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말씀 하시면 멈춰서리다. (왕상 22장 1-28절)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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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는 솔로몬 왕 이후 분열 된 이후에,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의 역사와 통치를 기록한 책입니다. 열왕의 뜻은, “왕들을 나열하다” 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Kings(왕들)”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210년간 19명의 왕들이 있었고, 남 유다는 350년간 20명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북 이스라엘의 7번 째 왕으로 그 유명한 아합왕 때 이야기 입니다. 아합왕 하면, 먼저 왕비 이세벨이 떠오르고, 그 다음은 엘리야 선지자와 갈멜산 이야기가 생각 나실 겁니다. 아합왕 때, 남 유다의 왕은 여호사밧 왕이었는데, 여호사밧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였고, 아합왕과는 사돈의 관계를 맺고 서로 왕래하는 사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당시 북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람 나라였습니다. 당시 아람의 왕은 벤하닷 2세였는데, 아합 왕과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목숨을 구걸 할 정도로 큰 치욕을 겪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아람이 크게 우세했으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습니다.
아합왕은 전쟁에서 이기자 기고만장한 상태였고, 치욕을 겪은 벤하닷 왕은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삼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싸움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아람 나라 위쪽에 있는 ‘앗수르(앗시리아)’라는 신흥강대국이 전쟁을 일으켜서, 이를 대항 하고자 많은 나라들(이스라엘, 아람 등)이 연합으로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전쟁이 잠시 멈추어 있었습니다.
아람과 전쟁이 없었던 삼년 째에 여호사밧 왕이 사돈인 아합왕을 찾아 왔습니다. 아합 왕은 여호사밧 왕에게,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라몬’ 이라는 지역을 다시 빼앗으려 하는데 나와 같이 전쟁을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제안 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흔쾌히 동의 하면서, 그러나 먼저 전쟁에 나가도 될지 말지를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자고 역 제안 합니다. 여기까지가 1~4절까지 내용입니다.
아합왕은 여호사밧 왕의 건의를 들어서, 자기가 옆에 두고 조언을 듣는 선지자 400명에게 물었습니다. 400명의 선지자는 “올라가소서(전쟁을 하소서) 주(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왕상 22:6)라고 말했습니다. 말이 선지자들이지 이들은 왕의 옆에서 아부하고 비위를 맞춰 주는 어용 사기꾼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대표자는 11절에 나오는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습니다”(왕상 22:11)라고 말합니다. 왕의 환심을 사려고 정성도 가득하게 철로 뿔까지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거짓을 말하는 시드기야의 말에, 아합왕은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첨만 하는 소리에 귀가 단련되어 있어서 도대체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시드기야와 400명의 선지자들이 말하는 것을 본 여호사밧 왕은, 이 나라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좀 들어 보자고 제안 합니다. 아합왕은 찜찜 했지만 미가야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미가야를 데리러 간 관리는 미가야에게 왕 앞에서 좋게 말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8절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는는 이믈람의 아들이며 아합왕은 그를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가야는 아합 왕에 대하여 길한 일(좋은 일, 잘 풀리는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안 좋은 일, 하지 말라는 충고)만 예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가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정직하게 전하는 선지자였고, 아합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도록 예언하는 미가야를 쳐다 보기도 싫어했습니다. 간신 위에 성군 없고, 충신 위에 악군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미가야는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왕상 22:14,15) 라고 말합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뜻밖에 좋은 말을 왕에게 들려 줍니다. “전쟁을 하십시오. 이기실 겁니다” 400명의 선지자나, 시드기야가 한 말과 미가야 선지자가 한 말이 똑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왕을 비웃는 말이었습니다. “저 거짓 선지자들이 뭐라고 한 지 내가 다 알고 있소, 이렇게 저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어차피 왕은 그렇게 할거면서 나를 왜 불렀습니까? 알아서 하시오. 죽음의 길로 직행 하겠다는데 할테면 해 보시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듣지도 않을 말을 하기도 싫소” 이런 의미로 아주 무미 건조하게 대답을 한 것이었습니다. 말하는 어투와 표정도 굉장히 쌀쌀 했을 겁니다.
여기 까지의 이야기가 5~15절 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이었고, 점점 고조 되어 긴장감 넘치는 16절부터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16절을 읽어 드립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 아멘.
아합왕은 미가야 선지자가 겉으로는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했지만 속 마음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돈과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고 전쟁의 정당성을 결정하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상황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미가야 선지자에게 강압적인 어조로, “똑바로 말하시오. 내 앞에서 진실만을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맹세(서약)하게 했는데도, 어찌 나를 기만하는 것이요” 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합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혼자서 상대해서 물리쳤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도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습니다. 성경 역사나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진실만을 말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고, 거짓말하는 자들은 엄청난 다수였습니다.
아합왕이 그렇게도 악행을 저지르는 왕이었지만 미가야 선지자 같은 사람을 옆에 두도록 하신 것은, 끝까지 돌이킴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아합왕은 미가야 선지자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정도라도 알고 있었다는 것은, 희미하게나마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합왕은 400명, 다수가 하는 말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 한명 미가야 선지자의 말은 그냥 한번 들어보자는 식이었지,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호응도 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합은 이것을 판단하는 일이 자신에게 내려진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 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다 아합과 같은 성정이 마음 속에서 가득합니다. 귀에 좋게 들리고,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수의 뜻에 동조하는 것을 옳은 선택이라고 여기고, 소수 의견을 따라갔다 따돌림 당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위신과 체면이 높게 세워 지는 일이라면 반드시 참여하려고 하고 절대로 놓치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생각과 다르십니다. “하지 말라, 그만 중단해라, 포기해라, 그냥 지나쳐라, 반대 방향으로 가라, 멈추어라, 가만히 있어라” 이런 식으로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을 주십니다. 문제는 미가야 선지자 단 한명이 말한 것처럼, 우리 마음에 들리는 성령의 감동이 매우 희미하게 울려 퍼진다는 겁니다. 정말 고요한 가운데서 들으려고 집중 하여야만 은밀한 가운데서 말씀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400명이 말하는 것처럼 더 크고 시끄러운 여러 소리들에 묻혀서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들리기는 하여도 체면과 위신 때문에, 현실에서 손해보는 것이 싫어서,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해서, 포기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련 때문에 성령의 감동을 따르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듣지 않는 아합 왕 같은 악한 자들에게 조차도 끝까지 미가야 선지자 같은 사람을 보내서, 말씀 하시고 또 말씀 하십니다. “너는 내게로 돌아로라, 너는 내 말을 들어라, 너는 너의 뜻을 포기하고 내 뜻을 받들어 나를 따라오라”, 죽음 직전 까지 계속 이렇게 말씀 해 주시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선택의 몫은 오로지 듣는 자들에게 있고,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로지 듣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양심이 살아있다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와 계시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말씀이 안 들릴 수 없습니다. 예배 중에, 기도 중에, 찬양 중에, 말씀 묵상 중에, 설교 듣는 중에, 일상의 생활 중에, 무수히 많은 통로를 통해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듣는 데 집중 하시고, 들리는 즉시 순종 하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들이 내 자녀요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 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말씀 하시면 내가 멈춰 서리다” 찬양의 가사처럼, 들리는 데로 나아가고, 들리는 대로 순종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소수 의견, 작은 목소리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앞, 뒤 보지 않고 곧바로 직진하시면 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의 등불을 따라가시면서, 의의 길, 승리의 길, 영생의 길로만 나아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미가야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아멘.
목자 없는 양같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배고픈 군중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목자는 아합을 가리키고, 산에 흩어진다는 것은, 아합이 전쟁에서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뿔뿔히 흩어진다는 뜻입니다.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패할 것이고, 왕도 전사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보십시오 사돈, 저 사람은 내게 대하여 좋은 말을 한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 들어 볼 것도 없습니다.”(왕상 22:18)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아합왕의 반응에 상관 없이 19~23절 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본 환상과 예언을 계속 말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라고 말씀 하시자, 한 영이 나와서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말씀 하셨고, 거짓말 하는 영이 시드기야를 포함한 400명의 선지자들에 거짓을 말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왕에게 화가 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왕 옆에 있는 자들이 한 말은 왕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화가 되는 말입니다.」
이제야 안개가 걷히듯이 하나님의 진실하신 뜻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그저 왕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간사한 입술을 사용했지만, 미가야는 성령이 주신 환상과 계시를 보고, 들은 그대로 왕 앞에서 선포했습니다. 미가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지엄하신 뜻이 실행된 것이며, “살고 싶으면 당장 전쟁의 마음을 돌이키고 잠잠히 나의 뜻을 기다리라”는 최후의 경고였습니다.
사무엘상에서 엘리 제사장 시대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달해 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면 불행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아합 시대에도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미가야 선지자와 같은 참 된 선지자가 있어서, 들을 귀만 있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 상황에서 그저 귀에 들리는 데로 순종하고 자신의 뜻을 돌이키면 되었습니다. 사돈 앞에서 그 잘난 체면 한번 만 구기면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심판 앞에서 멸망 당하느냐, 은혜주심의 출구쪽으로 탈출 하느냐는 오로지 아합 자신이 결정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양심과 믿음으로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지난 오후 예배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예로 들면서, 그들이 아버지 엘리 제사장이 훈계하고 질책하는 말을 듣고도 끝까지 거부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삼상 2:25). 하나님이 만약 아합을 죽이시려고 작정하셨다면, 거짓의 영을 보내신 것도, 아합이 그 말을 덥썩 붙잡은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나의 욕망과 욕심을 주체할 길 없어서 고속 질주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급 제동을 걸어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하시고, 반면에 하나님의 인도해 주시려는 참 선하신 의도 이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 주심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에 이르러 돌이키기란 거의 불가능 합니다. 마음과 양심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역시나 듣지 않았습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이 강제로 끊어지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끝까지 진리의 말씀 만을 따르겠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이 곧 끝나는 그 순간 까지도 끝까지 자신이 체면을 앞세워 고집을 부리며 거부로 일관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회를 주시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아합은 그렇다고 해도 그 옆에서 듣고 있던 유다왕 여호사밧 역시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또한 체면 때문에 묵시적인 동조를 한 것입니다 비겁한 타협을 선택한 겁니다. 아합이 음주 운전자라면, 여호사밧은 음주 운전을 방치하게 만든 동승자였습니다. 아합이나, 여호사밧이나,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나, 참으로 불순종이 판을 치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자들의 눈을 열어 환상을 보게 하시고, 예언을 하게 하시고, 입술을 사용하셔서 선포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미가야와 같이 진실한 자들이 되도록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미가야 선지자와 같이 진실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움직일 수 있는 양심과, 자존심과 체면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일말의 결단력은 있어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성령이 일하시는 은밀한 역사 까지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쓰시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내가 먼저 선포된 말씀 그대로 순종의 열매를 맺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미가야 선지자 이야기 마지막 부분인 24~28절 까지 이야기입니다. 미가야의 말을 듣고 있던 시드기야는 화가나서 미가야 선지자의 뺨을 치면서, “내 안에 여호와의 영이 있어 말하게 하셨는데, 언제 그 영이 네게로 들어가서 환상을보고 예언을 말하게 했다는 말이냐”(24) 라고 말합니다. 진짜 적반하장이고, 후안무치 한 말입니다. 원래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거짓이 드러나면 화를 내고 폭력을 쓰게 마련입니다.
뺨을 맞은 미가야 선지자는 시드기야에게 “내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너 시드기야가 골방에 숨게 되는 날 보게 될 것이다”(25)라고 경고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시드기야는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26,27)고 옥을 관장하는 성주에게 말합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마지막 말인 28절을 읽어 드립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아멘.
아합 왕이 전쟁에 나가서 살아 돌아 올 것 같으면 내가 이 말 하지도 않았다 라고 한 것과 같이, 아합 왕은 29절 이하에 기록 된 대로 전쟁에 나갔다가 화살을 맞고 하루 종일 피를 흘리다가 죽고 맙니다. 듣지 않을 것을 알고도 하나님은 끝까지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죽음 직전 까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정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만약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뜻을 돌이켜 전쟁에 나가기를 멈춰섰다면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다시 회복되어 생명이 연장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수 많은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을 겁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말씀하시면 멈춰 서리다” 로 정한 것은 아합 왕의 선택을 반면교사로 삼자는 의미입니다. 계속 잘하던 사람이 한 번 실 수 할수 있지만, 그 한번 실수로 인해서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반성하고 일어서고 전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잘해왔던 과거의 원동력이 다시 발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 못해 왔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고, 계속 해서 잘해 나갈 수 있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못해왔던 무능함이 발목을 잡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내 능력을 의지했을 때 생기는 일반적인 추론입니다. 하나님은 예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달리기를 잘 해야 일등을 할 수 있겠지만, 멈춰서는 것이 일등이 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멈추라고 하신 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선포였습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선포였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듣는 자이며, 때로는 미가야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멈추라고 하실 때 제발 멈추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가 보입니다. 거짓이 사라지고 진실이 보입니다. 패배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가 보입니다.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보입니다.
말씀 하시는 하나님, 듣고 나아가고, 듣고 멈추는 우리들, 이 단순한 진리의 가르침이 나를 살리시는 구원의 말씀임을 믿으시고, 더 이상, 자존심, 고집, 체면, 욕심, 위선, ~하는 척하는 것으로 인해 말씀을 내치는 어리석음에 결코 빠지지 마십시오. 오직 말씀으로 나아가고, 말씀으로 멈춰서는 00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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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들려주시는 진리의 말씀이 항상 우리 마음에 들려지게 하시고, 양심에 따라 올바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말씀 하시면 나아가고, 말씀 하시면 멈춰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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