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이재훈 <8> 르완다 병원장 “방해하지 말고 구경이나 잘하게”

열려라 에바다 2017. 11. 17. 08:21

[역경의 열매] 이재훈 <8> 르완다 병원장 “방해하지 말고 구경이나 잘하게”

2001년 첫 아프리카 단기 의료선교, 동양인 의사 못 미더워하는 기색 역력

 

[역경의 열매] 이재훈 <8> 르완다 병원장 “방해하지 말고 구경이나 잘하게” 기사의 사진
이재훈 선교사(왼쪽)가 2001년 르완다 르메르 루코마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나는 빠릿빠릿한 편은 아니었지만 고집스럽게 꾸준한 면은 있었다. 레지던트 시절, 동료들로부터 “재훈이는 로봇인가 봐”라는 얘길 듣곤 했다. 쉽진 않았다. 그래도 그때 나는 늘 ‘힘들어서 쓰러져 죽어도 좋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 있었다.

레지던트 1년차 시절엔 침대에 누워서 잔 시간이 일주일에 12시간이 채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머리든 몸이든 어딘가 기댈 곳만 있으면 졸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병동 이리저리를 하도 많이 다녀서 끊임없이 진물이 난 발 뒤꿈치 부분이 딱딱해져 부러질 정도였다.

주일 성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외과 병동에는 채플실이 있었는데 아침에 커피 한잔 들고 채플실에 잠시 앉아 있는 것으로 부족한 신앙생활을 메운다고 합리화하며 지냈다. ‘상황이 이런데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기엔 하나님이 ‘저 괘씸한 놈’ 하며 불호령이라도 내리겠다 싶었다. 이러다가 전문의 시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4년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속 좁은 분이 아니셨다.

2001년엔 르완다 내전 당시 현장에서 의료봉사를 했었던 세브란스병원 외과 선배님의 소개로 단기 의료선교를 다녀올 기회가 왔다. 르완다행 비행기 안에선 드디어 아프리카에 간다는 기대감에 나도 모르게 들떠 있었다. 하지만 르완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대감은 오싹함으로 바뀌었다. 총을 든 군인들의 날카롭고 살벌한 눈길,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검색과 검문. 게다가 마중 나오기로 했던 지인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다리는 제멋대로 후들후들 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한 지인을 따라 지옥구덩이 같던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가 일하게 된 르메르 루코마병원은 수도 키갈리와 제2도시 기타라마 중간 지점에 있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사건 당시 반군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병원 내 시설은 열악하다 못해 참혹했다. 환자를 수술하는 데 필요한 재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야말로 진료 자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할 판이었다.

나의 기대와 포부가 무안하다 싶을 만큼 현지 의사들은 한국에서 온 동양인 의사를 반기기는커녕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장도 환영 대신 다른 의사들 방해하지 말고 병원 구경 잘하라는 말을 건넸다. 일단은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가지가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말씀을 묵상했다. 비록 무시당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주님께 잘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뇌며 그들 나름의 질서와 권위를 인정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환자가 들것에 실려 왔다. 응급실 당직 의사는 내게 X선 필름을 보여주며 환자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임마누엘은 장폐색 증세가 있었다. 시골에서 병원까지 오는 이틀 내내 아팠다고 했다.

“장이 심하게 막혔네요. 응급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응급실 당직 의사에게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 의사는 수술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퇴근 준비를 했다. 오후 4시에 전기가 나가기 때문에 수술할 수 없으니 내일 아침에 출근해 치료하겠다면서 말이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