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삼위일체주일설교-나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롬8:12-17)

열려라 에바다 2024. 5. 29. 08:23

삼위일체주일설교-나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롬8:12-17)

권호만barnabak추천 1조회 25324.05.24 20:59댓글 2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8:12-17


오늘은 성령강림주일 다음에 지키는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불러야 할 내용들은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해해서 믿어야 될 말씀이 아니고 믿고 받아들여야 할 말씀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은 삼위 즉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세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세 하나님은 존귀와 영광과 능력 면에서 하나, 일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세분이면 세분이고, 한 분이면 한 분이지 어떻게 세 분이 하나가 되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를 하던 안 하던 하나님은 삼위일체 즉 세분 하나님이 계신데 그 세분은 일체가 되십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만 정말 고맙고 감사하고 감격해야 할 일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각자의 역할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저와 여러분들이 뭐라고, 뭐가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이 구원의 은혜는 너무나 감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여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다가 외지로 떠나셨던 권사님과 안수집사님을 최근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전에 살고 계신다고 하면서 한 번 만나러 오겠다고 합니다.
만나서 식사나 한 번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자기가 음식을 해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염소 탕을 해 오셨는데 정말 음식솜씨도 좋은 분이기도 했지만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지금까지 먹어 본 염소 탕 중에 최고였습니다.
음식 대접을 받고 제가 무엇이라고 이런 대접을 하시나? 제가 정말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무엇이라고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우리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영광과 존귀를 홀로 받으셔야 할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체가 되셨고 하나가 되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가 있으며 이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찬송가 304장을 작사 작곡한 레흐만은 3절에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저 넓고 넓은 하늘을) 바다를 먹물삼아도(저 깊고 깊은 바다를)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크시고 크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셨던 하나님의 그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다시 한 번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주일에 오늘 말씀이 주어진 것은 삼위일체 중에 한 분이신 성령님의 역사와 은혜를 너무나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는데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오늘 말씀은 성령님을 모시게 되면 우리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서로 싸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2, 13절을 보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신대로 즉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아왔던 자들이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는 나라고 하는 자아와 더불어 성령님이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마음에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육신의 자아는 예전과 똑같이 네 마음대로 네 뜻대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아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고 말씀합니다.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도 다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때로는 육신의 생각대로 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일마다 고민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별로 고민을 안 하고 성령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고 성숙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14)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여전히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한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때로는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취소되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인디언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둘은 자기가 이기기 위해 서로 싸우고 투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손자가 할아버지 그러면 두 마리의 늑대 중에 누가 이기나요?’ 질문을 합니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네가 밥을 주는 늑대가 이기지
우리가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 둘 중에 어디에 순종하느냐? 어디에 더 많은 밥을 주느냐? 거기에 따라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육신의 사람으로 남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령님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서 육신의 행실을 죽이시고 영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도와주시는 보혜사의 일을 행하심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받는 축복은 정말 너무 많고 너무 대단합니다만 그 중에 가장 귀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것보다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축복을 잘 설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인간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인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친근한 말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가장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자기 아빠는 시장님과 국회의원과 교수님과 친하다고 하면서 아버지 자랑을 합니다.
그 말을 듣던 한 아이가 생뚱맞게 우리 아빠는 하나님과 무척 친해라고 말을 합니다.
그 말을 옆방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한 사이는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면서 언제나 하나님 곁으로 나아가는 자녀입니다.
그러면 아바 아버지는 우리를 안아주시고 돌보시고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아바 아버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는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도우시고 힘주시는 아버지/
주는 내 맘을 고치시고 볼 수 없는 상처 만지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 내 영혼 새롭게 세우시네/
여러분, 이 노래의 가사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가 되시어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아니 이 노래가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우시고 아끼시는 아버지십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축복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사실을 확신하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16절 말씀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했습니다.
신앙인의 인생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인 인식이나 인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을 가질 때 당당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세는 80세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자기 마음속으로 믿고 있었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자의식은 성령의 감동으로 8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서도 바로 왕 앞에서 호령하는 일을 전혀 주눅 들지 않고서 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강한 자의식이 없이는 절대 해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지팡이 하나의 권세에,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에 의해 애굽 전체가 10재앙으로 초토화되었다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자녀의 권세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생각하시고 이 권세를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 권세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승리하는 삶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때로 낙심이 되고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다, 하는 인식으로 담대하게 나아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15절에서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양자로 입적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아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친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양자로 입적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카이사르 즉 시저는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지만 카이사르는 원로원 파에 의해서 불의의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카이사르가 죽고 그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매우 낯 설은 인물이 그의 양아들로 지목됩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유언장은 1 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 받는다
처음 옥타비아누스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정통 귀족출신도 아니었고 별 직책도 없는 18세의 풋내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그 성을 물려받았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라는 이름의 후광을 배경으로 당시 권력자인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로마 최초의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도 사실 별것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양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양자된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에게 상속자가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을 용기있게, 능력있게, 자신있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양자가 된 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게 됩니다.
아버지를 위한 고난 뒤에는 아버지의 영광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202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