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탑을 건설하기 원하는 자들 (창세기 10장 8~12, 11장 1~9)
창세기 10장 8절에 “그리고 구스(Cush)가 니므롯을 낳았고, 그는 그 땅 안에 강력하게 되기에 시작하였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니므롯”(Nimrod)은 “반역”, “반란”을 뜻합니다. 그는 반역자와 반란자입니다. 그는 함의 손자며 구스의 아들이었습니다.
니므롯은 가차 없는 침략으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1) 니므롯은 가공할 침략으로 지배권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는 “폭군”이었고 “독재자”였습니다.2)
니므롯은 야훼의 앞에 강력한 사냥이 된 까닭에 그것이 말하여지기를, “야훼의 앞에 니므롯 같은 강력한 사냥이라.”라고 하였습니다(창 10:9).
창세기 10장 10~12절에 “그리고 그의 왕국의 처음은 신알의 땅 안에 바벨과 에레크와 아카드와 칼네며. 그 땅으로부터 그가 아시리아로 나가 니네베와 르호보트 성읍과 켈라와. 니네베와 칼라 사이에 레센을 지으니 그것은 그 큰 성읍이라(that is the great city).”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니네베(Nineveh)”라는 도시(니느웨)는 아시리아의 수도였는데, 기원전 7세기의 아슈르바니팔 왕 치하에서는 대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그의 왕국”이라고 하였으니 그는 성경에 처음 등장한 “왕(王)”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힘으로 정복 전쟁을 수행하여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약한 민족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사라지고 강력한 자만 살아남게 됩니다.
니므롯은 “아수르”(앗슈르)의 땅 아시리아로 나가 정복하였으며, 그는 거기에 “니네베”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창 10:11).
“니네베”는 현대 모술(Mosul) 맞은편 티그리스 동쪽에 있었습니다.3)
“니므롯”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중심지의 선조로 언급되었습니다.4) 세상 마지막에 바벨의 왕이었던 니므롯과 같은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니네베(Nineveh)”는 아시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니네베는 기원전 4,000년경에 세워졌습니다.5)
1.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교훈을 살펴보려 합니다.
1) 원래 모든 땅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이었습니다.6)
창세기 11장 1절에 “모든 땅이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이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현재 이 땅 위에 3,000∼3,500여 종류의 다른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만도 400여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언어와 말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이렇게 언어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language)와 하나의 말(speech)이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 의사소통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평야(平野)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 2절에 “그것이 동쪽으로부터 그들의 여행하는 때에 되고 그들이 평야를 발견하고 그들이 거기 거주하였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이 동쪽에서 그들의 출발하는 때에 되고 그들이 평지를 발견하고 그들이 거기에 거주하였습니다(창 11:2).
동쪽을 향하여 출발하였느냐 동쪽으로부터 출발하였느냐가 문제인데, 사용된 전치사는 “~으로부터”를 뜻하니, “동쪽으로부터”가 좋겠습니다.
3) 그들의 결심이 “자, ~하자”(Come, let us)로 나옵니다.
(1) 사람들은 벽돌을 만들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창세기 11장 3절에 “자, 우리가 벽돌들을 벽돌 만들고(Come, let us), 우리가 불태움에 불태우자(burn them thoroughly)”라고 말하였습니다.
(2) 사람들은 성읍과 탑을 건축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에 “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성읍과 탑을 건축하겠고 그 꼭대기가 그 하늘 안에 있고 우리가 우리를 위해 이름을 만들 것이니, 우리가 모든 땅의 표면 위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꼭대기가 있게 만들 “하늘”은 “매우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마천루”로서 하늘을 문지르는 “고층건물”(skyscraper)입니다(신 1:28). 그들은 그 꼭대기가 하늘 안에 있는 고층건물을 건축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도시와 탑은 지은 것은 “우리를 위해 이름을 만들자”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이름을 만들려고 도시와 탑은 짓고자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도시 문명은 사람의 이름을 만들기 위해서 건설되었습니다.
롯데월드타워(LOTTE WORLD TOWER)도, ‘우리 롯데 그룹이 최고야 우리 롯데의 제국을 만들고 싶어’, 그래서 건물을 그렇게 높게 세웁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자기의 제국을 건설하고 싶은 야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본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이름을 만들자’라고 기록되지 않았으며 니므롯이 ‘우리 하나님을 위해 도시와 탑을 짓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이름을 만들자’라고 한 것입니다.
‘탑을 지으면 멀리서 보이니, 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흩어지지 아니하고 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높은 성읍을 건축한 동기는 흩어지지 않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이 일은 ‘땅을 채우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흩어지고 싶지 아니하여서 성읍과 탑을 건축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뭉침의 이념’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얽어매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이것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이름 이데올로기’와 ‘뭉침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었습니다.7)
‘우리가 뭉치자 흩어지지 말자 하나가 되자’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고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앞에 내세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이념(ideology)의 실현에 방해되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는데 이 사람들은 이러한 적들을 색출해 내어 사냥하는 사람 사냥꾼들입니다. 그들은 이름을 만들려는 욕망을 이루려고 도시와 탑을 세우고자 합니다. 바벨 성읍과 탑을 건축하고자 한 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벽돌들과 역청으로 도시와 탑을 세울 것을 계획하였는데, 그들은 탑을 세우고 도시에서 정착 생활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도시 가운데 하늘에 닿을 정도의 탑을 세우고자 추진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은 우상숭배의 삶입니다.
니므롯이 다른 약한 자들에게 가서 칼로 정복하고 세계 제국을 세우고 자기를 위해 이름을 만들고 영웅이 되려고 이렇게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타락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희한하게 도시 가운데 그런 건물들을 짓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롯데월드타워도 그런 것입니다.
록펠러는 맨해튼에다가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를 지었는데 록펠러는 건물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자기를 위해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록펠러는 그 건물을 ‘하나님 센터’(God Center)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록펠러 센터’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고 내 이름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도시의 건물들만 그렇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강남 서초역에 3천억짜리 건물을 지은 후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기자도 그 건물이 바벨탑인 것을 아는데 교인들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3000억짜리 사랑의교회 ‘바벨탑’은 무너지는 걸까요?”라는 제목으로 황춘화 기자는 그 건물이 ‘바벨탑’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8)
교회가 예배당 크기 늘리기 위해 공용도로를 파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도로를 복구하는 비용만도 390억가량이라고 합니다.9)
목사가 교회당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큰 건물을 짓고 그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고 ‘사랑의교회 목사’라면 알아주잖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똘똘 뭉쳐 열심히 교회당을 건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게 바벨탑인 것을 아는데 교인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건물을 짓겠다고 그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법 위에 도덕법 있고 도덕법 위에 영적 제사법 있다”라고 오정현 목사가 당당히 발언한 동영상이 뒤늦게 공개되었다고 합니다.10)
목사가 말을 내뱉으면 모두 진리입니까? 도로를 불법으로 점령하고서 영적 제사법을 위해 사회법을 어겨도 괜찮다고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들들은 세상일에 지혜로워 이런 모순을 파악하고 욕합니다.
오정현 목사만 그러지 아니하고 오늘날의 목사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건축헌금 작정하세요. 당장 안 내도 좋으니 지금은 작정만 하세요’라며, 교인들에게 ‘저 1억 내겠습니다. 2억 내겠습니다.’라고 작정하게 합니다.
목사들이 그 돈으로 건물을 짓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무너진 후,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날 건물 성전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성전을 지읍시다!’라고 하고, ‘장로님은 2억은 내야죠’라고 말해서 작정 헌금을 시키고 건물을 짓고서 그게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상에게 돈 바친 것으로 생각 못 하고 헌금했다고 생각하며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은 다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바벨탑 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와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바벨탑 정신에 빠져 있고 그것을 믿음으로 여깁니다.
목사들이 교회당을 세우는 것이 자신의 명성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나 자기를 우러러볼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의도입니다.
4) 하나님께서 건축된 도시와 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창세기 11장 5절에 “인류의 자손들이 건축하는 도시와 탑을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came down).”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시와 탑의 공사 현장을 보시기 위해 거기 내려오셨는데, 그는 아담의 자손들이 건축한 도시와 탑을 보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탑을 건설하여도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건설되는 탑을 보시기 위해 내려오셔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늘에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구름에 닿는 건물을 지을지라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건물을 지어도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도시 문명에 의해 하나님께 도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모든 노력으로써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3천억짜리 건물을 짓고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여도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사람이 만든 건물들은 불타서 사라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읍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실 것이고, 새 예루살렘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도시입니다. 구원영생을 얻는 자들은 새 예루살렘 도시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 반면에 이 세상의 도시 문명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질 운명입니다. 니므롯의 선동으로 시작된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일이 성공하였습니까?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람들의 바벨탑 건축은 실패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반역에 도전하지만,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의 결심이 “자, ~하자”(Come, let us)로 나옵니다.
창세기 11장 6~7절에 “하나의 백성이고 그들 모두에 하나의 언어고, 이것이 그들이 만들기에 시작한 것이고(this is what they begin to do) 지금 그들이 행하기에 계획할 모두가 그들로부터 보류되지 않을 것이라. 자, 우리가 내려가자 우리가 거기 그들의 언어를 어지럽힐 것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언어를 들을 수 없게 섞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어를 보면 영어는 동사가 먼저 나오고 한국어는 목적어가 먼저 나오고 히브리어는 더욱 순서가 복잡해 주어가 동사보다 뒤에 나오고 있습니다. 순서를 섞으셔서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2') 그들은 평야에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 8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땅의 표면에 흩어지게 하셨고 그들이 그 도시(city)를 건축하기에 그쳤다(stop)”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표면 위에 흩어지지 아니하기 위해 탑을 짓기로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땅의 표면 위에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창 11:4~8). 인류의 교만과 인본주의로 그 언어가 섞여 의사소통의 단절이 왔습니다.
인류는 같은 언어를 가진 자들끼리 뭉쳐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건축에 차질이 왔고 건축하던 일을 그쳤습니다.
사람들은 흩어지지 아니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자 계획한 사람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단절을 가져오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단절을 가져옵니다.
1')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말’이 생겨났습니다.
창세기 11장 9절에 “그러므로 그가 그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으니, 왜냐하면 거기서 야훼께서 그 모든 땅의 언어를 어지럽히셨기 때문이고, 야훼께서는 그들을 그 모든 땅의 표면 위에 흩어지도록 만드신지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벨(Babel)”(lb,B;)은 “섞는다”란 뜻의 “발랄”(ll'B')과 관계된 말입니다. 어쨌든 인류는 탑을 짓다가 언어가 섞이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로부터 사람들을 모든 지면(地面)에 흩으셨습니다. 사람이 그의 언어에 그들의 일족들에 그들의 민족들 안에 분리되었으며, 똑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창 10:5).
“바벨”이라는 지명에 인류가 실패한 사건을 알게 하는 뜻이 있습니다. 인류는 이 지명을 들으며 역사를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벨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제국으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벨의 건설현장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으셨습니다. 그 건설현장은 압제와 착취로 인하여 피로 얼룩진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결심을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동료의 언어를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언어를 섞자는 결심입니다. 압제의 도구로 오용되는 커뮤니케이션을 파괴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의 이념(ideology)은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세계화입니다. 이 이데올로기는 역사 속에 제국주의 이념을 통하여 이어져 내려왔으며, 마지막 때에 이 이데올로기는 또 한 번 그 고개를 높이 치켜들 것입니다.
2. 바벨탑 사건은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반복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 우리 모여 좋은 일 합시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자 우리 모여 나쁜 일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가면 나쁜 아이가 혼자면 나쁜 일을 망설이지만, 나쁜 아이들 5명, 6명이 모이면 ‘자 이것 하자’라면서 나쁜 짓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로 뭉쳐서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말을 섞으셨습니다.
니므롯은 세계정복의 야망을 품었으나, 언어의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자르와 알렉산더대왕도 세계통일은 할 수 없었으며 로마의 황제들과 몽골의 칭기즈칸도 세계통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정복 전쟁을 하고 영웅이 되어서 세계를 통일한다고 했으나, 서쪽이든 동쪽이든 반쪽짜리 통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정복을 하고 싶어도 말이 안 통하니까 언어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세계에 하나의 언어만 있으면 세계는 벌써 하나로 통일되었을 것입니다. 세계가 하나가 되면 하나의 독재자가 출현하여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가 바로 마지막 “적그리스도”며 영어로 “안티크리스트”라고 합니다. 마지막 적그리스도는 과거의 적그리스도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합니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통일을 이룰 것입니다.
갤럭시 S24는 언어의 장벽이 조만간 사라지게 됨을 예시하여 줍니다. 13개 언어를 실시간으로 통·번역함으로써 언어의 장벽을 허문 것입니다. 반역자 니므롯과 같은 적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반역으로 이끌 것입니다.
구원영생교회 성도 여러분!
바벨탑 정신은 세상 정신이며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사는 정신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야망을 이룰까? 나를 위해 이름을 만들까?’를 생각하며, ‘내 제국을 만들고 내 왕국을 만들고 싶다’라면서 삶을 사는 정신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 체계가 곧 바벨론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벨론 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바벨탑 정신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내 이름을 드러내려고 ’자 우리가 건물을 짓자‘라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살기를 원한다고 다짐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가 다 됩시다!
1) Bruce K. Waltke, 『창세기 주석』, 김경열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292.
2) Waltke, 『창세기 주석』, 293.
3) Victor P. Hamilton, 『NICOT 창세기 Ⅰ』, NICOT 성경주석, 임요한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382.
4) Kenneth Mathews, 『NAC 창세기 1』, NAC 성경주석, 권대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542.
5) Gordon J. Wenham, 『창세기 1-15』, WBC 성경주석 1, 박영호 옮김 (서울: 솔로몬, 2006), 414.
6) David A.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류근상 옮김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3), 69.
7) 이종록, “바벨과 라파누이 : 다시 돌아옴을 꿈꾸는 흩어짐”, 『성경연구』 제6권 제6호 (2000): 25.
8)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27496.html
9)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27496.html
10)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748439.html
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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