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폴더

박해와 이단들의 위협

열려라 에바다 2023. 4. 30. 07:31

박해와 이단들의 위협            

Ⅰ. 박해(로마제국과의 갈등)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들의 초기선교로 인해 복음의 지구촌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에 순종한 결과였다. 특히 사도들은 기독교를 단순히 유대인들과 관계에 밀착시키지 아니하고 이방인에 대한 복음으로 확대해 갔다. 그래서 예루살렘, 안디옥을 거쳐 출발한 기독교는 100년경에 소아시아, 시리아, 페르샤, 마케도니아, 그리스, 로마 그리고 이집트와 이디오피아에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그리고 4세기 초에는 로마제국의 거대한 세력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교세 확장은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아니했다. 그들이 거둔 성과만큼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는 곧 신생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종류의 박해였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역사상 종교에 대한 최대의 탄압이었고 이로 인해 초대 교회사는 박해의 역사로 불리웠다. 박해의 대표적인 주동자는 로마의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기독교의 박해는 교인들의 양적 성장을 가져왔다.



1.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300년 간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형성하였다. 기독교의 박해는 두 시기로 나눈다. 첫째 시기는 주후 64년 네로 황제(Nero, AD 37-68)의 박해로부터 250년 데시우스 황제(Decius)의 박해까지이고, 둘째는 데시우스부터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의 기독교 공인(313)이 있기까지의 시기이다.



2. 박해의 원인들

로마제국은 종교의 다원화정책을 폈다.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위해 로마제국 내의 지방의 풍속, 종족들의 법, 종교적 신앙과 백성들의 정치제도까지도 인정해 주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불법적인 종교로서 박해를 받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기독교는 황제 숭배를 반대하였다. 기독교가 불법의 종교로 고발된 가장 큰 원인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황제 숭배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종교들은 황제 숭배를 전통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는 이들 종교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국가는 황제 숭배를 인정치 아니하는 종교는 불법으로 간주했다. 기독교가 후자의 경우였다.



둘째, 기독교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박해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군복무나 정부의 관리직 등을 거부하고 공적 집회나 극장 등에 가지 아니하는 등 이방 신들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였다. 특히 군대는 당시 부패와 피를 흘리는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기독교들에게 인식되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인류를 싫어하는 자들로 오해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오해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가정을 파괴하고 다른 신들을 존경치 아니하며 종국에는 세상의 종말이나 부르짖는 급진주의자들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셋째, 기독교인들의 집회에 대한 오해가 박해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식인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고기를 먹을 뿐만 아니라 피를 마시며 음란한 행위 특히 근친상간을 한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오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밤에 비밀히 만나기도 하였고, 모여서 성만찬을 행할 때 "이것은 나의 몸이요, 이것은 나의 피"라는 신앙 고백을 하였기에 여기서 연유된 소문이었다. 그리고 거룩한 입맞춤(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으로 성도의 교제를 시작하였기에 음란의 행위로 잘못 인식될 수도 있었다.



넷째, 기독교인들은 반국가적인 존재로 오해되었다. 로마제국은 당시 사람들의 연합적인 조직이나 집회를 금지하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로마제국 내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감독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또 회중에는 장로와 집사라는 지도자들도 결성되어 더욱 조직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이들은 제국과 교회가 마찰을 할 경우 교회를 선택하는 등 강한 충성심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행위들은 로마제국에 하나의 반국가적인 조직체를 형성하는 징조로 보였다.



3. 박해의 현장(네로, 도미티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디오클레티안 등)

12사도들은 모두 박해와 더불어 순교의 길을 걸었고 기독교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바울도 박해 가운데서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이렇게 기독교는 초기 역사부터 박해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황제에 의해 국가적으로 박해를 가한 대표적인 첫 번째 경우는 역시 네로 황제의 박해였다. 주후 64년 6월 18일 로마에는 대화제가 발생하였다. 도시의 14구역 중에서 10구가 소실되었던 것이다. 이 화재는 당시 네로 황제가 로마사를 다시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네로는 누군가 범인이 잡히지 아니하면 자신의 입지가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민중들의 소문들을 억누르기 위해 네로는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말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역사가 타키티우스(Tacitius)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제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해 네로는 이미 배덕적 행위로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씌우고 이들을 잔인하게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쫓는 소위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Tiberus) 제위 기간 중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에 의해 처형된 인물이다. 이 악한 미신은 한 동안 주춤하였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타키티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방화의 주범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전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배척하는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이 당시 네로의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의 박해 모습을 타키티우스는 아래와 같이 비교적 상술하고 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하였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 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다.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청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 경주처럼 옷을 입고 그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써 원형 경기장에서 스페타클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네로의 박해의 범위가 어디까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세기 후반부터 2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저술가들은 네로의 박해를 기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교적 로마시 외의 박해 기록은 네로 당시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박해의 중심은 로마시였다고 추론할 뿐이다.



네로 이후에 기독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한 황제는 도미티안 황제(Domitian, AD 81-96)였다. 그의 박해 이유는 명확하지 아니하지만 아마도 로마의 신들과 전통들을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도미티안의 비위를 거슬렸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의 결정적인 동기는 그의 유대인 박해에 있었다. 도미티안 황제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반발하기 시작하였고 도미티안은 그들을 박해하였다. 문제는 아직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방인들에게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아니했으므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무차별로 박해를 가했다. 로마에선 황제와 인척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부(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처형되었다. 이 당시에 소아시아에 박해가 있었고 대표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고 교회들도 시련을 겪었다.



제2세기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기록은 1세기보다 많은 사료들이 증가하였다. [순교자들의 행전]이라는 책은 여러 순교자들의 체포, 재판,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2세기의 기록 가운데서 박해에 대한 로마 당국의 태도는 소아시아 지역의 한 통치자인 플리니(Pliny)와 트라잔(Trajan)황제 사이에 교류한 서신(AD 112-113)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



주후 111년 플리니라는 사람은 오늘날 터어키 북부 해안지역의 비시니아(Bithynia)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곳 총독으로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그곳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어떤 사람이 총독에게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보냈을 때 그는 이미 기독교가 불법 종교 단체임을 알고 있었다. 플리니는 기독교인이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박해도 취하지 아니했다. 그리고 신앙을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3번의 개심 기회를 주었다. 또한 그들이 로마시민인 경우에는 법에 따라 로마로 호송하였다. 그가 특히 로마의 트라잔 황제에게 서신을 통해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대해 문의했을 때에 황제는 아직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규칙이 제정되지 아니했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성격으로 보아 국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색출해 낼 만큼 흉악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고발이 접수된 사건만 처리할 것이며 색출하기까지는 하지 말도록 하였다. 로마의 신들에게 숭배할 것을 받아드리는 자들은 용서하라고 하였으며 익명으로 고발된 것은 무효라고 하였다. 이는 로마법의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이 시기 동안의 박해는 색출하지는 아니했지만 당국에 소환되었을 때는 처벌한 것이 제국의 공식적인 입장인 것으로 보여진다.



2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박해는 심화된 것처럼 보인다. 박해의 주인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AD 121-180)였다. 그는 그의 전임자들에게 비교하여 상당히 학식과 교양이 있는 지도자였으나 여전히 미신적이고 교만하였다. 그는 점성술가를 찾았으며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는 희생의 제물을 드리곤 하였다. 자신의 제위 기간 중에 야만족들이 침략하고 홍수와 전염병이 발생하는 등 자연재해가 발행하였다. 그는 이러한 재난을 두고 제국의 신들이 분노한 결과라고 하였으며 신들의 분노를 유발시킨 것은 바로 기독교신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박해를 지원하였으며 로마의 옛 종교의 부흥에 힘을 썼다. 그의 박해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건으로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사건이 있다.



펠리시타스(Felicitas)는 대단히 유능한 교회의 일꾼이었다. 교회를 위해 열심을 다한 그녀를 당국과 이교도 사제들은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개심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완강하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하여 더욱 더 큰 승리를 거두리라."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박해자들은 그녀의 아들들을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들 모두는 처형되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유명한 기독교 학자였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AD 100-165)가 순교하기도 하였다.



용과 비엔나에서도 박해가 있었다. 이곳의 교회들이 브리기아와 소아시아에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져 있다. 이곳의 박해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교인들의 공공 장소 출입이 금지되고 폭도들이 거리에서 추격하거나 돌을 던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총독과 폭도들로부터 고문이 행해졌고 순교자들은 최후를 맞아야만 했다. 신자들을 가두었던 장소가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질식해 죽는 사태도 발생하였다고 전하였다.



2세기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전반적으로 위험 수준에 달해 있었다. 로마제국의 전역에서 계속 박해를 받았다는 근거는 없으나 항상 위험을 동반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박해는 팔레스타인, 로마, 소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프랑스 지역의 교회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흔적을 보이고 있다. 2세기의 박해 동안 교회지도자들의 박해 당한 경험들이 있지만 가장 극적인 순교의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처음 사례는 황제 트라얀 시대에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희생자는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35-107)라는 지도자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시리아의 대표적인 교호였던 안디옥교회의 감독으로 40년 간 교회를 위해 봉사했으며 특히 이단들 퇴치를 위해 열심히 싸운 믿음이 강한 감독이었다. 그는 노년기에 로마의 트라얀 황제(98-117)가 동방의 도시들을 순회 방문하던 중 안디옥을 방문하였다. 황제는 이그나티우스의 명성에 끌려 그를 만나게 되었다. 황제는 기독교를 멸시하는 사람이었으며 이그나티우스를 대면하자 혹독한 말로 그를 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그나티우스는 황제의 말에 응수하게 되었고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트라얀: "여기 사악한 마구,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있구나!"
이그나티우스: "나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자입니다."
트라얀: "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리스도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이그나티우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적법한 절차도 없이 이그나티우스를 로마로 압송하여 맹수들의 밥이 되게 명하였다. 드디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국립 경기장인 콜로세움으로 알려진 격투장에 서게 되었다. 약 4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이었다. 구경꾼들은 몰려들었고 드디어 황제가 이그나티우스를 맹수에게 던지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 이그나티우스는 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맹수의 이빨 사이에 낀 하나님의 곡식으로 빻아져서 주님을 위한 거룩한 빵이 되고자 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를 덮쳐 그는 결국 장열한 순교를 하였다. 후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사자들이 먹다 남은 그의 뼈를 모아 매장하여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더 좋은 곳(빌 1:23)으로 갔다.



또 하나의 극적인 순교는 계시록에 나타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하나였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Polycarp, AD 69-155)의 경우이다. 155년 경 그는 순교를 당했는데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그는 2세기에 발생한 박해를 피하여 시의 외곽에 숨어 있었는데 하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로마의 집정관 앞에 압송되어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기를 강요하였다. 이를 거절하자 집정관은 여러 가지로 위협을 하면서 그의 신앙을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폴리갑은 맹수의 위협이나 불의 위협에도 굴복치 아니하였다. 집정관은 최종적으로 네가 만약에 한 번만 굴복하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때 폴리갑은 유명한 답변을 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으나, 그분은 나에게 어떤 잘못도 행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 준 나의 왕을 욕할 수가 있겠소. 당신은 한 시간 동안 타는 불로 나를 위협하나, 그 불은 이내 꺼질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장차 올 심판의 불과 영원한 징벌의 불은 모르고 있소. 당신 마음대로 처결하시오."



이 말에 분노한 집정관은 횃불을 장작더미에 붙이도록 명령하였고 이내 연기와 화염이 폴리갑을 에워 쌓다. 이러한 장열한 지도자들의 순교는 로마,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으며 대표적인 사람은 카르타고의 지도자였던 키프리안(Cyprian, AD ?-258)이었다.



갈리우스: "그대가 키프리안인가?"
키프리안: "그렇습니다."
갈렐리우스: "그 일을 재고하라."
키프리안: "당신의 그러한 요청을 재고하십시오. 이것은 재고할 필요도 없는 단순한 문제입니다."
갈렐리우스: "로마의 신들과 그들에 대한 신성한 의식들의 반대자로 자청하고 나선, 신성 모독자인 그대의 생명은 너무 길었다. 그대는 악질적인 범죄의 기수였기에 우리는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의 사귄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우리는 키프리안이 참수되는 것을 기뻐한다."



이 일 후에 곧 키프리안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부장에 의해 단칼에 목을 베이게 되었다.



177년에는 프랑스의 남부 지역인 리용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박해의 파도가 밀려왔다. 당시 군중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근친상간과 식인의 죄로 고발하는 무식한 작태가 연출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식에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하니까 이를 식인종의 행동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예식에 불신자들을 참여시키지 아니한 여파로 기독교인들은 은밀한 집단으로 오해했으며 이는 곧 근친상간의 비밀집단으로 해석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끌려가서 변질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신앙을 고수하며 순교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날로 심화되고 장기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로마에서는 대도시에서 유일하게 피신할 수 있었던 곳은 지하 공동묘지로 알려진 지하갱도의 카타콤이었다. 적어도 1세기 말부터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신앙의 절개를 표현하기 위해서 비둘기, 물고기, 떡 종려나무 등으로 기독교신앙의 상징들을 벽화나 비문들에 남기곤 하였다. 오늘날 일부 교인들이 자동차에 물고기의 스틱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로마제국의 박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죽임을 당했으며 이들 "순교자들의 피는 곧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교회는 성장했다.




3세기 들어와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증가하는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인 쟁점이 제국의 중용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원래 로마 정부는 정치적인 속성상 종교에 대한 보편적인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제국의 통합과 일치를 위한 정부의 권한 강화를 꾀하곤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보편성을 인정치 아니하고 요지부동의 자세를 취하였고 여기에 대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했었다. 이러한 긴장 가운데서 4세기 초 황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에 의한 기독교 박멸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부하 갈레리우스와 막시미안과 결탁하여 기독교를 뿌리 뽑으려는 시도를 했다. 황제 자신은 신로마의 신인 주피터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하였으며, 두 부하는 헤라클레스 신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황제는 303년에 칙령을 선포하고 교회 건물을 파괴하고 모든 성경을 공개리에 불사르는 조치를 내렸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권리 보장의 박탈은 물론이고 모든 성직자들의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제국 내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멸절시키게 했다. 이때 순교한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달했고 기독교인들은 "사냥터의 모리배에게 몰리는 토끼"처럼 쫓겨다녔다. 자기를 쫓고 있는 자들이 성경을 불태우면서 "네가 믿는 성경이 어디 있느냐"고 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내 마음속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305년에 디오클레티안황제가 죽은 후 갈레리우스는 6년 간 박해를 계속하였다.




네로, 도미티안, 아우렐리우스, 디오클리티안 외에도 하드리안 황제 등 모두 7명의 황제들이 박해를 했으며 이 황제들의 박해를 7대 박해라고 한다.





Ⅱ. 이단들의 위협과 교회



1. 영지주의(Gnosticism)

2세기부터 기독교가 전반적으로 확대되면서 만나게 된 현상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신앙의 동화와 극복 문제였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항해서 발생한 영지주의 대두가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영지주의 사상은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기원은 오랜 것이었다. 이 사상에는 유대교적 형태와 이방 종교적인 형태가 공존하고 있었다. 우선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를 두었고, 페르샤의 이원론적인 개념에도 관련되어 있었다. 곧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는 사악하고 현상세계의 뒤에 있는 이념적 관념의 세계는 선하다는 사상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물질과 같은 악한 현상세계에 갇혀 있으면서 항상 선한 세계인 다른 세계로 갈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원리 위에서 우주관을 형성하다보니 자연히 유대교의 창조를 악한 신의 행위로 간주하여 구약의 신을 악한 세계를 창조한 악한 신으로 해석하는 신앙관을 구축하게 되었다. 물질세계는 악하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은 열등하고 불완전한 하위 신으로 규정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를 데뮈르그(Demiurge)라고 불렀다.



이들의 사상의 이원론이 기독교에 치명적으로 도전을 하게 된 것은 우주관이나 창조세계관 뿐만 아니라 기독론에 있어서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였다. 창조세계의 모든 물질은 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인 그리스도가 물질인 육체를 입고 올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지 않고 일시적으로 인간의 몸 속에 머문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가현적이거나 그림자 정도로 나타난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가현설(Doetism)이라 한다.



영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의 구원관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그 속에 갇혀 있는 영혼을 구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승천하여 그들의 영원한 영적 실제의 참된 세계인 선한 신 플레로마(Pleroma)와 재결합하는 것이다. 영혼이 이러한 영적 실체의 참된 세계와 합일을 가져다주는 신비한 영혼의 광명을 영적인 지식 곧 영지(gnosis)라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을 가진자들이 3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완전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적" 인간, 둘째는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구원이 가능한 "정신"적인 인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의 가능이 없는 "물질"적 인간으로 분류하였다.



복음역사의 초기에 등장한 이색적인 기독교 색깔을 가진 영지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근거를 뒤흔드는 도전을 하였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동질시 보지 아니하며 더군다나 구약의 하나님을 악한 신으로 규정하는 등 신관에 있어서 큰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여 구약은 악한 신의 역사로 이루어진 역사로 간주하므로 성경관에 있어서도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구원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육을 부인하므로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의 최후의 희망이었던 부활을 부인하는 극단론으로 이어졌다. 결국 창조관에서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주장과 정반대의 비진리를 선포하였다.



2. 말시온(Marcion)

영지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이원론의 입장을 취한 이단은 말시온이었다. 말시온은 교회 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등장하였다. 말시온은 소아시아의 시노페(Sinope)라는 지역에서 훌륭한 기독교 가정에서 양육을 받았으며 아버지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부유한 선박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고, 139년경 고향에서 신앙적인 문제로 로마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로마교회에 참석하였고, 자선사업을 위해 거액의 희사금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시온은 교호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신앙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바울사도만이 복음을 신앙적으로 이해했던 유일한 사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 서신만을 진정한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반대하여 가현설의 입장을 취하였다.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을 창조한 악신으로 보았고 신약의 하나님만 진정한 참 하나님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악한 물질 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금욕생활을 강조하였다. 육신을 거부하고 성적 생활도 악한 창조신의 유혹에 빠지는 수단으로 보았다.



말시온은 144년에 교회에서 출교당했다. 말시온과 추종자들은 바울의 10개의 서신과 누가복음을 묶어 그들의 정경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말시온의 존재는 영지주의자들보다 어떤 면에서 교회에 더욱 위협적인 존재들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기존 교회의 직분을 무시한 운동이었지만 말시온은 기존 교회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더욱 기존 교회에 위협을 가중시켰다. 그래서 이들의 운동은 시리아 지역에 오래 동안 남아 있었으며 5세기경까지 잔존하였다.



3. 몬타니즘(Montanism)

영지주의나 말시온과는 달리 교리적으로는 기독교적인 근거를 따르면서 계시나 성령 체험적인 극단 신앙을 주장하면서 교회를 위협해TEjs 종파가 몬타니즘이라는 이단적인 종파였다. 2세기에 접어들자 교회가 사도적인 열정과 원색적인 영성의 능력이 저하되어 갔다. 특별히 이러한 때에 초기 사도교회의 성령 체험을 사모하며 계시 체험적인 극단적인 신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을 일으킨 그 대표자가 몬타누스라는 사람이었다. 몬타누스는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믿음과 예언자적인 열정을 가지고 임박한 종말신앙을 강조하였다. 몬타누스는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역에 연접해 있는 아르다보(Ardabau)에서 출생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시벨레(Cybele)라는 존교의 한 승리였다.



156년경에 몬타누스는 자신을 성령의 특별한 도구라고 선포하면서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약속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두 여선지자인 프리스카와 막시밀라는 예언과 방언 그리고 계시를 통해 세계의 종말이 임박함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프리키아에 새로운 하늘의 도성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강조하면서 성도들이 그곳으로 모여들 것을 종용하였다.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성도는 독신, 금식, 일체의 육신적인 용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를 강조하였다. 당시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던 교회는 이러한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경향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 운동이 확장되어 가자 소아시아의 감독들은 교회를 보하기 위해 160년경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회의를 소집하고 몬타누스를 정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칼타고에서는 초대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인 터툴리안이 200년경 몬타누스주의자가 되는 등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어거스틴 시대까지 지속되는 저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몬타누스의 금욕사상은 기독교 종교에 보편적인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후세에 수도원에서 재생되기도 하였다.





Ⅲ. 정통교회의 자리매김

공교회는 초기의 박해들과 2세기 타나난 이단들과 극단적인 종파들에 대항하여 하나로 결속할 것을 촉구하면서 정통(Orthodox)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모든 교회가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는 곧 카톨릭교회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카톨릭교회라고 하면 천주교를 인식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천주교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공교회를 지칭할 때 보편성이 있다고 해서 카톨릭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이단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교회의 감독들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단들의 이설을 막기 위해 교회는 성서의 공인작업이 실시되었다. 그래서 공인된 신약성서가 출현되고 신조가 형성되었다. 예를 들면 훗날 우리가 고백한 사도신경의 전신인 옛 로마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졌다. 이 고백서는 영지주의 사상과 개념들을 막으려는 현저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곧 천지를 만드신 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지옥으로 내려 가셨으며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장차 거기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나는 성령과 거룩한 보편교회와 성도의 사귐과 사죄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영지주의나 말시온 그리고 극단적인 종파들에 대항하여 교회는 건전한 교리와 정경 형성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다. 결국 초대교회는 2세기에 들어와서 정치적인 외적 핍박과 더불어 내부적인 이단들의 출현으로 교회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기독교의 바른 가르침과 박해에 대한 변증을 위해 여러 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훌륭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저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을 교회의 스승 혹은 아버지라는 뜻에서 교부들(Church Fathers)이라고 부른다. 또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변증가들(Apologist)로 불리워지며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변증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교부들이나 변증가들은 모두 공교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자들이다. 변증가들과 교부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들을 논하면 아래와 같다.



1. 변증가들(Apologists)

이교도의 세계에 기독교가 침투하면서 그들의 공격을 대처하고 기독교의 신앙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변증가들은 변증의 그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변증의 목적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하나는 황제나 고위 관리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 저술하였다. 다른 하나는 이교 철학자들이나 이단들의 잘못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막고 기독교의 바른 정체성과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황제에게 변증서를 보낸 변증가들로는 하드리안 황제(117-137)에게 글을 바친 콰드라터스(Quadratus)와 아리스티테스(Aristides)가 있고, 말쿠스 안토누스 황제(137-161)에게 글을 보낸 아덴의 철학자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가 있으며 또 아렐리우스 황제(161-180)에게 변증서를 보낸 사데의 감독 멜리토(Melito)와 히에라폴리스 감독 아폴리나리스(Apollinaries)가 있다. 기독교를 반대하던 이교도들에게 보낸 변증서로는 익명의 저작인 "디오그네투스에 보내는 편지"가 현존하고 있고, 앗시라의 사람인 타티안(Tatian) 등이 있다. 특히 당시 4복음서를 종합하여 만든 그리스도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변증가들 중에서 가장 우리의 주목을 집중시킨 자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였다. 저스틴은 "제1변증서", "제2변증서", 그리고 "트리포와의 대화" 등 3개의 변증서를 저술하였다. 저스틴은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를 유비적으로 설명하여 구약과 신약의 연계고리를 이론적으로 전개하였다. 저스틴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특히 그의 사상 중 로고스(Logos)는 특징적이다. 그는 기독교를 사람들이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철학의 옷을 입혀 설명해야 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철학으로 격하시켰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비판의 소리도 듣게 되었다.



변증가들의 사상을 정리하면 결국 그들은 구약의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을 주장하였고, 구약의 모형은 그리스도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부활의 정당성과 성경의 비모순성,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 등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변증하기 위해 노력을 다하였다.



2. 교부들(Church Fathers)

변증가들의 뒤를 이어 기독교의 신앙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하면서 소위 신학적인 작업을 했던 지도자들인 교부들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콘스탄틴 대제 이전에 있었던 교부들은 주로 두 종류로 구분한다. 첫째는 속사도교부들과 둘째 사도 이후의 교부들이다.



3. 속사도교부들

사도시대의 교부들은 특히 사도들로부터 전승해온 신앙의 유산을 제3세대들과 그 후의 모든 세대에게 전해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사도들과 이후 세대들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사도들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졌던 자들로서 사도들의 제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도들과 개인적인 면식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주장한 전체 교리를 통해 사도들의 전승을 깊이 나타낸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35-107) 헤르마스(Hermas,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Barnabas of Alexandria), 파피아스(Papias, AD 60-130). 그리고 폴리갑(Polycap, AD 69-155)을 들 수 있다. 속사도교부들이 남긴 저작들은 초기 기독교의 생활과 사상을 아는 데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클레멘스의 제1서한은 신약성서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교 문헌 중에서 정확히 연대를 알 수 있도록 기록한 최초의 문헌이다. 또 이그나티우스의 7개의 서신들(에베소, 로마, 빌라델비아, 서머나, 폴리갑 등)을 통해 감독직의 발달과 강화 그리고 성만찬의 집례에 관한 주교의 권한 강화, 교회와 감독과의 관계의 중요성 등 이단들의 횡포에 대한 교회의 대처하는 모습 등을 원색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전장에서 간략하게 취급하였지만 사도시대 직후의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의 행적과 원시교회의 신앙 생활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저작들을 남겼다.



4. 속사도 이후의 교부들

교회를 교회답게 사도들의 전승에 따라 지속하려는 노력은 속사도교부들 시대 이후에도 활기차게 나타났다. 특히 이단들의 공격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이므로 공교회의 지도자들은 신학적으로 이를 대응하는 데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이때는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로 분리되는데 대표적인 헬라교부는 이레니우스(Irenaeus, AD 130-200),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160-211), 오리겐(Origen, AD 185-254)이 있고, 라틴교부는 터툴리안(Tertullian, AD 150-220)과 키프리안(Cyprian, AD ?-258)이 있다.



5. 헬라교부들

헬라교부란 헬라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 있었던 자들로 소아시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양분되었다. 소아시아 학파는 요한의 뒤를 계승한 자들로 성서주의를 표방하며 사색이나 철학보다는 단순한 신앙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Hypolytus, AD 170-236)가 있었다. 특히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에서 출생하였으며 서머나 감독으로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의 제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헬라 고전과 신구약 성경에 정통하였따. 그는 프랑스 리용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될 만큼 복음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고, 또 갈리아와 같은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가 20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순교하기까지 그는 "사도적 증명", "이단설에 대한 철학적 논박", "성서적 비판", "말시온 사상 비판", "부활의 논증", 등 5권의 저작을 남겼다. 이레니우스는 특히 영지주의 이원론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그리스도의 성육신 부정에 대한 강한 변증과 이론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논박하였다. 동시에 기독교의 전통의 유구함을 성경 이전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함을 주장하면서 이교도들이 공격했던 기독교 역사의 비전통성에 대한 반논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총체적인 인류 역사의 회복을 주장하여 복음의 역사성과 영원성을 확인해 주었다.



헬라교부 중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교리신학교(Catechetical School of Alexandria)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당시 세계적인 도시였던 로마, 안디옥,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등과 같은 대도시의 교회에는 기독교인들이 쇄도하였기 때문에 세례 지원자들(Catechumens)을 위한 예비교육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교리를 가르칠 교사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양성소 혹은 교리학교가 세워지게 되었고 대표적인 경우가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철학학교를 세우고 많은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헌신한 지도자들은 철학과 고전에 풍부한 소양을 가지고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거나 소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들 수 있다.



클레멘트는 시칠리아 사람 판타누스(Pantanus)가 180년 경 알렉산드리아에 철학과 신학교를 세운 이래 판타누스의 제자로서 기독교의 교리문답을 12년 간 가르쳤다. 세베리우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 안디옥으로 피신하였다가 목회와 저술 활동을 하였고 나중에 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왔다. 그는 교양이 깊고 문학에 취미가 있었던 학자였다. 그는 "이방인 또는 헬라인에 대한 권면",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지도서"와 "이단에 대한 반박문"을 저술하였다.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헬라신학의 꽃을 피운 사람은 그의 제자였다. 오리겐이었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헬라신학자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생으로 그의 부친은 열정적인 신앙인으로 순교당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교를 자신의 신앙의 마지막 결실로 여겼다. 그러나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순교의 길을 나서지 아니하고 박해받는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소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클레멘트에게서 교리를 전수받고 세베루스의 박해로 인해 클레멘트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신학교의 교수직을 맡았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교리신학교의 교장으로 역임할 만큼 박식하였다.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가난과 금욕을 강조하였고 본인이 그렇게 살았다. 그는 맨발에 두 벌 옷이 전부였고, 맨 바닥에서 자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자들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어 거세한 독신으로 일생을 지냈다. 이러한 오리겐의 모습과 명성은 일부 지도자들의 시기를 사게 되었다.



특히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데메트리오의 음모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팔레스틴의 가이사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신학교를 개설하고 후배를 양성하였다. 오리겐은 그의 스승의 로고스 철학을 통한 기독교의 철학적인 접근에서 더 발전하여 성경을 독창적으로 연구하여 신학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았으며 사람이 육체와 심령과 정신으로 구성된 것처럼 성경해석도 3가지 종류의 의미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경해석도 도덕적 의미, 영적 의미, 우화적(allegorical) 의미로 이해해야 하다고 하였다. 마지막 우화적 의미란 성경구절이나 글자 하나하나에 영적 의미가 있음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중세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에까지 지속되었다. 오리겐은 성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주해했으며 신학분야에 있어서도 "기독교 요의"를 출간하여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오리겐은 또한 그동안 이교도로서 기독교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공격을 학문적으로 시도했던 플라톤주의자인 켈수스(Celsus)에 대한 "켈수스를 반박함"이란 반박글을 내었다.



이것은 고대 기독교 세계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가장 잘 변론한 문서로 알려져 있다. 작품 외에도 실천적인 과제를 다룬 글들을 남겼다. 오리겐은 그동안 기독교 진리를 희랍철학의 개념을 바탕으로 해석해 오던 오랜 과정을 완료한 것으로 평하고 있다. 오리겐의 신학적인 원리는 플라톤의 이원사상을 극대화하여 물질세계 뒤에 존재하는 영적 실체만을 실제 세계로 인정하는 원론 위에서 전개되었다. 오리겐은 특히 만인구원설과 영혼선재설 등으로 엄격한 정통파에 의해 공격을 당하게 되었지만 당대에 기독교의 신학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 지도자였으며 특히 성경주석을 통한 성경신학적인 접근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6. 라틴교부들

아프리카의 교회들 가운데서 헬라문화권에 속해 있던 알렉산드리아와는 달리 서부 지중해 연안의 칼타고 지역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라틴 기독교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곳에는 특히 고대부터 이탈리아와의 접촉이 많았고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초대의 유명한 교부들인 터툴리안, 키프리안 등이 나타났다.



터툴리안(Tertullian, 150-220)은 칼타고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의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이교도인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법률을 전공하였으며 철학과 역사에 관계되는 책들을 통해 지식을 많이 섭렵하였다. 그는 190-195년 사이에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로마에서 칼타고로 귀환한 후에는 장로가 되었고 기독교 서정을 연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또 몬타누스가 가지고 있던 비세속적이고 금욕적인 주장에 매혹되어 몬타누스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최초로 라틴어를 사용하여 저작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법률적인 논리와 사고의 양식으로 변증론자들과 이레니우스의 신학에 근거하여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무려 30여 편의 저작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의 변증과 교리 그리고 윤리에 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죄와 은총의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사도바울 이후에 어떤 저술가보다도 심오한 교리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 중에서 후대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로고스 기독론의 확립이었다. 그는 로고스의 개념을 볍률적인 사고와 명료성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교부들이 주장한 특히 헬라교부들의 이론보다도 훨씬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프락세아스를 반박함"이라는 논문에서 3위 1체 교리에 대한 명료한 해석을 내렸고 그의 정의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거쳐 삼위일체 교리의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같은 한 분이지만 위격(person)은 3위로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터툴리안 다음으로 칼타고의 유명한 지도자는 키프리안이었다. 주후 248년에서 258년까지 그는 감독으로서 교회를 섬겼다. 키프리안은 당시 교회의 성결문제로 쌍무에 휘말려 있던 교회를 바로 세우는 노력을 했다. 250년 데키우스(Decius)황제 치하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고백하는 것을 부인하고 신앙을 변절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나 위협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계속하였다. 이들을 신앙고백자들(confessors)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박해가 끝났을 때 많은 변절했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의 정회원이 되기를 원했다. 키프리안은 이를 반대하였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강경책에 맞섰다. 이러한 문제는 로마에서도 발생하였다. 로마의 감독 코넬리우스는 키프리안의 정책을 지지하였으나 극단론자였던 장로 노바티안(Novatian)은 교회를 분리하여 초대교회의 새로운 노바티안 분파를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Ⅳ. 마지막 박해와 기독교의 전환기



3세기 중후반까지 기독교는 박해 가운데서도 성장하며 신앙을 수호하고 역사에 미아가 되지 아니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 역사에 새로운 지표를 긋는 사건이 4세기에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디오클레티안의 초대교회의 마지막 기독교 박해와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의 역사이다. 디오클리티안 황제는 284년에 즉위하였다. 이미 기독교는 3세기를 거쳐 7황제로부터 대표적인 박해를 받았다. 박해의 주역을 담당했던 로마 황제들은 네로, 트라잔, 하드리안, 아우렐리우스, 데키우스, 발레리안 등이었고 4세기에는 303년부터 디오클리안황제가 박해했다. 사실은 디오클레티안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의 처인 프리스카와 딸 발레리아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많은 신하들과 관료들도 기독교인들이었다. 치안대와 군인들이 성경을 불태우고, 기물들을 탈취하며, 교회 건물들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 삼았다. 그는 곧 4가지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의 칙령은 잔인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시민권을 박탈하고 모든 교회를 불태우고, 성경을 전소하는 조항은 물론이고, 성직자와 교회를 직분자들을 체포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투옥된 지도자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게 하고 불복할 때에는 가혹한 형벌을 가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박해는 적어도 10년 간 지속되었다. 박해가 끝났을 때 어떤 교회의 지도자가 몸에 채찍 자국이나 고문의 흔적이 없으면 신앙을 의심할 정도였다.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은 고문으로 인해 지체 장애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기독교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콘스탄틴대제(Constantine the Great)의 등장이었다.



콘스탄틴은 312년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로마의 권직에서 제가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진군해 갔다. 전투가 있기 전날 밤에 콘스탄틴은 하늘에서 십자가를 보았고 그 위에 이것은 정복의 표시라는 글자를 보았다. 그는 만약에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다음날 그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콘스탄틴은 밀란에서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박해의 종식을 가져왔다. 당시의 교회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그들 이전의 탄압자들에 대한 모든 공포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날마다 현란한 축제를 계속했다. 빛은 어디에서나 비쳤고 예전에는 서로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서로 웃는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로 인사했다. 그들은 도시고 농촌이고 할 것이 없이 가르침을 받은 대로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재자 되신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춤을 추고 노래했다. 옛날의 고민들은 잊혀졌고 모든 무종교는 망각되었다. 이때까지 열심히 기다려 온 사람들은 현재의 좋은 것들을 만끽했다."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혜택도 주었다. 관료의 요직에 기독교인들을 임명하고 교회의 재산을 환원시켰다. 그리고 유배되었거나 투옥되었던 교회의 지도자들이 돌아왔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새로운 이상적인 기독교 국가의 재건과 수도의 형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틴노플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그 곳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겼다. 그리하여 비잔틴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종교문제를 국가가 취급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드디어 312년에 도나티스트(Donatist) 논쟁이라고 알려진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도나티스트 문제도 역시 박해의 여파로 생긴 칼타고의 교회분파 운동이었다. 311년에 케실리안(Caecilian)이라는 사람이 칼타고의 감독으로 임직하는 임직식에 감독들 중에 펠리스(Felix of Aptunga)라는 사람이 참석하였다. 그는 최근에 박해시에 성경을 버린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펠릭스에 대해 비난을 하던 사람들은 케실리안의 임직식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논쟁은 점점 발전하여 314년 콘스탄틴 대제의 주제 아래 알레스(Arles)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 최초의 서방교회의 공의회였다. 여기서 케실리안이 지지를 받게 되자 운동을 주도한 도나투스는 분리하여 새로운 분파를 결성하였고 이를 도나티스트라 하였다. 황제는 도나티스트 논쟁을 취급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문제에 대한 규칙을 세웠다.



첫째, 황제는 필요하다고 인정될 시에 종교회의나 공의회를 소집한다.
둘째, 황제는 종교회의나 공의회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허락해준다.
셋째, 만일 그 결정이 어떤 파에 속한 부류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황제는 공권력으로 그 결정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결정은 차후에 황제가 교회의 공의회를 주도하고 교회일에 관여하는 근간을 제공해 주었다. 교회의 국가와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본폴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사역과 은사(1).  (0) 2023.04.30
논쟁을 피하라  (0) 2023.04.30
스크랩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0) 2023.04.29
스크랩 십자가의 붙잡인 삶  (0) 2023.04.29
행복을 거두는 방법  (0) 202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