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 수술을 해야 할 환자를 내팽개치고 퇴근을 하려 하다니. 한국 같았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맡긴 것은 수술이 아닌 ‘옵저베이션(관찰)’이었다.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당직 의사에게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내일 당신이 출근했을 때 환자는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른다”며 소리를 질렀다. 내 말에 잠시 망설이던 의사는 갑자기 나를 수술실로 떠밀었다. 나한테 수술을 하라는 것이었다. 전기는 병원에 있는 발전기를 돌려 해결해주겠다면서 말이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상황이 위중한 환자를 앞에 두고 내가 수술을 안 할 이유는 없었다. 당장 임마누엘의 수술에 들어갔다.
임마누엘은 장폐색증에 복막염 증세까지 있었다. 배 속을 열어보니 탈장이 일어나 이곳저곳이 막혀있었고, 장이 꼬인 부분은 터져 배설물이 배 속에 가득했다. 당장 배 속을 세척할 셀라인(식염수) 20ℓ를 갖다 달라 요청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져온 건 500㎖ 짜리 4개. 그것이 병원에 있는 셀라인의 전부였다. 아뿔싸! 아프리카의 의료 현실을 새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곳곳을 수돗물로 씻어내고, 네 병의 셀라인으로 마무리했다. 썩은 장을 잘라내고 일차봉합을 하기엔 복강 내 오염도가 심해서 ‘소장피부루’(배안에 균이 자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장을 피부 밖으로 나오게 해서 장이 다 붙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방법)를 만들었다. 임마누엘은 다음날 새벽까지 목숨이 위태로웠다. 새벽 한 시가 돼서야 겨우 안정된 것을 보고 귀가할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서둘러 병원에 오니 온 직원들이 임마누엘의 방에 와있었다. ‘아, 죽었나보다.’ 씁쓸해하며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임마누엘은 침대에 멀쩡히 앉아있었다. 알고 보니 병원 사람들은 임마누엘이 살아난 것에 놀라 병실 앞으로 몰려든 거였다. 그런 증상을 가진 환자가 수술해서 살아난 경우가 처음이었던 거다. 병원장이 날 불렀다.
“닥터 리. 이제부터 당신이 하고 싶은 수술 맘대로 하세요.” 그 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수술을 다했다. 현지 의사들에게는 의료 기술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드러났다. 어떤 사람도 치료할 수 있는 ‘올 마이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과 달리 외과 레지턴트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한국과 달리 전문과가 없어 만나는 모든 환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제왕절개도 했고, 다리 인대가 절단된 환자의 인대 접합 수술을 하기도 했다. 내 전문영역 이상을 뛰어넘는 환자들이 많았다.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의 르완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필요한 것이 확인되고 나니 목표도 확실해졌다. 다양한 분야의 의료지식과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후 강남과 신촌 세브란스에서 위장관, 대장항문, 간담도, 유방·갑상샘, 소아외과 등 5개 분야의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트레이닝 내내 아프리카 의료봉사활동을 하며 만나게 될 여러 유형의 질병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선교할 곳을 찾다가 한 나라를 만났다. 바로 마다가스카르.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재훈 <9> “지금 수술 안하면 환자 사망” 경고하자 수술 떠넘겨
여러 유형 환자 돌봐야 하는 현실 경험… 소아외과 등 5개 전문의 과정 마쳐
![[역경의 열매] 이재훈 <9> “지금 수술 안하면 환자 사망” 경고하자 수술 떠넘겨 기사의 사진](http://image.kmib.co.kr/online_image/2017/1120/201711200002_23110923851434_1.jpg)
이재훈 선교사(오른쪽 첫 번째)가 2001년 르완다 단기선교 당시 루꼬마병원 스태프, 선교팀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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