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2장 58절-59절: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장 1절-5절: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8절-59절: 자기를 무엇이 고소하느냐? 자기가 출생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면 법에 고소를 하는데, 성경은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가지고 와서 영적 차원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기는 출생해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갈 때까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땅에 편만하라고 하는 이 명령대로 하면 축복인데, 그게 아니라 출생에서 죽음의 선을 넘어갈 때까지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계속 하나님을 떠난 지식을 먹으면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으로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차원, 아니면 더 못한 차원으로 내려가게 된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지 못하는 것이 죄다. 성경은 그걸 말하고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일반사회 윤리 도덕성적인 죄를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라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네가 예수 믿느냐?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건데, 안 따르는 게 죄다.
술 담배 먹고 나쁜 짓 하는 건 안 믿는 사람도 다 아는 죄다. 성경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차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세상으로 나가면 죄다.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죄다. 하나님의 참 축복을 받으라고 했는데 예수 믿는 자가 땅의 축복을 소원 목적하고 살면 이게 죄다.
안 믿는 사람은 지금 죄를 짓고 사느냐, 안 짓고 사느냐? 출생해서부터 선악과를 그대로 먹고 계속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좋은 일이던 악한 일이던 하나님 앞에 해당이 안 된다. 선악과를 따먹고 이미 저주가 들어가 버렸으니까. 다만 구분을 하려면 예수 안 믿는 선악과 먹은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에서도 우리의 구원이치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일반적인 양심을 가지고 선악을 말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준을 갖고 오면 안 된다.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이 기준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기준을 가져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자기 인격화 되는 이 기준을 가져야 한다. 이게 예수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냥 눈에 보이는 아무 교회나 나간다고 해서 그게 따르는 게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있어야 한다.
구약에 하나님께 예배를 하려면 성전 안에 법궤가 있어야 한다. 법궤가 없는 곳에서 예배를 하자고 하는 것이 북조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웠다. 오늘날 각 교회마다 ‘세상축복’ 운운하고 돌아가는 것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는 것과 똑같은 거다. 그런데 그걸 모른 채 그런 데서 예배한다고 하며 ‘하나님, 주여’ 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를 가든지 외국에 나갔다가도 안식일이 되면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그 원리가 뭐냐? 성전이 있는 곳으로 와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를 드린다. 거기서 빻아지고 만들어져야 한다. 오늘날 그 정신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볼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는 그런 교회의 교훈은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교회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교회로 가야 한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십자가 붙이고 간판을 달아놔도 아니다.
거짓 교회란 간판이 없는 교회를 말하는 거냐?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 종들이 가르치는 거짓 교회가 십자가가 없는 데를 말하는 거냐? 사도시대에 십자가가 달려있으면 당장 끌려가서 죽는다. 그런데 오늘날 자기 속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챙겨야 하는데 십자가가 있고 간판이 있고 한 그걸 찾는다. 그 안에서 뭘 하는지 아느냐? 예수 믿는 실속을 모르고 있다. 심판은 개개인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출생해서 죽음의 선을 넘어가기까지 생명과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부지런히 맞춰야 한다. 고치고 가야 한다. 안 고치면 죄다. 질적으로 육의 생각을 가지고 그 질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겠느냐? 신령한 천국은 신령성으로, 예수님으로 바꿔진 것만 들어간다. 이게 ‘예수로 말미암아’ 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 게 왜 껍데기만 알지 알맹이를 모를까?
속성적으로 자기의 지식, 자기의 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즉, 하나님의 도덕성, 의와 주권 즉,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주님의 것으로 닮아진 것이 참 자기다. 그게 진짜 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실상을 못 보고 허상적인 것이 자기 속에 주격이고 주인이 돼서 그걸로 따지려고 한다. 큰 잘못이다. 그러니 평생을 껍데기만 붙잡고 껍데기로 살다가 껍데기로 죽는 거다. 별 수 없다. 왜 그렇게 사느냐?
한 인생이 태어날 때에 그 해산의 고통이 그의 어머니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기 인생의 존귀가치를 알아야 한다. 그냥 밥 먹고 사니, 걸어 다니니, 다른 사람도 걸어 다니고 자기도 걸어 다니니까 사람인 줄로만 아느냐? 성경에는 짐승 같은 사람도 있다. ‘잡혀 죽을 짐승 같도다’ 이 말이 짐승을 보고 하는 말이냐,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냐? 나보고 하는 말이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지 아니하면 저기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호리’는 로마나라의 화폐단위의 제일 낮은 명칭이다. 한국 돈의 단위로 제일 낮은 명칭이 뭐냐? 1원? 1원이 10원이 되려면 1원짜리가 10개가 모여야 한다. 말하자면 ‘너에게 가진 것이 있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저 밑의 바닥까지 내려가야’ 그 말이다.
일반적으로 소송이 걸리면 누가 잘하고 못하고 간에 양쪽이 큰 손해다. 그러니 법정에 안 서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옳더라도 법정에 서는 짓은 하지 말아라. 이기더라도 그런 짓은 하지 말아라. 물질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냥 떼이고 말아라. 그걸 찾으려고 법정소송에 들어가면 더 들어간다. 사람이 늙어버린다. 다른 일도 못한다. 그런 것처럼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란 깡그리 다 날아간다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 인생이 다시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살 날이 다 날아가 버린다. 그러니까 이건 재기불능이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현재 자기 식으로 예수를 믿다가 하나님의 어떤 징계적인 형벌이나 처분이 온다면 자기가 재기될 것 같으냐? 그런 걸 생각을 하고 믿자. 젊더라도 한 방 얻어맞으면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을 앉고 갈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현재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살 날이 몇 날이 남았을까?
그리고 이 내용을 가지고 다시 따져볼 것은 예수 믿는 자기가 어느 교회로 다녔던 자기가 자기에게 따져봐야 한다. 신앙생활에서 자기의 언행심사로 나타난 자기가 깨닫고 만들어진 소득을 따져봐라. 장사를 했으면 소득을 따져봐야 하듯이 믿는 사람이라면 인생살이를 그만큼 살았으면 믿는 쪽으로 따져봐야 한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나? 헛나이 먹은 건 아닌가?
그 많은 세월동안 예수를 믿었어도 세상성적인 소원성으로 살고 있고, 깨달은 것도 없고, 만들어진 것도 없다면 이건 벌레가 먹은 것이다. 좀이 먹은 것이다. 왜 그렇게 됐나? 못 깨달아서이다. 깨달았다면 깨달은 대로 살려고 애를 쓸 텐데 깨닫지를 못하니 그냥 넘어가 버렸다. 하루하루 자기 인생을 세월이 갉아먹고 있지 않느냐?
‘예수 믿은 후에 우리 집이 축복을 이렇게 받았네’ 그렇게 따지지 말고 참 사람으로 된 식구가 얼마나 되는 지로 따져봐라.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었나, 안 믿었나?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어도 성격도 못 고치고 성질도 못 고치고 맨 날 집안에 들어오면 잔소리나 하고. 이게 고쳐진 거냐?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공중도덕성을 지키는 것은 믿으나 안 믿으나 상식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공중도덕도 못 지키고, 공동체에 대한 의식도 없고 자기 개인주의로 나간다면 이건 뭔가가 예수 잘못 믿은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정신을 가져야 한다. 예수를 배우면 예수정신이 들어가야 한다. 진리이치를 배우면 자기 생각 속에 이치적인 생각이 차곡차곡 들어가야 한다. 예수 믿는 자기가 예수 믿는 소득을 따져봐라. 이것이 없다면 저질이다. 저질 된 그 이유를 따져보고 세상적이고 육적이고 옛사람 부패성적이고 마귀적인 그것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 안 떨어지면 그런 너를 끌어다가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아 사망권 안에 갇히게 된다. 그러면 자기의 일생이 끝날 때까지 하늘의 것으로 저축이 되는 게 아니라 다 빼앗기게 된다. 젊음 나이 건강 투자성 네 인생이라고 하는 전폭이 빼앗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 아니다. 그건 안 믿는 사람, 타락된 사람들이 따지는 거고 예수님의 교훈은 그건 아니다.
13장 1절-5절: 빌라도는 이방 로마나라의 사람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국을 점령을 해서 로마의 속국으로 삼고 있다.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인이 아니고 야곱의 후손들 즉, 이스라엘 족속들인 것 같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나라의 법에 죄 정함을 받아 죽임을 당해 피를 쏟은 것인지, 아니면 로마인들이 믿는 그들의 신을 받아들여 갈릴리 사람들이 제물로 드려져서 죽임을 당한 피인지? 옛날에는 자기의 신에게 제일 좋은 거, 제일 값진 거를 바치려면 산 사람을 데려다가 바쳤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그들에게 반역을 일으키다가 잡혀서 죽임을 당한 피인지? 어찌됐던 그들의 우상의 제물에 피가 섞여서 드려진 바가 되었다.
이 사실을 고한 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도 그렇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보통 보면 자기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보고 ‘죄가 많아서 그렇지’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니라.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방제사의 제물이 된 그들이 죄가 있다는 것이냐, 없다는 것이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고한 그들과 또 그들처럼, 그들처럼에는 우리까지 포함이 된다. 그 때 당시 예수님께 구한 그들과, 그들처럼 생각한 모든 자들이 죄가 있다는 것이냐, 없다는 것이냐? 있다는 것이다. 이방우상의 제물이 된 그들이 죄가 없다는 말도 아니고, 그 외에 살아있는 사람들도 죄가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죄를 보는 생각들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셨고, 천국복음을 전하셨고, 그리고 우리로 당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썩고 불타질 것, 땅의 것, 세상 것을 버리고 영원히 존귀 영광스러워지는 신령천국 하늘의 것을 갖도록 예수님은 계속 교훈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것 신령한 것, 세상 사람들은 땅의 것. 그러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땅의 것으로 소원 목적하고 있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소개하는 하늘의 것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땅의 것을 비교해 보니 어느 쪽 것이 질적으로 훨씬 좋은 것이냐? 하늘의 것이다. 그러니까 땅의 것을 가지려면 땅 쪽을 봐야 하고 땅 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하늘의 것을 들으니 땅으로 가던 방향을 바꿔서 예수님 것, 하늘의 것으로 가는 게 회개라. 땅에서 천국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회개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늘 쪽을 쳐다보면서 자꾸 땅의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회개가 된 사람이냐, 안 된 사람이냐? 안 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알기는 아는데 아는 대로 살려니까 자꾸 땅에서 끄집어 당긴다. 이건 뭐냐? 땅을 한 번 쳐다보는 사이에 천국은 끊어지고 또 ‘잘못했습니다’ 하고 하늘을 쳐다보면 또 땅의 것이 끄집어 당기고. 땅의 것이란 돈이 있고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고. 이 땅의 것들이 자꾸 땅 쪽으로 끄집어 당긴다.
사람은 말과 마음이 다를 가능성이 참 많다. 그러니 그 말대로 믿지 말라. 그 사람의 정신 사상을 봐야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 사람의 정신 사상이 그 사람의 중심이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 땅의 것을 소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회개를 안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생명과와 선악과 중에 선악과를 계속 따먹는 사람이다. 생명과를 따먹으면 그렇지를 않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했으니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 소원 목적이 안 된다.
이방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소원 목적이 모두 세상 것 땅의 것이다. 세상 것 땅의 것에다 자기의 피 즉, 노력 수고 활동 물질시간 시간투자하고 그런 것을 소원 목적으로 하고 사는 것은 세상은 우상이라고 했으니 자기 일생을 우상의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일생이 세상이라는 우상 앞에 제물로 들어가 있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부모들, 자식이 세상에서 뭐든지 제 일등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계속 학원이고 뭐고 부모가 번 것이 계속 자식에게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일등이 아닌 세상에 일등? 이건 구약시대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몰렉 신에게 드려 불로 태우는 것과 같다. 이게 안 믿어지면 그렇게 길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고 뭐라고 하셨느냐? 이왕이면 자기 어린아이를 예수님 바로 옆에 앉혀놓고 길러라. 예수님이 자라는 것만큼 아이도 따라서 질적으로 올라가야 한다. 딤후3:16, 17에 뭐라고 했느냐? 어린아이를 뭐로 기르라고 했느냐? 오늘날 사회문제가 왜 이렇게 된 줄을 아느냐? 학교문제가 왜 이렇게 된 줄을 아느냐? 교회가 왜 이렇게 된 줄을 아느냐? 예수 믿어 세상에서 축복? 세상에서 제일? 자식들을 예수이름으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자식들을 바로 왕 밑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자식들의 지식의 사고방식이 세상으로 된 것은 모른 채 자꾸 예수이름으로 제 좋도록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천국처럼 만들어 달라고 하니 이게 되느냐? 아니다. 싸워라.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고, 어머니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싸워라.
소원과 목적이 어디에다가 자기 몸을 불태우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제물로 드려지는 자기의 일생,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제물로 드려지는 그 일생, 그 목적을 천국 쪽으로 바꾸지 않으면 즉, 회개치 않으면 전부는 망한다고 하신다. 즉 하나님 앞에 드려 올라갈 게 하나도 없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렇게 살면 예수를 믿어도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이뤄진 구원이 없는 삶이라 그 말이다. 학교는 다녀도 선생님 말을 안 듣고 실컷 놀다가 졸업 때가 되면 배운 실력이 없는 학생과 같다.
그렇게 해서 쌓아진 그 실력은 죽을 때까지 자기 뒤를 따르는 거다. 성경에 생명책과 사망책이 있다는 것은 따른다는 말이다. 오늘 이 하루도 자기의 언행심사로 자기의 일기를 써 가는 것이다. 자기 일기장은 남이 못 쓴다. 구원이 없는 삶은 우리 신앙의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 고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눈앞에 보여지는 것을 가지고 말을 했다. 그러니까 회개의 본질을 모르면 자기는 회개했다고 하지만 회개를 안 한 사람이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라 학교에 다니면서 그 정신이 오락실에 가서 있으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니 공부가 안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죽은 18명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고 보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만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했다.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다. 안식일 날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실로암 못에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온 일이 있다. 그곳의 망대는 밝은 눈으로 멀리 바라보는 망대요, 망대에 올라가서 보려면 눈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18명이 왜 이 망대에 깔려 죽었나? 망대가 무너지려면 무슨 소리가 날 텐데 그 때 얼른 피해야 하는데 왜 피하지 않고 깔려 죽었나? 망대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균열이 있다거나 돌이나 먼지가 떨어진다거나 무슨 소리가 들린다거나 무슨 징조가 있을 텐데 왜 몰랐을까? 18명이 망대에 올라가서 싸웠나? 망대가 무너질 것도 모른 채 망대 위에 또 망대를 쌓아올린 거냐? 어쨌든 치어서 죽었다.
세상주의 인본주의로 올라간 탑은 무너지게 돼 있다. ‘나는 어른이다’ 하고 그 망대에 올라가 있으면 무너지는 거다. 물질로 올라간 탑은 다 무너진다. 인간조직으로 올라간 탑은 다 무너진다. 인간 탑은 무너진다. 그러니까 인간 탑을 쌓지 말아라. 그것 곳은 부러워하지도 말고 들어가지도 말아라. 무너지는 날에는 사람이 죽고, 믿음이 죽고, 사람얼굴이 똥이 된다. 그럼에도 인간 조직적인 탑에 치어서 신앙믿음이 죽고 상처를 받은 자들이 수두룩하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탑처럼 교만하고 거만하다. 이들은 회개를 못한 자들이요, 회개를 못한 교만한 그들이 세운 그 망대에 자기들이 치어죽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실로암에 가서 씻고 눈을 밝게 뜨고 예수님을 바로 보는 눈을 가졌어야 했다.
교회 안에서 힘든 게 뭐냐 하면 사람이 바로 서려고 해도 그게 참 어려운 건데 그나마도 세상주의로 나가는 사람을 붙들어다가 인간 조직적인 망대로 세우면 어떻게 될까? 큰일 난다. 세우기 전에 질을 맞춰야 한다. 질이 같으면 자동이다. 그런데 질이 아닌데도 세우려고 하면 규격이 맞지를 않는다. 그러니 올라가지지를 않는다. 무너지는 거다. 불 보듯 빤한 거다.
자기 신앙 믿음도 선 사랑 거룩 진실, 의와 주권, 지혜지식 이것이 지식 면에도 그렇고 지혜 면에도 그렇고 도덕성적인 면에도 그렇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바로 들어가 있어야 신앙 믿음에 있어서 사람이 별로 실수를 안 하게 된다. 안 그러면 실수투성이다.
성전을 지으려면 장광의 척도가 있듯이 믿음이란 규격대로 올라가는 건데 여기에는 질서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척도대로 분명히 들어가는 거다. 이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면 절대로 신앙 믿음이 안 올라간다.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크고 작은 사건이 올 때 마음에 약간의 요동이 있더라도 그 사람은 넘어지지를 않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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