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범람사
제목 : 칼럼
<< 내용 >>
한강의 홍수는 116년 백제 기루왕(己婁王) 때 큰 비로 물이 넘쳐 많은 사람과 집을 떠 내려가게 했다는 것이 기록상 처음이다. 고려 인종(仁宗) 때는 한강에 홍수가 나 인가 (人家)가 묻히고 떠내려가길 헤아릴 수 없었으며, 봉은사(奉恩寺) 고개까지 물이 넘쳐 들었으며 국학(國學)이 있는 데까지 물살이 들어와 경사(經史) 백가어(百家語)의 전적 이 떠내려갔다고 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거의 1~3년 터울로 한강 홍수가 일어나고 있다. `마치 물을 붓듯 큰 비가 내리더니 도성 안에 물이 넘쳐 종로의 종각(鐘閣)에서 동대문까지 한길을 넘 겼다'느니, `성안의 크고 작은 도랑이 모두 넘쳐 시가지는 내를 이루어 그 물에 쓸려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인경궁(仁慶宮) 앞다리가 무너졌기 때문에 한꺼번에 14명 이 빠져 죽기도 하여 곡성이 성안에 찼다' 고도 했다. 도심까지 침수한 홍수 사례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홍수를 둔 한강의 민속도 다양했다. 광나루 인근 한강에 세고탄(洗姑灘)이라는 여울이 있다. 예로부터 아낙들의 빨래터로 세조 때 학자 서거정(徐居正)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던 현장이다. `강가에서 빨래하는 색시 얼굴이 꽃과 같은데/아침에 흰 발을 씻으니 눈빛같고/저녁에 흰 발을 씻으니 서릿발 같네/소아(素娥:月宮의 仙女)와 강비(江妃:龍宮의 神女)가 시 샘을 하니/문득 미친 바람이 일어 천지가 어두워지고/굵은 비 쏟아져 홍수가 지나 갈 바를/모르네.' 세고탄에서 빨래할 때 미끈한 팔다리를 내놓지 못하도록 하는 터부(禁忌)가 예로부터 있었으며 서거정이 이에서 시상을 얻었음직하다. 그 아름다운 팔다리를 시샘한 달과 강의 선녀가 공모하여 홍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잦았던 한강 홍수와 부녀자의 수족 노출에 대한 윤리적 제재가 야 합한 한강 민속이랄 수 있다. 또 한강 도미진(渡迷津) 복판에 소용돌이치는 여울이 있는데 한강 홍수에 얽힌 비가( 悲歌)가 서려 있는 현장이다. 한강 홍수에 젖먹이 아기를 살리려 높이 떠받치고 떠내 려 오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떠받친 채로 굳어 아기는 살아 울 어대다가 이 여울목에서 마저 물 속에 함몰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 배가 이 여울목에 이르면 아기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에 홀 려 소용돌이 속에 말리게 된다 해서 도미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상류에 그 많은 댐을 건설하며, 수량을 조절하는 데도 한강의 비가는 끊이질 않고 있다. 일일간 강우량 3백~4백 밀리미터로, 이 지경이라면 동남북아에서 하루 1천 밀리미터 강우량 이 적지않은데 우리 나라에 그 비구름이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황하(黃河 )를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는 옛 말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