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누가복음 18장 35~43절)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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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두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함께 예배하는 모든 자녀들의 마음에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지난 주 말씀이 잊혀지지 아니하고 한 해 동안 순간 순간 마음에서 지켜지고, 입술에 고백되고, 행동으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며, 합당한 경배를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여 드리며, 말씀하시면 즉시 나아가고, 말씀 하시면 즉각 멈춰서는 순종의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여리고성에 사는 맹인을 치유한 사건 이야기입니다. 지난해 대림절 기간에 사복음서 말씀드리면서 각 복음서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소개 해 드렸는데,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병든 자들과 약자들 그리고 여인과 나그네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우리 같은 서민층들이 딱 읽기 좋은 복음서가 누가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도 지극히 사회적인 약자인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35~36절을 읽어 드립니다.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아멘.
여리고는 예루살렘 기준으로 어디쯤 있는 성일까요? 여리고 하면 여호수는 떠오르는데 지도상 위치는 깜깜하신가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성경 읽으시다가 인물 이름이 나오면 이름의 뜻과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 알아 보시고, 지명이 나오면 검색해서 위치가 어디쯤인지 찾아 보시라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어디쯤이고 과거 역사에서 여리고 성에서 어떤 역사적인 사건 이 일어났었는지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가 이렇게 적극적 이어야 합니다. 이미 사전 지식이 되어 있는 분은 훨씬 더 입체적으로 성경을 접근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인터넷에 검색만 해 보면 거의 다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에 진심을 보이는 사람이 곧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름, 지명, 역사 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성경을 읽으시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요단강 건너 동쪽은 모압 땅입니다. 이 모압 땅 느보산에서 모세는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광야생활 40년 만에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처음으로 정복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에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수 6:26)고 했습니다.
시간이 약 450년쯤 흘러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이세벨 여왕)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왕상 16:34)
대충 이런 정도의 스토리가 여리고 성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들도 이런 정도는 술술 이야기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이 숫자 만큼 성경 통독하는 것을 목표로 계속해서 일년 일독(3독, 6독) 해 나가시고 점점 성경의 전문가가 되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여리고 성이 예수님 당시에도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성에 맹인이 살았습니다. 맹인은 당연하게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구걸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 앞에는 사람들이 잘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빛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저 하루 하루 죽지 못해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의 무리가 그 앞을 지나갑니다. 맹인은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에 놀라서 이게 무슨 일이냐 라고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일은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그에게 예기치 못한 기적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맹인과 예수님이 대면 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37~39절을 읽어 드립니다.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맹인에게 누군가가 대답해 주기를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중이고 많은 무리들이 따라가느라 시끄러운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맹인은 곧바로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구걸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나가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는 말입니다. 평소에도 이 말을 수시로 해왔었을 것이기에 불쌍히 여겨서 조금의 돈이라도 제발 구제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은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맹인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이 무리들이 아니고, 그 목적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분명히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만 반복해셔 외쳤습니다. 그 많은 무리들이 지나가는데 맹인은 오직 예수님 한 분만 지목해서 소리쳐 부릅니다.
그가 만약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니 이 때 돈이 많이 생기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면 마구잡이로 제발 앞 못보는 이 맹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이사람 저 사람에게 소리쳤을 겁니다, 그랬으면 아마도 그는 어느 정도의 구제금을 받아 낼수 있었을 겁니다.
맹인이 소리쳐 외치면서 예수님 이름 앞에 다윗의 자손을 붙인 것부터 수상합니다. 그 맹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소문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준다는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고, 그 분이 다윗왕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 오신 메시아 였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그 분이 그토록 가난한자, 소외된 자, 병든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직접 찾아 다니시며 치유해 주시는 것을 보니 예수라는 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본체 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자라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성품, 인격)은 사랑 이시고, 그 사랑을 표현하고 증거하는 행위들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풍부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움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실감나게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은혜)를 수시로 받고 있다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행위가 “긍휼히 여기신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궁휼히 여김을 구하는 자는 긍휼을 얻게 될 것이 분명 합니다.
맹인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하고 그저 소문만 들었던 예수님을 단 한번 만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 한 마디만 외치고자 작정하고 소리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말을 하고자 단단히 준비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기도했던 자신의 기도의 제목이자 마음의 소원이었기에 거침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상황에 마주치게 될 것을 훤히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연히 여리고성을 지나 가신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는 기도를 오래전부터 이미 듣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간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맹인을 직접 만나려는 발걸음으로 역사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기도와 소망과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 예수님이 찾아오시도록 하는 방법은 맹인과 같이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 단 하나의 기도를 진심으로, 전심으로 간절하게 간구하게 되면 반드시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예비된 시간에 만남의 기회를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데 기도하면 응답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 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대단한 영적 전쟁이 일어 납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자의 외침을 가장 듣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아멘.
맹인이 얼마나 소리를 쳤는지 그 소리를 거슬려 한 자들이 그만 좀 소리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조용히 시키려 합니다. 이 장면에서처럼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여러 가지 곤고함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엄청난 육체 노동이자 정신적인 고충이 따릅니다. 스스로 지치기도 하고, 응답이 더디오는 것에 낙심하기도 하고, 바쁜 일 때문에 뚝뚝 끊기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은 우리들의 의지와 삶의 상황 때문에 발생하지만, 그 뒷면에는 사탄의 음흉한 방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꾸짖어 잠잠하라”라는 소리가 어떻게 변형 되어 전략적으로 공격해 오냐면, 「뭐가 그리 급해 오늘 하루만 쉬어 내일부터 하면 되잖아, / 오늘은 짧게 하고 끝내 맛 있는 것 먹으러 가야지, / 하루 안 한다고 무슨 일 생기나 나중에 더 채우면 되지, / 기도해 봐야 안 된다니까 들어줄 것 같으면 벌써 됐지, 이제 그만 해 충분히 수고했어, / 몸도 안 좋은데 기도하다 더 병나, 푹 쉬고 몸 좀 좋아지면 하면 다시 하든가 해, / 진짜 앞 일 잘 보는 분 있는데 그 분한테 한 번 가봐, 나도 가봤는데 속이 시원하더라니까, 다음 주에 나랑 한 번 가볼까?」 이런 식의 기출 변형이 무수하게 일어납니다.
맹인의 마음 속에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말도 못할 사탄의 집요한 공격이 있었을 겁니다. 그는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 까지 간구하고 또 간구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믿음 중의 믿음입니다. 기도는 절대로 실패가 없으며 성령으로 기도하는 자를 감당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 주 신년주일 첫 설교 제목 기억 하시죠?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였습니다. 이 제목을 기도의 첫 마디로 삼으시고, 덧 붙여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훌히 여기소서 라는 내용을 더해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것 하나도 필요 없이 올 한해 동안 구해야 할 완벽한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일년 동안 우리의 기도 제목이 다 정해졌습니다. 순종하고 실천으로 옮기시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심령천국 하늘 평안의 은혜를 경험 하시게 될 것입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이 항상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기도를 드리시면서 때마다 일마다 찾아오시고 만나 주시고 응답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기쁨과 평은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맹인이 소리치자 예수님이 반응하시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40~41절을 읽어 드립니다.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앞서 가던 자들은 소리치는 맹인을 잠잠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고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말씀 하십니다. 영적인 시야로 본다면 사탄의 방해를 단호하게 물리치시고 그 땅을 거룩하게 만드신 겁니다.
맹인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이미 그 마음의 소원까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맹인은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즉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 간결한 질문과 대답 속에 얼마나 오랫 동안 이 기도가 쌓여졌는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진짜 간절한 사람은 그 눈빛만 봐도 그 마음까지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일생일대의 자기 소원을 처음부터 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게 해 주세요! 제발 보게 해주세요!”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 소원을 말하기 전에 그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만을 외쳤습니다. 진짜 마음으로 원하는 실제적인 기도의 제목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음성이 들리기 전까지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기도가 이러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 라고 원하는 것만 내어 놓은 것은 순서가 바뀐 겁니다. 마음의 간절한 소원은 품고 있지만, 우선은 진심과 전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며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가슴을 치며 부르짖는데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예수님이 나를 만나 주시려고 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실 것입니다. 내 앞에서 걸음을 맘춰 서시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어보실 때까지때 까지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이 차게 되면 걸음을 멈추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 중심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찾아오시는 은혜를 허락 하십니다. 일단 만나는 것이 성공이 되면 그 때 하고 싶은 소원 다 말히시면 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 동안 우리 마음의 소원을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곧 이루어 주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맹인은 기도 제목과 소원이 우선이 아니라 믿음이 먼저 준비 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올 해 우리는 기도 할 때에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시고, 이것부터 해 주시고, 이것은 언제 까지 해 주시고, 이것 만은 제발 해 주시고. 시간이 없으니 이것은 빠르게 해결해 주시고”, 이런식의 기도 제목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마셨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실 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오직 단 한가지 제목으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여러분의 모든 기도 제목과 마음의 소원이 응답되고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일평생 소원인 맹인의 요구는 어떻게 되엇을까요? 42~43절 말씀입니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아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한 마디 말씀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여리고 맹인 사건은 믿음 사건입니다. 믿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더니, 찾아 오시는 은혜, 만나 주시는 은혜, 소원을 물어 보시는 은혜, 그리고 그 소원을 즉시 들어 주시는 은혜로 역사하였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참으로 능치 못할이 없음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세상을 처음 본 맹인의 기쁨은 온 세상을, 온 우주를 다 가진 기쁨이었을 겁니다. 맹인은 이제 눈을 뜬 채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앞을 보지 못할 때는 그저 구걸하며 그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았지만, 눈이 떠져서 앞을 보게 되니 그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삶이 이토록 극명하게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눈에 대해서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눅 11:34~36) 아멘.
맹인이 눈이 떠져서 보게 된 것은 단순히 사물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마음에 등불이 되어 주셔서 영원토록 어두운 곳이 없는 밝은 광명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감히 그를 침범하지 못하고 생명의 빛으로 인도함 받게 되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 했더니 구원에 이르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요, 기도의 권세요, 불쌍히 여겨 주시는 가장 극적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맹인의 이 기적 사건을 목격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고 부럽고 간절하게 소망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은 올 한 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선은 내 자신이 영적인 맹인의 모습이며, 사탄의 공격에 빠져 깜깜한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식하여야 합니다. 어둠을 벗어나야하는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해결 과제인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선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불쌍히(긍휼히) 여겨 주소서”라고 외치는 것 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고, 단 하나의 이 외침으로 간절하게 부르짖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음 중심의 믿음을 보시고, 기도의 자세가 얼마나 진실한지를 살펴 보실 겁니다.
기도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시간에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 주님의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그 음성이 들리면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나를 빛으로 인도하소서”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나는 영적 맹인입니다. 영적인 맹인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도록 공격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되면 기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기에 엎드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러한 문답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있도록 성령으로 부르짖으며 간절하게 기도하셔서 영적인 눈이 크게 떠지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2024년 한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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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둠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직 이 기도만이 우리의 입술에서 쉬지 않고 고백되어지는 2024년 한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응답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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