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35:7-8]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열려라 에바다 2022. 8. 15. 07:37

35편 7절-8절: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7절: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진리성도 다윗은 이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 다윗에게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골리앗을 죽인 후에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이것뿐인데, 이건 다윗이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한 노래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울이 다윗을 자꾸 해치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이스라엘 여인들이 다윗을 높이는 노래를 부르니까 사울이 다윗을 향해서 시기질투가 난 것이고, 또 자기의 왕 자리를 다윗에게 빼앗길까봐 다윗을 죽이려고 한 거다.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걸 영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원수를 죽인 의로운 일을 한, 옳은 일을 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악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일반적으로도 악한 사람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 속에는 쉽게 말하면 악신이 든 거다. 이런 사람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마음이 나쁘다고 하겠지만 성경을 통해서 볼 때는 이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그 감화성은 옳은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전하는데 이것이 듣기 싫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악령, 악신이 든 거다.


시기 질투도 고상한 시기 질투가 있는데, 자타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고자 하는 시기 질투는 좋은 거다. 그런데 옳은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시기 질투는 악한 거다. 용어로는 같은 시기 질투라도 마음 속에서 나오는 질이 다른 거다. ‘내가 저 사람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입어야지’ 라고 한다거나, ‘저 사람은 나보다 뒤떨어졌었는데 이제는 나보다 더 많이 깨달았구나’ 하면서 이에 대한 시기 질투를 하는 것은 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보다 더 앞서려고 하는 거다. 자기보다 앞선 그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주님을 보고 가야 그 사람보다 앞설 수가 있는 거다. 이 고상한 시기 질투는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웅덩이는 일부러 깊이 판 거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이곳에 한 번 빠지면 올라오지를 못한다. 다른 사람이 건져주지 않으면 그곳에서 꼼짝없이 굶어죽는 거다. 그리고 웅덩이에 그물을 숨겼다고 하니까 이것은 다윗을 잡기 위해 일부러 친 그물이다.


그러면 그물이 뭐냐? 그물은 조직적으로 짠다. 구멍의 크기가 제각각이 아니라 아주 촘촘히 일정하게 질서정연하게 짠다. 신앙적인 면에서의 그물도 있는데, 어떤 조직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냥 웅덩이를 파 놓으면 거기에 빠지면 죽게 되는 것인데 이 웅덩이 속에 그물을 펼쳐놓은 것은 웅덩이에 사람이 빠지면 건져주는 척 하며 끌어올려서 자기 조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악한 꾀다. 악한 자들의 이런 수법을 잘 알아야 한다.


세상을 탐내는 자들은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파 놓은 함정이나 짜 놓은 그물에 여지없이 빠지게 된다. 그러나 진리지식의 지혜를 가진 자는 잘 빠지지 않는다.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기가 제일 힘든 그물은 인간을 잡으려고 펴놓은 정신 사상 면의 그물들이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움직이는 이걸 잘 관찰해야 한다. 눈으로 보이는 차원으로 예수를 믿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리 마음이 곱고 착할지라도 일반적인 정신사상의 차원에 머물고 있으면 이 사람은 어리석은 거다. 주님 앞에 쓰임이 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거고, 주님은 지혜로운 사람을 쓰시지만 일반적인 정신 사상의 차원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용물이 된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 믿으면서 무조건 사랑? 이건 안 된다. 이용물이 된다. 하나님의 종은 복음의 종이지 세상에게 충성봉사 하는 게 아니다. 장애인들을 돕는다고 하며 예수를 빙자해서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후원금으로 먹고 산다면 이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거지 세상 사람들의 손발이 되어주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려면 목사간판을 내려놓고 하라.


사람이 자기 마음을 못 다스리면 자기 몸에 병이 들어오고, 자기 몸에 병이 들어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 전가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자기를 잘 다스리면서 죽을 때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쳐서 주님의 복음에 수종을 들다 가야 한다. 이게 자기의 전폭을 제단에 바치는 거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보통 일이냐? 우리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이니 우리의 몸, 피, 생명이 다 귀중한 거다. 이 귀중한 몸을 복음에 수종들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 물질을 주면 ‘참 사람 좋다’ 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안 믿는다. 내가 이런 경험을 많이 했다. 내가 입던 옷까지 벗어주었는데도 고맙다고는 하면서 예수는 안 믿는다. 그러니 이에 대한 상급은 나에게 없는 거다. 그 때는 내가 진리이치를 몰랐기 때문에 진리는 못주고 어려운 사람을 물질적으로 돕는 게 주님의 일로 알고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서 혹 상대가 주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믿는 사람은 물질성적으로 예수를 믿어서 종교인은 될지언정 진리의 사람은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지식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웅덩이는 짐승이나 사람을 잡으려고 파는 건데, 세상을 보면 정신 사상 면의 웅덩이가 많다. 함정이 많다 그 말이다. 전봇대에 보면 ‘한 달에 400만원, 500만원을 준다. 우리 집 오빠처럼 일할 분을 모집합니다’ 하는 걸 붙여놨던데, 이게 뭐냐? 함정이다. 보통 한 달 동안 죽도록 벌어봐야 2, 300만원밖에 안 되는데, 우리 집 오빠처럼 일을 하면 4, 500만원 준다고 하면 남자들이 안 가겠느냐? 그런 곳에 가면 정상적인 일을 시키겠느냐?


그런가 하면 기독교 안에도, 교회 안에도 함정이 많다. 진리로 나간다면 이 교회는 참 교회인데, 이게 아닌 ‘구국주의, 사회주의, 신비주의, 극기주의’ 이런 등등으로 나가는 교회들이 많다. 이게 기독교의 함정이다. 이들도 나름대로는 성경대로 한다고 하는 거지만 그런 곳에는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없다. 그러니 이건 함정에 빠진 거다. 이들은 전도를 해서 사람을 진리로 걸어가게 하는 게 아니라 진리에서 이탈해서 세상으로 나가게 하기 때문에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러니 그런 곳에 들어가는 것은 저주를 받는 함정에 빠진 거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으면 세상을 전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을 바로 배웠으면 세상만사를 바로 쳐다보게 된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볼 줄 안다. 인조사랑, 거짓사랑은 보이는 면으로 사랑이 지글지글 끓는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의 것과는 정 반대다. 교회 안에 인조사랑이 가득 차면 진리의 사랑은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는 없어진다. 사람이 깨닫는 역사는 없어진다.


8절: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일반적으로도 악한 사람이 만사형통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다. 도둑놈이 잘 되기를 바라느냐? 사기꾼이 잘 되기를 바라느냐? 이런 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인지를 모르면 자기가 악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복을 달라고 하는 식이 돼버리고, 좋은 사람을 악하다고 하게 된다.


성경을 보면 하만과 모르드개가 나오는데, 하만이 악한 자냐, 모르드개가 악한 자냐? 하만이 악하다. 그러면 하만이 악한 증거가 뭐냐? 하만이 누구를 죽이려고 했느냐? 모르드개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는 게 왜 악한 거냐? 모르드개가 어떤 사람이냐? 모르드개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이런 의로운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까 악한 거다.


만일 하만의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데 모르드개가 이 하만을 죽이려고 한다면 모르드개가 악한 사람이냐,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 할 때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 거다. 일반적으로는 이걸 전혀 모른다. 성경을 통해서 보는 눈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진리신앙으로 말씀 깨달음이 없고 성령님의 거하심이 없다면 이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왜냐? 그 속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돌아가고 있으니까. 예수를 믿는다면 믿는 사람끼리 돌아가고,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세상과 짝짓고 세상과 어깨동무하며 같이 돌아가는 것은 악한 자다. 마귀의 종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성격 성질이 안 고쳐진다. 예수를 믿고 진리를 바로 깨달으면 자기의 성격이나 성질도 다듬어져 가고 고쳐져 가야 한다. 이게 성화구원이다. 이게 주님을 닮는 거다.


하만이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싫다는 거다. 하나님이 싫으면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 든다. 말씀이 듣기 싫으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구약에 보면 다니엘을 모함하는 악한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인들이 있었다. 이련 역사를 일반적 역사로 보기 쉽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은 일반역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기록한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떤 역사냐?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는 그 정신 사상을 봐라. 모르드개 속에 들어있는 어떤 정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를 봐라 그 말이다.


오늘날도 이런 게 많다. 길을 가다가 ‘예수 믿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예, 믿습니다’ 라고 하면 반가움이 앞서서 ‘어느 교회 나가십니까?’ 하니까 ‘어느 교회에 나갑니다’ 라고 하면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여기에서 ‘예수 가라사대’ 하며 대화가 더 들어가면 둘 사이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다. 예수 믿는 목적이 하나는 천국을 향하고, 하나는 세상을 향하고 있다면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통하겠느냐? 다 같이 예수를 믿을지라도 세상적으로 믿는 것은 주님 앞에 원수다. 하나님 앞에 원수다. 그러니까 자기의 신앙이 어느 편에, 어느 입장에 서 있느냐 그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원수노릇만 하다가 갈 거냐 그 말이다. 얻어맞고 갈 거냐 그 말이다.


자기의 신앙정신 사상이 질적인 면에서 하늘의 것인지 땅의 것인지 분석이 안 되느냐? 예수를 올바로 믿었다면 금방 분석이 되는 거다. 자기가 평소에 옳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다면 성경을 속속들이 모를지라도 설교를 들으면 뭐가 옳은 건지, 뭐가 그른 건지 판단이 가는 거다. 이 때 옳은 소리를 하면 ‘맞다. 내가 그렇게 못 사니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구나’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이게 아니라 세상기준이 자기 속에 들어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그것을 반박을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악한 거다.


사람을 넘어뜨릴 때 힘으로 넘어뜨리는 것도 있지만 말씀을 가지고 넘어뜨리는 것도 있다. 웅변은 말을 가지고 사람을 넘어뜨리는 거다. 씨름을 할 때 왜 상대방을 번쩍 드는 거냐?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번쩍 들어 올린 다음에 땅에다 패대기를 치려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이 자기를 올려주면 자기를 부려먹으려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자기가 똥 되는 것도 모르고 영광인 것으로 여긴다. 옳은 신앙자들은 사람이 고쳐져 가는데 자기는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광을 받는다고 하면서 왜 사람이 안 고쳐지는 거냐? 그러면서도 잘 믿는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신앙의 정신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정신면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정신이 진리의 정신인지, 어떤 정신이 복음의 정신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님은 어떤 사람에게 역사를 하느냐? 세상에 수종드는 사람에게 역사를 하느냐? 오늘날 성령님에 대해 얼마나 오해를 하고 오식을 하고 있는지? 성령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 뭐가 성령이냐?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으면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자타를 하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이게 아닌 세상 땅의 일을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다.


성경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의 성격과 성질을 고친다. 예수를 믿는데도 성격 성질이 안 고쳐지면 전도도 안 되고,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고약한 소리를 듣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자기로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느냐? ‘저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냐? 저게 집사냐? 저게 장로냐?’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교회에 수 년 수십 년을 다닌 저 자나, 교회에 안 다니는 나나 똑같다’ 이런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냐?


사람은 느낌을 가진 존재인데, 자기가 자기에 대해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도 자기가 느껴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자기를 쳐다보는 눈도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항상 깨닫고 바로 서는 쪽으로 마음이 가야 한다. 자기 하나만 세상에서 제일인 것처럼 살면 안 된다. 우리 모두 완전자는 아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를 닮아나가야지 내 성격 성질 때문에 전도가 안 되고, 내 성격 성질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도망을 가고, 내 성격 성질 때문에 교회에 비판이 들어오면 어찌 되겠느냐? 이건 악한 거다. 이런 자들이 잘된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자기 신앙이 옳은지 그른지 항상 하나님 앞에 심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입장에서는 자녀들의 신앙상태가 어떻게 되어 들어가는지 반드시 봐야 한다. 자녀들의 신앙 믿음이 바로 되지 않으면 부모는 먼저 자기 검토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자식이 부모의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된 거냐? 부모가 바로 된 거냐, 잘못 된 거냐? 내 자식이고 네 자식이고 간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 한다.


세상은 싸움판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과를 먹고 나온 사상과, 선악과를 먹고 나온 사상과의 싸움이 항상 있는 곳이다. 눈으로 보이는 경제싸움, 무기싸움 등만 있는 게 아니라 정신 사상의 싸움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잘못된 종교적 사상, 잘못된 신앙사상들이 자기 주위에서 자기를 정복하고, 자기를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막 돌격해 온다. 영의 눈을 가지고 이것을 바로 보고 말씀으로 무장을 해서 싸워 이겨야 한다.


교인이 세상 길, 넓은 길을 가면 이게 생명 길이냐, 사망 길이냐? 사망 길이다. 그런데 사망 길은 좁으냐, 넓으냐? 넓다. 그러면 넓다는 게 뭐냐? 다들 넓은 길로 가기를 좋아하지 좁은 길로 가길 원하느냐? 넓다는 게 뭐냐?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걸 말한다. 이렇게 예수 믿고, 이렇게 가르치는 게 넓은 길이다. 이건 사망이요 심판이다. 깨닫지 못하면 이걸 못 본다. 못 보면 손해다. 이용당하고 죽는 거다.


하만은 모르드개와 온 이스라엘을 죽이고 자기가 왕 자리에 올라서 통치하려고 완벽하게 계획을 짜 놓았지만 자기가 짜 놓은 자기의 설계에 자기와 온 가정이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하만의 악한 꾀를 다 알고 계시는 거다. 또한 다니엘을 모함하던 악한 자들도 다 멸망을 당했다.


하나님의 구원설계와 각본은 악한 자들이 성공해서 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도록 되어있지를 않다. 진리 자체화로 만들어지는 그 성도가 세상을 다스리도록 되어있다. 결과는 그렇게 된다. 성도가 승리하는 거다. 현재가 없는 미래는 없는 거다. 현재에서 바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미래의 영광이 없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이시요, 선한 진리의 성도들을 위하여 지금도 역사를 하고 계신다. 성도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잡아 돌리신다.


우리 성도들은 육적인 멸망만 보지 말고 영적인 멸망을 더 크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영적인 면에서 멸망, 영적인 면에서 망하는 것, 영적인 면에서 쭈그러드는 것,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가는 이 면을 크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