 이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할 것이다..’
하셨는데, 그래서 주의 영을 받은 이들은 온유하고..
내면에 주의 영을 받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강팍합니다.
외적인 권능만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격이 사납고 툭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속에,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우리 속의 굳은 마음이 사라지는데..
이 굳은 마음이 모든 악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밭의 비유를 보면
길가밭이나 돌밭은 기본적으로 굳은 마음입니다.
길가는 세상에 마음이 열려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마음이 굳고 완악해서 백번 천번 이야기해도
새들이 먹어버려서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돌밭같은 상태에서도 조금만 햇볕이 들면 뿌리가 말라버려서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너희 속에 거하시면
굳은 마음을 제하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는 심령의 천국..
가나안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 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외적인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 힘으로 아무리 애써 지킨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죽고 죄성이 죽지 않으면 율법을 지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겉에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속은 여전히 옛사람, 아담의 상태인 이들은
몰래 숨어서 죄를 즐기게 됩니다.
예배 때는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예배가 끝나면 바로 세상의 즐거움 찾으러 갑니다.
이것이 많은 사역자들, 성도들의 상태입니다.
신앙이라는 행위와 신앙 바깥의 행위가 나뉘게 됩니다.
교회와 신앙 안에서는 경건하지만 밖에서는 여전히 세상에 속한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신앙과 비신앙의 영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에서 완전히 이중적인 다른 삶을 살아야 하니 피곤한 인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거듭나지 않아서 내 속의 소원이 바뀌지 않은 상태..
나의 중심의 소원은 아담의 소원이고..육신의 쾌락과 죄의 쾌락, 음란과 먹는 것과 사랑받고 으뜸되는 것을 좋아하는 그것이 내 속성인 상태..아무리 금욕을 하고 고행을 해도 속성이 바뀌지 않고..
아무리 나를 치고 또 쳐도 죽지 않는..이것이 바로 구약의 삶인 것입니다.
외적인 행위만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속은 바뀌지 않고 외적으로만 행하려니 신앙 생활이 힘들고 지치고 곤고해 집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하면..
마지막 때에 ‘너희 속에’ 새 마음을, 새 영을 준다는 것입니다.
너의 속에 나의 신, 나의 영, 부활의 영이 거할 것이고..
우리 인격의 가장 깊은곳에 그영이 들어와서 내소원이 바뀌게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부터 어떤 변화 생기는가 하면..
율법이 즐거움이 되고, 놀이가 되고, 취미가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지켜지고
내 소원이 바뀌어서 율법을 즐거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에 보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열매가 없으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여기까지 얘기하면 이제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열매는 맺어야 하는데..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버린다고 했는데..
그러면 과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먼저,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위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면 백체 중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겠지요.
율법의 기준, 복음서의 표준을 우리는 지킬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새 영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 그 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걸 해야지. 꼭 지켜야지.’
하고 머리로 계획하고 생각해서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놀라운 것은 점점 내 속에서 율법을 즐거워하고 지키게 되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속사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예전에 싫었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성경말씀이 꿀같이 달고, 예배와 기도가 즐거워집니다.
그리스도를 나누면 행복해집니다.
술, 담배, 티브이, 세상문화, 음란.. 이런 것들에 접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힘들어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죄가 싫어지고 더러운 것이 싫어지고, 거룩한 것, 순결한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악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싫어지고 가까이 가기가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려고 할 때는 긴장이 되고 힘들고 지치게 되는데, 속에서 생명이 바뀌니 자연스럽게 악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사랑해야지..’ 그러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실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부활사건이 얼마나 놀라운지.. 놀라고 감탄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 안에서 새로운 소원들이 일어납니다.
거룩해지려고 스스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거룩한 분이 내 안에 거하실 때, 거룩한 소원이 올라옵니다.
순결함. 청결함. 온유함. 사랑...놀라운 것이 속에서부터 계속 일어납니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열조에 준 땅, 가나안. 약속의 땅.. 심령에 엄청난 영광의 천국이 열리는 땅..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주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셨던 역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피조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곧 신부와 용사의 사명이 다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너희 속에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약속, 생수의 강. 그 모든 약속과 예언이 실현되고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내주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실제를 아는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마음이 아름답고 겸손해 지고 쉽게 사죄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눈이 열리고 죄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내가 벗은 것이 보이고, 수치스럽고 또한 남의 죄가 보이고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하와에게 탓을 돌리고 책임을 전가하게 되었습니다.
혈기와 두려움은 같이 역사하기 때문에 남을 저주하고 미워하고
핑계를 돌리는 동시에 무서워서 벌벌 떨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죄가 보이고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은 아담의 저주 안에 있고
옛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 화가 나고 꼴보기 싫은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믿어 알고
속사람의 일어남을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굳은 마음이 제해집니다.
완악한 마음이 제해지고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집니다.
그 부드러움 속에서 평강, 사랑, 기쁨, 자유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를 느끼게 되기 때문에 배후의 악령들은 대적하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불쌍히 여기게 되고 기도하게 되며 사랑과 은혜의 통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죄의 세력을 멸하시고
부활의 생명,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넘어지고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을 계속 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10~14)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의 육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육체가 숨쉬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육의 생명이 실제로 죽을 때 까지는 육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꽃꽂이를 하기 위해서 꺾어서 병에 꽂아놓은 꽃은
살아있는 것일까요? 죽은 것일까요?
뿌리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에 꽂아 놓으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잠시 동안은 참 아름답지만..
그러나 점점 시들어져 죽을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 예수님도 죽으셨고, 함께 못박힌 우리도 죽은 것입니다.
우리 육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몇십년 동안은 살아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어리석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을 따라 그렇게 살아갑니다.
어차피 썩어서 흙이 될 몸인데 몸이 조금만 아파도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육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뿌리에서 끊어진 꽃처럼
우리 육신의 옛사람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미 죽은 것이므로
그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의 소욕에 순종치 말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로마서 8:1~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장에는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육신은 겉사람이며 영혼은 속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이들에게는 그들 안에,
가슴 곧 심령 속에, 속사람이 뛰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 겉사람도 여전히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겉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고, 사망에 속한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겉사람, 환경을 따라 살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승리의 비결은 속사람, 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의 왕, 영광의 왕이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그 왕을 붙잡으면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왕을 붙잡지 않고 육의 필요, 육의 소원에 따라 육 중심으로 육의 재미를 위해서 애쓰면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분이 좋든 말든. 내가 피곤하든 말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움직이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 세상의 검색이나 지식, 유행에 따르지 말고
시선을 내 안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마음을 두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사는 자 즉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앞부분의 말씀은 육신, 바깥 사람, 겉사람, 세상의 지식과 유행에 따라 살면 죽는다는 의미인데..
뒷부부분의 말씀..‘영으로 육의 행실 죽이면 산다.’ 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육의 행실을 죽이기 위해서 애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속사람.. 내 심장에, 내 안에 거하시는 내주하시는 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흥분하고 화나 났을 때에도.. 가만히.. 잠잠히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
‘왜 너는 평안을 잃었느냐.. 내가 네 안에 있다..내가 새 일을 행할 것이다.’
하시는 주님의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그리고 흥분이 가라앉고 혈기가 사라집니다.
잠잠하면 내 속사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때이든지 잔잔하게 내 속사람.. 내 속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으로서 육의 행실 죽이는 것입니다.
심장에 집중하고 있으면 육체의 행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음란, 증오, 그 어떤 죄의 소욕이 일어나도
심령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바라보고 주님을 구하고 있으면
아침 햇살에 안개가 사라지듯 어느 새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심령에 울려퍼지는 그 전능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급하고 거칠고 굳고 사나운 사람은 육의 열매를 맺지만
계속 집중해서 내주하시는 주를 부르고 찾고,
온종일 주를 먹고 마시고 구하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싶지가 않게 됩니다.
죄가 너무 싫고, 더러운 것이 싫어집니다.
무소유가 좋고, 자유함이 좋고, 편안함이 좋고, 소박한 것이 좋고, 가난한 것이 좋고..
풍부와 빈핍에 일체의 비결을 알게 됩니다.오늘 죽어도 괜찮고..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것이 속사람에서 오는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전한 승리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미 끝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스스로 선택하신 길이었습니다.
자원하여 스스로 마귀에게 자기를 넘겨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천군 천사들을 불러서 마귀를 진멸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셔야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귀는 예수께서 세상을 구하러 오신 것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 절하고 경배하면 천하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쉬운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 모진 자신의 고통만이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을 마귀에게 넘기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존재인 마귀에게 자기를 의탁하신 것입니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제한없이 자신을 넘기셨기에
마귀는 모든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께 고통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가시의 길이가 손가락 길이 정도입니다.
이 가시가 머리를 깊이 파고 들었고 머리에서 흐른 피가 얼굴을 덮었습니다
예수께서 맞으신 채찍은 끝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로마의 채찍형은 매우 잔인한 형벌로 알려져 있는데..
채찍의 끝에는 쇠구슬이나 뼈 조각이 박혀 있어서, 채찍으로 몸을 때리면 살점이 찢겨 떨어져나가고 혈관과 뼈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고.. 이 채찍질의 형벌을 당하다가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채찍이 예수님의 온몸을 감았습니다.온 몸의 살점이 찢겨지고, 선혈로 낭자하여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되셨습니다.
그 고통은 주님이 스스로 선택하셔서 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모든 고통을 다 겪었으니.. 너희들은 당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죽었으니 너희는 더 이상 죽음의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모든 죄의 짐을 담당했으니, 너희는 더 이상 자책하고 괴로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육을 위해 살지 말라고 나의 꿈,
나의비전, 나의이상형, 그런 것을 위해 살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쓰레기 같은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육 때문에, 내 멋대로 사는 그 삶 때문에 예수께서 죽으셨는데
다시 그 속에 빠져 살아서는 안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죽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 잔인함을 몸소 겪으신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을 위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기 위한 것입니다.
찢겨져야 부활하실 수 있기에, 찢기신 것입니다.
그의 찢기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고..
이제 그 분이 일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 다시 일어나심...그것이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인 것입니다.
그 분이 일어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예수님을 죽음의 고통에 이르게 한 그 육체의 삶을 더 이상 살면 안됩니다.
옛아담의 삶을 더 이상 살면 안됩니다.
내 자존심, 내 꿈, 내 비전, 나의 희망, 나의 애정.. 그것 때문에 예수가 죽으셨으니
더 이상 그것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삶을 더 이상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내 멋대로 살던 아담의 삶, 악한 삶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부활의 삶. 새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스겔. 47장을 잠깐 읽겠습니다.
(에스겔 47:1~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47장에는 성전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전 우편에서 물이 스미어 나옵니다.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처음에는 발목까지 차오르고, 그 다음에는 무릎, 허리..
이렇게 점점 불어나서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됩니다.
그리고 강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흘러내리는 물로 바다의 물이 소성함 얻고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이 물은 무엇일까요?
성전에서 왜 물이 흘러나올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마태복음 27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7:45~53)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며 크게 소리지르시고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는..
‘휘장은 곧 예수님의 육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약의 성전은 바깥뜰과 성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바깥뜰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고
성소에는 이방인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소도 지성소와 성소.. 두 개로 나뉘어있어서..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7월 10일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대제사장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기 위해 가운데에 휘장이 있었는데
예수께서 소리 지르며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 가르는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휘장이 얼마나 두꺼운지.. 장정의 힘으로도 찢을 수 없고,
힘센 사나운 말 네 필에 묶어 달려야 찢어질 정도로
두꺼운 휘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소리 지르며 돌아가실 때 그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것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예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전의 휘장, 곧 예수의 육체가 찢어지고
성전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은 무엇일까요? 휘장이 찢겨지고, 예수가 찢겨진 곳에서 물이 흐르는데, 그 물은 어떤 물일까요?
바로 보혈의 강물입니다. 보혈의 강물이 성전에서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보혈의 강물은 곧 성령의 강물입니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시니 성령이 임하셨고, 갈보리 후에 오순절이 온 것입니다.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에
처음에는 발목, 무릎, 나중에는 허리까지 잠깁니다.
이것은 성령에 사로잡힌 삶을 의미합니다.
보혈의 강물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 강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는 것은..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 부활의 강물에 사로잡혀서 뒤덮힌 사람이
생명을 소성케 하는 도구가 됨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36장의
‘나의 신을 네 속에 두고’
요한복음 7장의
‘네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리라’
이 말씀은 결국 십자가와 보혈, 부활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죽으시고 다시 일어나셔서
‘이제 이 물..나의 보혈의 강물, 성령의 강물을 마셔라..
이 물을 마시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이 물에 사로잡혀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보혈의 강물이 흘러가는 곳에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영이 살아납니다.
가나안이 우리 심령 속에 일어납니다.
보혈의 강물을 통해 옛사람이 장사지낸 바 되고 다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그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다 이루신 성령의 강물..
그리고 그 강물에 사로잡힌 사람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와 사망과 저주는 아담으로 인하여 온 것입니다.
내 꿈, 나의 고집, 내 혼의 생명을 따라 사는 것 때문에 모든 저주가 온 것인데,
생수의 강이 넘쳐나면 생명이 시작되고..
이제 죄와 사망과 저주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피흘리게 한 옛 사람의 삶을 더 이상 살면 안됩니다.
육의 만족, 눈과 머리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상의 헛된 것에 내 삶을 낭비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일어나도록 기도합시다
성질내고 화내는 것이 죄가 아니라 내 맘대로 살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내 멋대로 살기 시작하면 불안, 짜증, 속상함... 모든 것이 다 따라오게 됩니다.
육의 삶. 아담의 삶. 바깥의 삶을 청산하는 기도를 합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서 넘치게 하소서
더 이상 육을 따라 세상 따라 살지 않고 예수 생명, 생수의 강을 따라 살게 하소서
내 멋대로 사는 삶. 죄에 대해 관용하며
‘이 정도는 괜찮아..’ 하는 삶. 이 육의 삶을 버리겠습니다
영광의 주님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비참하게 했던 죄의 삶을
이제 더 이상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을 추구하고 찾겠습니다.
복음의 기본에 대해서 다시 보겠습니다.
보혈
십자가
부활
이 보혈과 십자가와 부활.. 세 가지를 알면
성경 전체의 틀을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 성경의 진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잔인한 마귀에게 넘겨주시고
저주와 죽음과 고통과 멸시를 받기로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맘대로 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마귀에게 넘겨주는 죄인 것입니다.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될거야.. 유명한 사람이 될거야..
세계적인 스타가 될거야.. 나는 착하고 뭐든 잘하는 사람. 될거야..
그런 꿈들 때문에 예수께서 찢기신 것입니다.
고통하기 싫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 고생하기 싫은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사는 것 때문에 예수께서 멸시와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중독의 증상이 있는데
사실 중독이란 마귀가 ‘내가 너의 주인이다.’라고 말하는 표식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중독되고 끊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 영역은 마귀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멋대로 살면 주님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공백에 마귀가 와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맘대로 살면 절대 자유롭지 않고 끊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있게 됩니다.
그것은 자유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입니다. 마귀에게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 노예의 삶을 살지 말라고 주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육에 속한 삶인지, 무엇이 저주인지 분명히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세상에 선한 사람,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보기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마귀의 소유인 것입니다.
그가 마귀와 정면 대결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가 잠시 놔두고 있을 뿐이지
주님께 소유되지 않은 삶은 다 비참한 인생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오직 여기에 우리 의로움의 근거를 두십시오.
예수께서 장사지낸 바 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직 여기에 나의 모든 보화됨을 두십시오.
오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가장 기쁜 소식이고 지구의, 온 우주의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 사건 떄문에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보화의 근거, 기초는 부활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고 부술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 하는 것도..
그 예수 권세는 사망 권세 이기신 부활로 인해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와 능력을 부술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마귀 백만마리가 다가와도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가 계신다. 사단아 떠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의 근거는 내 속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부활”
“부활하신 예수”
“내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 분이 내 안에 거하신다”
오직 이것이 능력의 비결입니다.
‘마귀야, 저주야, 재앙아,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라.’
하고 명령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사망은 모든 저주와 재앙 중에 가장 큰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사망의 권세를 파괴하셨습니다.
이 사망의 권세를 부수신 부활이 우리의 모든 능력의 근거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면 마귀를 부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 영을 우리 안에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모세를, 엘리야를,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부러워하고..
구약의 유명한 인물들을 부러워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구약의 사람들은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약속만 받고, 언젠가 이뤄지기를 사모하고 바라보고 고대하던 그 보화를
우리는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에 속한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
신약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 큽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왕의 왕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 붙어서
그 새 생명의 영광을 누리겠습니다.
부활하신 강물에 사로잡히겠습니다.
더 이상 육의 소욕, 바깥의 소욕을 좇지 않고
내 안의 예수를 붙들겠습니다.
성전의 강물, 보혈의 강물, 생수의 강을 따라 살겠습니다.
주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주의 역사가 나의 역사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고 승리하신 주의 역사가 내 안에 거합니다
예수의 부활의 역사가 내 안에 있습니다.
마귀를 부술 능력이 내 안에 있습니다.
사단아 떠날찌어다~!!
세상에 아무리 기쁜 소식이 있어도
천사들은 꼼짝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아침에 주께서 올라오실 때
온 천국의 천사들이 기뻐 뛰고 찬양하고
모든 스랍들, 천군 천사가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이제 우리 것입니다
우리의 옛 생명 아담의 모든 죄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습니다.
꽃꽂이의 꽃이 살아있는 듯 보여도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와 함께 죽었다가 같이 살아났습니다. 내 육이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육이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혔음을, 이미 저주가 끝났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어떠함에 집중하지 마세요..
내 기분의 좋고 나쁨에, 내 상태의 어떠함에,
눈에 보이는 환경에, 일희일비 하지 마세요.
십자가가 모든 저주와 수치를 씻습니다. 부활이 모든 승리의 근원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도 부활합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못 되었나 . 내가 부족한가가 중요하지 않고
그 분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 분이 죽고 우리가 같이 죽고 부활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끝나고, 부활에서 우리의 모든 의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너무 희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합니다.
육을 따라 사는 게 복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 사고방식, 마법, 육적열심, 세상의 마케팅, 성공 방식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으로 사는 것이며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따라 살면 우리 육이 죽은 것을 잊어버리고 마귀에게 속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육이 죽었다고 믿고, 바깥을 바라보지 않고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그 분을 따라 살면
무한한 생수의 강, 젖과 꿀이 흐르는 역사가 우리 안에 넘치게 됩니다.
기가 막힌 보화가 내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렇게 행복하고 좋다니..
너무 좋으니까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전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마음이 우리 안에 일어날 때
주께서 비로소 ‘그러면 네가 아는 사랑, 네가 깨달은 것을 전해줘라.’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가 계시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가 역사하신다”
믿음으로 계속 고백하고 시인하십시오.
주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삶입니다.
내 안에서 이 속사람이 계속 일어나는 꿈을 꾸십시오.
세상의 것을 얻었다고 좋아하고 기뻐하면 그것은 묶임이고 노예생활입니다.
속사람이 눈을 떠서 하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것인지
예수가 일어나면 얼마나 기가 막힌 설레임이 일어나는지..
세상은 우리의 길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 심령에 역사하는
그리스도 ! 그 분을 따르는 삶은 성공한 삶입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운지 즐거운지 모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그리고 나도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다는 것.
주께서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죽은 것이고,
주께서 혼자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고,
예수께서 다시 일어나실 때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영을 내게 내안에 내심령 속에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영을 내게 내안에 주셨습니다.
내 안에,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사십니다.
거듭남은 부활하신 주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 죽음에서 일어난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의 영광을 우리는 이 땅에서도 누릴수 있습니다.
복음을 깨닫는 그 순간부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한 그 순간부터 내주하심이 시작 됩니다.
꽃꽂이 꽃이 죽은 것처럼 우리는 죽었고
주님의 새 생명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부활...
매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이
이렇게 놀랍고 감격스럽고 기가 막힌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 앞에..
내가 무엇을 했든 잘했든 못했든 그러한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이구나..!!그래서 기쁜 소식이구나..!!
어떤 고행과 애씀과 노력으로도 이길 수 없는 죄성..
뿌리 깊은 이기심과 자아 중심과..
그 누구도 헤어날 수 없는 그 지옥의 저주와 사망의 세력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소멸되었구나..!!
아...!!!
이렇게 놀라운 소식이 있을수가..!!
이렇게 기쁜 소식이 있을수가..!!
성경이 이렇게 놀라운 책이라니..
요한복음 7장
로마서 8장
에스겔 36장
에스겔 47장
이 말씀들이 모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입니다.
죄와 사망의 세력을 꺾으신 부활생명.. 그 영광의 소망에 관한 말씀 입니다..
새 영을, 새 마음을 주신다는 약속..생수의 강..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이 모든 약속이
심령에 영광의 천국이 열리는 것..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그 말씀 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들 ..
이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 ..
이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었다니..
이 모든 것이 이미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니
내 안에 이 놀라운 주님이 거하고 계셨다니..
나의 예수님..
주님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우시고 경이로우신가요..
이전에는 한갓 썩을 나의 육에 일희일비했지만
이제는 나를 향한 시선을 버립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경배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이 모든 약속의 말씀들을
나는 이제 믿고 받아들이고 신뢰합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
더 경험하고 더 깊이 알아가는 것..
이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이고 사명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더욱더 충만하게 열매맺게 하소서
부활의 생명이, 생수의 강이 더 충만하게 나를 사로잡으소서
새 생명의 역사가,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충만하게 일어나게 하소서
바깥의 헛된 소망 품지 말고, 영원한 소망을 충만하게 일으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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