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이재훈 <7> 갖은 환자 진료… 공중보건의 경험이 의료선교 큰 도움

열려라 에바다 2017. 11. 16. 08:22

[역경의 열매] 이재훈 <7> 갖은 환자 진료… 공중보건의 경험이 의료선교 큰 도움

포경수술부터 산부인과 진료까지… 내 부족함 채우시려 현장에 던지신 것

 

[역경의 열매] 이재훈 <7> 갖은 환자 진료… 공중보건의 경험이 의료선교 큰 도움 기사의 사진
이재훈 선교사가 1993년 영천 군의학교에서 군복을 입고 훈련 준비를 하고 있다.

박카스를 들고 온 남자가 말했다.

“이재훈 선생님 되십니까?” “예, 제가 이재훈입니다.”

“선생님께서 돌봐주시던 위암 말기 환자 기억하시지요. 제가 그분의 아들입니다.”

그는 위암 말기로 수술도 포기하고 죽음만 기다리던 자신의 아버지를 잘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더니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선 예의를 갖춰 인사하더니 돌아갔다. 다음 날, 갑자기 도청에서 연락이 왔다.

“이재훈 선생님 맞으시죠? 기사 보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신문을 보니 내 이야기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환자의 아들이 경남지역의 한 일간지 기자였던 거다. 의도치 않게 주목을 받게 됐다. 도청에서는 내게 무언가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기에 딱히 요청할 것도 없었다.

도청에서는 그 후에도 몇 번 더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도지사님께서 선생님 하신 일에 감동을 받아 무엇이라도 해 드리라고 하십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말씀만 해 주십시오.” 간곡한 도청 직원의 목소리에 혹시 요청할 만한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당시 아내와 나는 신혼이었다. 아내도 당시 하고 있는 일이 있어 과천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아내가 혼자 있는 것이 무섭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내게 전화를 건 도청 직원에게 “혹시 아내와 가까운 곳에서 군복무를 마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정말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해본 얘기였다. 그런데 설마가 현실이 됐다. 군복무 규정상 근무지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나의 일화를 인상 깊게 여긴 도지사가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편지를 써준 덕분에 근무지를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예천 산골마을을 떠나 수원 가족계획협회에 새로운 둥지를 텄다.

가족계획협회에서도 ‘찾아가는 이동진료’는 멈추지 않았다. 경기도 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선천성심장질환검사도 했고, 포경수술이나 정관수술도 했다. 예비군들이나 민방위 훈련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 포경수술이나 정관수술을 하면 훈련을 빼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하루 수십 명씩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빠른 시간 내에 수술을 끝내야 했기에 서너 명씩 수술대에 눕혀 놓고 기계처럼 수술을 했다. 간단한 수술이긴 했지만 마음속에 수술에 대한 두려움 대신 자신감이 자리 잡게 된 중요한 시기였다.

또 돈이 없는 환자를 위한 분만실도 있었는데 조산사들이 분만하는 것이나 산부인과 선생님이 제왕절개 하는 것을 보고 돕기도 했다. 경기도 내 직업여성들의 정기적인 성병 검진도 담당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외과의사인 내 커리어에 어떤 도움이 될지 상상도 못했다. 다만 내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하지만 현재 마다가스카르에서 오지 진료 때 가장 많이 보는 환자 중 하나가 성병 환자고, 산부인과 수술도 자주한다.

만약 그때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 지금 이 순간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선 의료선교사가 되겠다고 겁 없이 서원했던 내 약속을 지키게 하시려고 이곳저곳으로 날 끌고 다니신 듯하다. 나의 모자람을 채우시려고 현장에 나를 던지신 거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