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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윤복희 (7) 3개월 검정고시 준비로 꿈에 그리던 여고생이…

열려라 에바다 2012. 2. 15. 09:39

 

[역경의 열매] 윤복희 (7) 3개월 검정고시 준비로 꿈에 그리던 여고생이…


나는 무대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인생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돌아와 또 다시 길거리를 헤매던 차에 ‘찔레꽃’ ‘봄봄봄’ 등으로 유명한 백란아씨의 공연 무대에 서게 된 겁니다. 나는 주로 전쟁고아 역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가 불쌍한 분장을 하고 ‘슈사인 보이’를 부르면 극장 안은 금세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영란 엄마를 만나게 됐습니다. 영란 엄마도 아버지와 같은 한국 연예계 1세대입니다. 영란 엄마는 나와 영란이를 묶어 ‘투 스쿼럴스’라는 듀엣을 만들어 춤과 노래를 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둘이 무대에 오르면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그러자 유엔센터, 미8군 등에서도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미군 트럭을 타고 전국 미군기지 순회공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무대 바깥의 내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아무리 힘들게 춤을 추고 노래해봤자 내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영란이네 집 마룻바닥에서 자고 빨래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 내게 구세주처럼 찾아온 사람이 김시스터즈 언니의 남매들입니다. 특히 김시스터즈의 동생인 영일 오빠는 내 상황을 알고는 “너 거기 있으면 큰일 난다”며 영란이네 집에서 나를 꺼집어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색소폰 드럼 트럼펫 등 악기 연주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자연히 투 스쿼럴스는 해체됐죠. 혼자 남은 나는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공연 무대를 뛰었습니다.

그분들은 어린 나를 무척 사랑해주시며 뒷바라지까지 해주었습니다. 저금통장을 만들어 내가 번 돈을 모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시스터즈 언니들은 좋은 옷을 사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훗날 내가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코리언 키튼즈’로 활동할 때도 언니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고비 고비에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내가 고난에 적응하는 능력과 재주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섭리가 내 인생에 개입해 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간단없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누군가가 나타나 보살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바로 그분의 사랑과 긍휼이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셨고, 나는 그분의 눈길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가 되면서 내 나이 10대 중반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나는 삼각지 로터리에 있는 에이원쇼 소속으로 미8군을 중심으로 바쁘게 공연을 뛰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것도 탔습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마음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돼 있던 욕구가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죠. 가끔 사람들로부터 ‘배우지도 못한 주제에’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속 상처로 남았습니다.

몇 날 밤을 고민하다 당시 경복고에 다니는 사촌오빠를 찾아갔습니다. 3개월간 오빠로부터 검정고시를 위한 특별과외를 받았습니다. 죽으라고 공부했습니다. 한데 이게 웬일입니까. 막상 시험 응시 서류를 챙기는데, 나는 출생신고조차 돼 있지 않았습니다. 엄마도 미혼으로 돼 있었습니다. 나는 미혼모의 딸이 되어 엄마의 성씨를 따라 성복희라는 이름으로 호적을 만들어 한양여고에 입학했습니다.

학교를 다닌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학교생활에만 전념할 수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부지런히 공연도 다녀야 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들도 많이 도와줬습니다. 졸업 무렵엔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서라벌예대 무용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주로 연극과 수업을 받다 자퇴했습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