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살아봐요 = 신명기12;1-28(240114) 한상원 목사
PW : 믿음 BIW : 영의 양식을 먹으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하나님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신령한 양식을 먹으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은 김씨(?)
어느 중학교에서 겨울 캠프 마지막 날에는 캄캄한 밤에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을 불러놓고 캠프파이어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해에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세워 놓고 학교 옥상에서부터 운동장까지 모닥불 선을 연결해 놓고는 불이 당겨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있는 가운데 교장 선생님은 경건하게 캠프파이어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교장선생님 : (두 손을 모으고)
“자 여러분... 이제부터 하늘에서 하나님이 불을 내려 우리 학생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에게 축복의 불을 내려 주소서.”
하지만 불은커녕 하늘에선 아무 기척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장엄하게 하늘을 보며 더욱 큰 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불을 내려 주소서.”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그대로 손을 하늘을 향해 든 채로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김씨! 빨리 불 안 내리고 뭐해!”
그때에서야 불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성씨가 김씨처럼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종종 캠프파이어를 한다고 하면서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성령의 불은 이렇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게 그러나 느껴지게 임재합니다.
오늘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찾아오시고 임재하셔서 우리들에게 은혜와 능력과 축복으로 역사해 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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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5욕(慾)과 7정(情)이 있다.
곧 다섯 가지 욕구와 그에 따르는 일곱 가지 감정이라는 것이다.
다섯 가지 욕구는 수면욕(睡眠慾), 식욕(食慾), 성욕(性慾),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慾)을 다섯 가지 욕구라고 부른다.
일곱 가지 감정은 희(喜:기쁨), 노(怒:노여움, 화냄), 비(悲:슬픔), 우(優:걱정), 사(思;사고), 공(恐;공포, 두려움), 경(驚:놀라는 것)을 인간이 가진 일곱 가지 감정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다섯 가지 욕망과 일곱 가지 감정변화에 따라서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판단한다.
우리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실컷 먹고 자고 입으면서 살 수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다.
세상에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이들도 많지만, 먹을 것이 천지에 널려 있어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갖가지 질병 때문에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
세상에는 잠자고 싶어도 잠잘 수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집이 없어서 자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크고 넓은 자신의 집이 있어도 잠을 자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온갖 근심 걱정덩어리로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이들도 널려 있다.
죄를 범한 사람들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설친다.
세상에는 입고 싶어도 입지 못하는 이들이 널려 있다.
옷이 없어서 입지 못하는 이들도 널려 있다.
여름철에는 간단하게 입으면 되지만 몹시 추운 겨울에는 옷이 없어서 제대로 입지 못하면 얼어 죽을 수 있다.
세상에는 자신의 옷장에 온갖 화려하고 예쁘고 멋진 다양한 옷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도 옷을 입을 수 없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풍성하지도 않지만,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고, 옷을 입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된 삶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보다 조금 더 부요하다거나 넉넉하다거나 잘 산다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우리들은 형편없이 못 사는 사람, 가난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딘가에는 우리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서 자신들은 한없이 가난하고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라고 자학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누군가를 비교 대상으로 삼아서 우리 자신들을 한없이 부족하고 못나고 가난하고 형편없는 사람인 것처럼 자학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분명 어떤 사람들은 우리 신앙인들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불신앙의 자세를 버릴 수 있다.
모든 것들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고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삶을 살수 있다.
모든 것들의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려드리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기업을 분배받으면서 정착하게 되면 어디에서 제사를 올려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아울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육식하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말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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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나안 족속들의 신앙을 파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2-3절에서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건너 들어가서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신들의 형상들을 파멸하고, 파괴하고 깨뜨리고 불사르고 찍어내어서 멸하라고 말씀하신다.
가나안 땅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신이든지 모든 신들의 형상, 그 신들에게 제사하는 제단, 작은 산이든 큰 산이든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 파멸시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알신이든, 아세라신이든, 갖가지 모습의 일월성신의 신이든, 나무로 만들었든, 돌로 만들었든, 주석이나 동으로 만들었든, 금덩이로 만들었든 가나안의 신들이란 신들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끔하게 청산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의 모든 것들, 신앙, 문화, 전통, 습관, 사고체계 등등 모든 범주를 파멸시키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파멸시키라고 말씀하실까?
과연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 생활하는 과정에서 파멸시켜야 할 대상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직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문화유산이라는 미명으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으로, 전통과 습관이라는 미명으로, 한민족의 문화라는 미명으로 여전히 신앙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택일하기 위해서 철학원을 찾아간다든지, 손 없는 날에 이사해야 한다든지, 000이라는 동물의 띠를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아무런 신앙 양심에 거리낌 없이 아주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올해 2024년은 푸른 용의 해, 청룡의 해라고 한다.
용은 사탄의 상징이지 않나. 그러니 사탄을 상징하는 용의 해라고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들이야 12지신을 쉽게 이야기하더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 삼위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신앙인이라면 12지신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민족의 문화 전통이니까? 한국교회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니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않나? 하면서 비호받고 있는 것들은 없을까?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최우선이요 표준이요 기준이요 원리라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 주인 노릇하는 것들이 한 둘이겠는가?
이제는 모든 것들의 표준이요 기준이요 원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잘라내야 할 것은 잘라내고,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의 신앙과 문화와 습관과 전통과 의식체계를 파멸시키라고 하시는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무속신앙, 샤머니즘, 토테미즘에 근거한 문화들을 하나씩 하나씩 신앙인들의 의식에서 빼내는 작업을 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②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처소에서 제사를 올려드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5-7절에서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광야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12지파가 진을 치고, 성막에서 제사를 올려드리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는 곳에 성막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가나안 땅은 광야처럼 오밀조밀하게 한 곳으로 모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요단강 협곡을 중심으로 넓은 광야, 평야, 산지와 강들과 사막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의 넓은 땅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만큼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는 그곳으로 제물을 가지고 올라와서 제사를 올려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는 곳은 어디일까?
본래는 예루살렘성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는 처소여야 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성은 쉽게 정복하지 못하고, 다윗 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하여 다윗성, 시온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예루살렘성이 정복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여호수아가 그 당시 실세였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속한 에브라임 지파의 실로에 성막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던 초기시대에는 실로 성막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올려드리게 된다.
가나안땅 정복 초기부터 다윗 왕이 예루살렘성을 정복하기 전까지 사사시대, 사무엘시대에는 실로 성막시대라고 부르게 된다.
성막에는 반드시 언약궤, 법궤가 지성소에 설치되어 있어야 하지만, 엘리 제사장 시대에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겨갔다가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실로 성막에는 언약궤가 없는 빈껍데기 성막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로에 있는 성막은 언약궤가 없는 빈털터리 성막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고 만다.
성막도 여러 곳들을 이동하다가 다윗 왕 때에 예루살렘성에 정착하게 되고,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언약궤가 성막 지성소에 안착하는 것은 다윗 왕 때에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곳에서만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성막도 아닌 여기저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린다는 명목으로 제물을 잡고 제사를 올려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제사가 아니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를 받으실 수 없는 제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례와 법도와 율례에 의해서 제사를 올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성막, 성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시면서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를 직접 흠양하신다는 의식으로 제사를 올려드렸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제사를 올려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처소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물을 올려드리면서 제사를 올려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8-14절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들이 세워지는 신약시대에는 어느 곳이든, 어디서든, 예수님을 구주라고, 구세주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구약시대에서 가지고 있던 성막의 개념, 성전의 개념은 곧 건물로서의 개념은 더 이상 없어지고 만다.
성막이나 성전이라는 건물적인 성전의 개념이 사라지고 없어졌기 때문에 흔히 교회당을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부르는 경향이 많지만, 성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예배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성전은 우리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성전이 된다.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가정, 교회, 생업 터전, 모임 장소, 사역장이 주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성전으로 고백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③ 생명을 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게 되면 무엇을 먹으면서 살아야 할까?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새벽이슬과 함께 만나를 내려 주신다.
간혹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할 때에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셨기 때문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었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 더 이상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는다.
더 이상 하늘에서 메추라기를 보내주시지도 않는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 가나안 땅을 경작하여 농사를 짓고, 가나안 땅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5-19절에서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같이 먹으려니와,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네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네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네 각 성에서 먹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육신을 위해서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육신을 위하여 양식을 먹을 때, 곡식의 양식을 먹어야 하지만. 육식을 먹고 싶을 때는 육식의 고기를 먹고 싶을 때도 있게 마련이다.
육식을 위해서 정결한 짐승으로 분류된 동물이나 어류나 메뚜기나 새를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정결한 사람이든, 부정한 사람이든 소, 양, 염소, 물고기, 비둘기, 닭, 오리와 같은 가축을 육식으로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정결한 짐승으로 분류한 짐승이면 사슴이나 노루를 먹는 것처럼 육식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다만 어떤 육식이든 피채 먹지는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각 지파에 배당된 레위인들을 잘 챙겨주라고 말씀하신다.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도 동일한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가나안 땅에서 모든 정결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피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계신다.
그러면 왜 피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피를 먹는다는 것은 생명 자체를 먹는 것으로 인정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생명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피와 함께 먹지 말라고 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생명이건 피는 피로써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생명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결한 짐승이나 물고기나 새들은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단 생명의 근원인 피와 함께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잡을 때 심장에 들어 있는 피가 온 몸으로 퍼지기 전에, 심장에 들어 있는 피를 다 쏟아내면서 뽑아낸다.
그런 다음에 그 고기를 삶거나, 구워서 먹는다.
날 것으로. 생것으로는 절대로 먹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어떤 짐승이건, 물고기건, 새건, 정결한 짐승이거나 부정한 짐승이거나 구별하지 않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정결한 짐승은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부정한 짐승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피채 먹지도 않는다. 날것으로도 먹지 않는다.
모세5경을 조금 변경시켜서 인용하고 있는 이슬람교에서는 할랄(Halal)음식이라는 명목으로 어떤 음식들은 금지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문자적인 율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모든 음식을 먹으면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부정한 모든 것들, 모든 죄악들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든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어떤 음식도 제약받지 않는다.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에 감사드린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모든 음식들, 곧 마약이나 독이 들어 있는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되지만, 먹어서 유익한 모든 음식들은 감사함으로 먹으면 된다.
현대사회는 반려동물이라는 미명으로 특정 동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반려동물이란 없다. 모든 동물은 다 똑같은 동물에 불과하다.
소, 돼지, 말, 사슴이나 노루나 개나 고양이나 토끼나 닭, 오리, 비둘기, 꿩이든 뭐든 하나님 앞에서는 다 똑같은 짐승이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짐승이든 육식을 위한 음식으로 먹을 수 있다.
사람의 주장이나 사상이나 견해는 시기와 때와 민족과 장소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어느 나라와 민족은 소를 신성시하지 않는가.
그들은 소를 신성시하기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소고기, 특히 한우고기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없어서 못 먹는 것이지 소를 신성시하거나 반려동물로 여겨서 못 먹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칙이나 원리는 인종, 민족, 지역, 문화, 전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육식이든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서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보신탕이든, 삼계탕이든, 염소탕이든, 뱀탕이든, 용봉탕이든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의 몸에 유익한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내가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먹는다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고 베풀어 주신 은혜라 믿고 감사드리며 먹으면 된다.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다.
L4 & B4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먹으며 살아야 할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음식은 먹을 수 있다.
신앙인들도 육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을 위해서 육신의 양식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육신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으로 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을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양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은사와 축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영의 양식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같은 병이지만 술을 담으면 술병이 되고, 참기름을 담으면 참기름병이 되고, 약을 담으면 약병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란 존재는 무엇이든 먹은 대로 살게 마련이다.
무엇을 먹었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산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원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① 세상의 음란과 죄악과 향락과 쾌락을 위한 세상의 것들, 사탄의 것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들의 몸에 세상의 술을, 음란과 죄악들, 세상의 것들, 사탄의 것들을 먹으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세상 사람이 된다. 사탄의 사람이 된다. 어둠의 영들에게 사로잡힌 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탄이 좋아하는 음악, 사탄이 좋아하는 사상, 사탄이 좋아하는 문학, 사탄이 좋아하는 것들을 먹는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처럼 보일 뿐 실제는 사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탄이 좋아하는 음악, 사상, 문학, 생각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음란, 폭력과 파괴, 죄악들로 가득 채워진다.
이단사상들 곧 천주교, 통일교, 신천지, 구원파, 제7일 안식교,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 장길자의 증인회, JMS의 정명석, 여호와증인과 같은 지식을 넣어도 사탄의 사람이 된다.
②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신명기 8;3에서 하나님은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할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먹으면서 사셨다.
신앙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사신 분들이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욥, 바울, 베드로, 야고보 등등 모든 신앙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산 사람들이다.
21세기까지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지구촌에 존재하는 모든 신앙의 영웅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양식을 먹으면서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나 죽으나 누우나 무엇을 하든 언제 어디서든 오직 하나님의 신령한 양식을 먹으면서 살아간 신앙의 위인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세상의 것들, 사탄의 것들을 먹고 살면서 신앙의 위인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먹고산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먹으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사람들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입고 산다.
③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은 쉼 없이 꾸준하게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사람의 육신은 일정하게 육의 양식을 먹어야 산다. 동식물들도 양식을 먹어야 한다.
식물들도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식물들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열매들도 자라지 못하고 불량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인위적으로 물을 주어야 한다.
그렇듯이 우리들이 일정하게 꾸준하게 쉼 없이 영의 양식,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신앙의 불량품이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주일성수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 구절을 외워야 한다.
성경을 쓸 수 있으면 더 좋다.
성경을 필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몇 갑 절로 주어진다.
저도 성경을 한 번 필사했던 적이 있다.
한 번 필사하는데 3년 반 정도 걸려서 성경 66권을 필사한 적이 있는데 너무너무 은혜가 넘치고 좋았던 기억이 있다.
성경을 필사하면 신앙의 유산, 가보로 남길 수 있다.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즐겨 읽는 사람, 듣는 사람,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로, 축복 위에 축복으로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신령한 영의 양식들을 먹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나기 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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