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성막의 구조

열려라 에바다 2011. 10. 18. 22:47

제 I장 성막에 대한 일반적 고찰

제 2절 성막의 구조

4. 성막의 구조
4) 성막에 대한 반 성서적 사상
이제까지는 성서적 입장에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고 나서는 반 성서적 사상을 가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성경 주석가들은 모세 오경의 저작자와 저작 연대를 파괴, 또는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성을 흐리게 한다. 그들은 오경의 문서설을 주장한다. 즉 오경은 J.E.C.P라는 단편 문서들을 모아 어떤이가 편집하였을 뿐,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경의 저작 또는 편집 연대를 포로시대 이후로 잡는다16). 그 자유주의자들은 웰하우젠(Wellhausen) 드라이버(Driver)와 파이퍼(Preiffer)...등이다17). 그들의 사상은 한국 기독교계에도 침투하여 자유주의 누룩이 부식되어 그 독소가 풍기고 있음은 통찬할 일이다.
그들은 오경 뿐만 아니라 기타 성경의 여러 부분들을 파괴하려 한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있는 성막에 대하여서도 성막의 제조와 제사장들과 제사의식에 관하여 P문서설을 내세운다. 즉 J.E.D에다가 제사법전을 추가한 과정이다. J.E.D.에 P.를 결합한 편잡자를 R피 라 부른다. R피가 편집한 장소는 바벨론(Babylon)이라고"한다. 또 그 편집 연대는 주전(B.C) 43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19). 그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하여서도 파괴하려 한다.
케일(Kyle)의 그의 책에서 "성막과 그것의 기구와 제사장의 옷들에 대한 근원지에 대하여 아무 이야기도 말하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적이고, 시대적으로 보아 그것은 바벨론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애굽적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를 나타내는 그 시대 성막문화가 증명한다. 애굽의 건축 안 마당이.. 현대에 증거가 된다. 고고학의 발굴자들에 의하여 잘보여 준다."20)고 했다. 또 그는 계속해서 "그것들은 애굽의 것과 같다. 즉 성막의 기구들과 제사장의 의상이 같다"21)고 했다. "그러나 이것들의 그 확실한 애굽의 특성은 바벨론(Babylon)의 영향 밑에서 성막의 기원을 만들어 후대에 출애굽기의 성막을 낳았다."22)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이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이 잘 말씀하고 있고, 또 선민 의식이 강하고 배외사상이 강한 그들이 애굽이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모방할리 없으며 하필 신광야에서 나와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동안 있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에 산 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았는가? 그들에게는 구태여 애굽의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변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상황으로 보아 애굽이나 바벨론의 영향이 아님이 확실하다.또 그것들이 애굽과 바벨론의 것과 대동소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동소이 하다거나 같은 것으로 이야기함은 큰 잘못이 아닐까?
또 자유주의 사상의 주류인 진화를 믿고, 초자연성과 계시성을 인정하지 안는 비신앙성에서 나온 오류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5)성막의 역사적 변화
성막의 이동 상황과 그 성막의 외형적인 변화와 성막의 기구들의 변화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학설들이 있으나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특별히 취급할 문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이다. 이 출애굽 시기에 따라 성막의 건조 시기가 크게 차이가 있다. 이 출애굽 연대에 대하여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니
할레이(Henry H.Halley)씨는 그의 "성경 핸드북"에서 두가지의 학설을 제시하고 독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긴다. 즉 "아멘호텝 2세(Aamenhotep II.1450-1420 B.C)와 메렌프다(Melenphtah,1235-1220년 B.C)로 만약 출애굽이 아멘호텝 2세의 치하에서 행하여 졌다고 하면 토트메스 3세(Thotmese III)는 이스라엘을 중압한 자로되고 그의 자매는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 자매가 유명한 할셉서트(Hatshepsut)여왕이다.... 만약 출애굽이 메렌프다의 치하이었다고 하면 이스라엘 사람의 대 압박자는 람세스 2세(Ramses II)로 그의 딸이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와같이 모세는 도드메스 3세의 치하, 또는 람세스 2세의 치하나 그 어느 사람에게 양육이 되었다"23)고 했다. 이에 대한 결판을 나린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Dictionary"와 Bible Dictionary는 "성막의 소개 날자는 1220 B.C경이라"24)고 했다. 즉 할레이씨가 내세운 두 학설 중에 후자를 택했다. 이에 반하여 "구약사기를 쓴 소안론 박사는 전자를 택하여 주전 1491-1451로 보았다"25).그러나 전자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연대의 차이가 있다. 김윤국 박사는 "구약 세계 역사"에서 주전 약 1450-1400년으로 잡고 있으며,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했다"26) 본인도 위의 연대가 합리적이고 실제의 연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고고학적인 증거는 본인의 "구약고고학"을 참고 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주전 1450년을 기준으로 하여 이하의 문제를 생각하기로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그림 : 시내산 출애굽기 40장 217절에 의하면 제2년 1월 1일에 시내산밑에서 성막을 건조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오랜시일을 소비하여 성막을 제조하여 세웠는지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았으므로 잘 알 수 없다. 물론 솔로몬왕이 세운 성전에 대하여는 제조 연대와 기한이 나타나 있다(왕상5장6장).그러나 이 광야에서 제조한 성막의 연대는 미지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행할 때는 법궤와 모든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이 메고 여행하게 했다(레4:5).이때 마다 레위인들은 레위인이 메고 여행하게 했다(레 4:5).이때 마다 레위인들은 각각 맡은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분해하여 가지고 운반했다(민 3:31-324:15).그 외에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옮기는 부분도 있었다(민 7:1-11).
우리는 성막 제조의 시간을 알 수는 없으나 그 성막이 제조된 후에 시내산 밑에 정주한 기간은 알 수 있다고 본다. 민수기 10장 11절에 의하면 제2년 2월 20일에 이동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막은 제2년 2월 20일에 이동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막은 제2년 1월 1일에 제조되었으니, 약 50일간 정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여행은 거기에서 시작되어 "아라비아 중심지인 호렙과 유다의 네게브(Negeb)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를 사이에 두고 무섭고 험한 광야를 따라 나아갔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의 세월이 요했다. 그들이 여행때 통과한 지명과 기한은 민수기 33장16-49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는 약 38년간의 세월이 요했다. 그때 성막은 37년간 여기에서 배회했다. 이 기간에 하나님께 정규적인 희생 제사를 드리지 못했다(암5:25).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하여 몇가지 밖에는 알수가 없다(민 10:33-36)27). 즉
첫째,하나님께서 행진케 하였고,
둘째, 대적들과 전쟁중에 있었고,
끝으로, 성막을 정상적으로 세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2) 가나안 정착
그림 : 가나안의 성소 / 므겟도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제단으로 현재의 지층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 마침내 요르단을 건넜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성막 안치의 장소이다. 그 장소는 (1) 사람들이 살지 않고,(2) 가능한 한 사람의 무덤들로 더럽힘이 없는 곳이라야 하는데 이런 곳은 여리고 근처였다. 그곳은 길갈로 알려진 곳이다(수4:195:109:610:643).길갈은 임시 장소였다. 그래서 마침내 성막의 이동을 단행했는데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졌다. 성막이 그곳에 정주하게 된 때는 여호수아 당시에 된 것으로 아는데 길갈에서 약 32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즉 길갈에서 실로로 이동한 것이다(수18:119:51).이 실로에 있을 때 성전(Temple)으로 되었다(삼상1:9-,수1:93;3).28)
이때까지 성막의 구조와 성막의 기구는 별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성막이 분해되고, 제단이 새로 건립이 되었다. 그 이유는 레위 자손이 분산되고, 그들로 인하여 새 제단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제단 분립의 시작이다(삿 19:1-31).벧엘에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다(삿20:29-). 이때에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삿21:19-).

(3) 실로의 멸망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초기에 가졌던 명성을 잃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했다. 사무엘서 초기의 블레셋과의 전쟁은 심히 파격적이었다. 실로에서 언약궤를 옮겨다 놓게 되었고(삼상 4:1-),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법궤와 같이 전장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상은 하나님이 법궤와 같이 계시고, 법궤가 움직이는 곳으로 하나님도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법궤를 전장에 나가고 제사장들이 전쟁에 나간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군사들의 신앙무장과 정신적인 사기의 진작을 위한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법궤에서 떠났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사기는 무용했고 그들의 기대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언약궤, 즉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고, 그 궤를 섬기던 두 제사장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앞에서 아무 도움이 없이 패하고 말았다..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서 망한 것이 확실하다.
실로의 파괴는 역사들이 암시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시78:60)라 하였으며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렘 7:12)고 함은 의심없이 실로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성막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 같으며 법궤와 성막이 놉에서 다시 만난다 29).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멸망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변혁을 가져와, 시간적인 신앙으로 돌아 간 것 같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 섰으며, 인위적인 면에서 신본주의로 돌아간것 같다. 그 증거는 대제사장의 성격이 상실된 것이다. 사무엘은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와 정치적인 지도자의 역활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반환되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명성과 영광을 위하여 행하신 것으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나타내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것 같다.
법궤는 벳세메스에 잠간 머물렀다가(삼상 6:19-)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여년간 있었다(삼상 7:12). 그런데 사무엘은 벧엘.미스바,라마와 길갈 등을 순회하며 그 뜰(안 마당)에서 예식과 공중생활과 형사상의 관리 등을 장악하여 시행하였다(삼상 7:15-17). 즉 이것은 지성소가 비 지역화됨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생활에 큰 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었으며 완전히 비 지역화 되기는 다윗왕 때가 분명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는 지역을 초월하신 신임을 직접 말씀하셨다(대상 17:1-15).

(5)놉과 기브온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요나단의 도움으로 망명해 온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자로(삼상 21:1-6) 아히멜렉은 사무엘 상 14장 3절에 나오는 아히야가 아닌가 생각된다. 놉은 예루스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나 떨어진 높은 곳으로 시온보다 90미터나 높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사울왕에 의하여 모든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아비아달 하나만이 (삼상 22:1)구원 받을 때까지 몇년간 있었다. 그후에 사울왕은 성막을 기브온(대상 16:3921:29)으로 옮긴 것 같다. 기브온은 예루스에서 10킬로미터,벧엘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6) 법궤의 복귀
사울왕이 법궤를 옮긴 후에 다윗왕에 의하여 한 가지 일이 행해진 것이 있다(대상 16:40). 다윗이 노획한 여부스(후에 예루스)의 요새에 그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지었다. 또 다윗은 법궤를 위하여 한 곳을 택했고, 기브온에 있던 성막의 모형인 장막을 시온에 쳤다(삼하 6:17,대상 16:1). 그는 제단도 준비했다. 그후에 그는 법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이곳으로 가져왔다(삼하6:11).그때 웃시아의 일로 예루스 가까운 레위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놓았다가 거기서 3개월 후에 다시 다윗성에 봉안하게 되었다.

(7) 두 성막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 제단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어 성막에 안치 된 것 같다(왕상 3:1-4). 그 법궤와 제단은 성전이 건축되므로 하나로 통합이 된 것 같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에 있던 제단이 솔로몬왕 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것 같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분실된 것이 많았으나, 그런대로 남은 기구들을 가지고 분산되어 있는 곳에서 제사드렸다(대상 2:19,대하 1:5-).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 분산된 유품들을 모아 그 성전에 안치하고 보존하게 되었다(왕상 8:4).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약 200년후에 역사에 나타나 기를 그쳤다30).이때는 모세의 성막과 성막의 기구와 부속품들이 사라지고, 변형되고 개조된 것 같다. 그 예로 성막이 두 곳에 있은 것이나,솔로몬이 성전의 모든 것을 금으로 제조한 것이라 하겠다. 위 두 성막 중에 어느 것이 모세 시대의 성막과 그 기구에 가까우냐?하는 것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브온의 것이라 한다. 그 이유는 기브온의 것은 큰 것이었고,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었으나, 예루살렘것은 솔로몬에 의하여 신축된 것이기 때문이다(왕상 3:1-). 또 성경에 보면 솔ㄹ오몬이 기구들을 만들어 두었다(대하 4:19-) 고 했다.
위의 성구는 솔로몬이 새로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 기구들을 새로 만들어 둔 것도 되지만 옛날 성막과 그 속의 기구들이 없어진 증거도 된다고 하겠다. 오랜동안에 여러가지 재난과 혼란으로 없으진 것도 같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는 두 돌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왕상 8:9,대하 5:2-10참조).이 때는 솔로몬, 시대였다.

(8) 성막과 성전의 수난사
성막의 성구오 비품들은 솔로몬시대 이전에 전쟁.재화등으로 인하여 파괴, 또는 유실된 것 같다. 성경에 의하면 전쟁과 여러 재화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성막에까지 미친 흔적이 적지 않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법궤가 빼앗겼다가 얼마 후에 다시 찾은 일이 있으나 그때에 법궤만이 아니라 법궤속의 소장품과 법궤를 덮었던 어떤 막도 있었다면 그것도 탈취되었을 것이다(삼하 4:-6:).
그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으로 적지 않은 변동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타락과 악한 왕들에 의하여 손상과 피해가 컸던 것이다. 역대기하 28장 24절에 여호와의 전의 기구가 훼파되었다고 기록이 되었고, 역대기하 12장 9절에는 외세에 의한 겁탈과 재건이(대하 29:1-)나타나 있다. 그 보다 더욱 확증이 되는 것은 바벨론의 포로인 것이다. 그 때에 성전의 모든 기명이 겁탈되고,또 소실되었다(왕하 24:13,슥1:3,단1:1-25:2,대하36:18).
성경에 나타나기를 성전은 두번 탈취를 당했는데 첫번째는 여호야김 왕때(대하 36:7)며, 두번째는 여호야긴 왕때(대하 36:7)며, 두번째는 여호야긴 왕때(대하 36:10)이다.
성전이 소화된 것은 역대하 36장 19절 이하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의 최후도 되지만 모세의 성막의 최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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