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미끼
제목 : 칼럼
<< 내용 >>
깊은 사색의 글을 많이 남긴 알랭의 글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한 노파가 바람에 꺾여진 꽃가지를 세워 받침대를 대고서 실로 묶어주는 것을 창 너머 로 본다. 꺾어진 꽃가지를 묶어준다 해서 살아날 리는 없다. 하지만 그 노파는 꽃의 생사문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고 묶어주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알랭은 꽃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거기에 인간성을 투사하지 않 을 수 없는 인간의 오묘한 심성을 보아낸 것이다. 꽃이나 나무 같은 식물(植物)에 투사되는 이 같은 인간주의 플랜트와 휴머니즘을 합자 (合字)하여 플랜튜머즘이라는 말을 만들고 있다. 그 인간주의가 벌레나 새나 짐승에 투사되었을 때는 애니멀류머니즘이 되고 물론 사전에는 없는, 자신의 사색을 위해 자 신만이 쓰는 말이다. 수년 전 미국 중부의 과수원업계에서 가지가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를 열리게 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을 위해 사과나무를 학대하는 일이라 하여 자숙하는 운동이 벌 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플랜튜머니즘이라는 말을 찾아내어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지(大地)'의 작가 고(故)펄 벅 여사에게 한국 여행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물 었을 때의 대답이 생각난다. 소달구지에 짚단을 싣고 소를 모는 한 농부가 역시 짚단 을 가득 지게에 지고 가는 장면을 보았을 때라 했다. 등짐을 소달구지에 얹고 갈 수도 있을 텐데, 소의 노력(勞力)을 감안하여 굳이 지고 가는 그 농부의 애니멀류머즘을 예리하게 보아낸 것이다. 그 등짐을 얹어서 소가 힘이 들지, 안 들지는 별개의 문제다 . 더 힘이 들 것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아름답느냐는 것이다. 황희(黃喜)정승이 길을 가다가 밭을 갈고 있는 두 마리의 소를 보고 농부를 불러 어느 소가 더 밭을 잘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귀엣말로 대답했다는 고사(故事)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소를 불쾌하게 하 고 싶지 않은 애니멀류머니즘의 아름다운 발로를 그에서 보는 것이다. 근대화는 이 같은 아름다운 심성마저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있는 것 같다.
플래스틱으로 꿈틀거리는 가짜 미끼를 만들고 고기에게까지 사기치는 것도 뭣한데, 이 제 멀리까지 향기를 풍기게 하여 고기떼를 유인하는 가짜 미끼가 나왔다고 한다. 고기 에게 사기를 치건 말건 낚아올리는 결과 측면에서 피장파장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기 입장에서 보면 죽고 사는 중대사인데 사기까지 당해가며 죽는다는 것이 너무너무 억울하여 얼마나 사람을 원망하겠는가. 낚시는 본질적으로 사기이긴 하지만 유혹하는 먹이쯤은 실물이게 하는 것이 애니멀류 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