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값진 흔적
성도의 값진 흔적 마11:25-30, 갈6:11-17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름답기를 바라고 멋있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 공통된 심리일 것입니다. 스스로 미워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자기 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흔적들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를 과시하려하거나 나름대로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신을 하거나, 장신구로 자기 몸을 치장합니다. 또한 젊은 남성들은 근육질 체형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고,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고, S라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 휘트니스를 찾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겠지만, 성도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육체적인 외모의 모습 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도 육체의 흔적인 할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할례란 요즘 말로 포경수술인데 이 할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표식이었기 때문에 할례는 그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례를 받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흔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진정 자랑스러운 흔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두 본문에는 성도가 갖추어야할 귀한 흔적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값진 흔적”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의 값진 흔적은,
1.예수님을 본받은 온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 본문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을 향해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셨지만, 택한 백성들에게는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무지하여 주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있다 해도 오래 참으시며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시며 깨닫게 하십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나 변화되기 전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혈기가 등등하여 믿는 자들을 박해 할 때도 오래 참으시다가 다메섹에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 하시고 사울이 이방인을 위해 주께서 택한 그릇‘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만나서 말씀하실 때에도 온유하신 마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하시면서 여인은 자기와 말씀 하시는 분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인 것을 알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가서 자기가 만난 메시야를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예수님의 온유하신 사랑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고자 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라는 것은 짐승들에게 밭을 갈거나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짐승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풍습에는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함께 메었습니다.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멍에를 메어주마‘ 하십니다. 전에는 나 혼자 멍에를 메었지만 지금은 주님과 같이 멥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못된 성품들을 하나씩 고쳐나갑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멘 주님은 ‘화내지 말라, 기다려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하시며, ‘염려하지 말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 네 앞에 있는 장애물 앞에 낙심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나와 함께 가자.’고 격려하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주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참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굴복하고 순종할 때만 비로소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에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순종할 때만 우리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어버리거나 주인 되신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 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온유한 사랑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보통 95퍼센트의 좋은 점과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100퍼센트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95퍼센트의 좋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95퍼센트를 보고 사는 사람은 힘 있게, 자신감 있게 삽니다. 다른 사람의 95퍼센트를 보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만 5퍼센트에 주목하면 관계가 틀어집니다. 그 5퍼센트를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5퍼센트는 그가 평생 지니는 것이고 우리가 받아줘야 할 부분이지, 바로잡으려고 애쓸 부분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 수도 없습니다. 상대방의 결점 5퍼센트쯤은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채워주면서 살아야 온유한 사랑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 주님의 온유한 사랑의 흔적을 가지는 성도가 됩시다.
2.예수님을 본받아 겸손으로 섬기는 흔적입니다.
주님은 내게 와서 ‘나의 겸손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빌2:5-7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면 몇 가지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겸손히 인정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의뢰하는 자가 됩니다. 옛날에 어떤 왕자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옥에 간 왕자는 죄수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이렇게 옥에 와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모든 죄수들은 한 결 같이 왕자 앞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인데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죄수 한 사람은 왕자 앞에 공손히 엎드려서 하는 말이 “저는 백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는데, 이날 까지 내 생명이 살아서 있다는 것은 임금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왕자는 이 죄인에게 말하기를 옳은 사람만 사는 옥중에서 죄인 혼자 있으려하니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냐고 하면서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 자유롭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주셨지만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주님께 나오지도 아니합니다.
*남의 장점을 보고 격려할 줄 압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은 자기를 자랑하며 남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특히 세리와 창기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히 회개하는 세리와 창기들의 죄를 사하시고 음식을 같이 잡수시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죄로 괴로워하는 자들의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모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 모임에서는 남학생들로 구성되어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소설이며 시의 결점들을 가차 없이 서로 비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한편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는 서로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했습니다. 10년 후 그 여학생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유망하던 남학생들 중에서는 단 한 명의 뛰어난 작가도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랑으로 남을 섬기며 살면서 기쁨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도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 ‘하늘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명예와 권세를 얻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 받는 것을 좋아 하지만, 주님을 본받아 배운 겸손한 자들은 기쁨으로 남을 섬기며 사는 자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 보다 큰 자가 되려고 했으나 후에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고 주님처럼 겸손히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살았지만 주님 만난 후 은혜를 받고 주님만을 높이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고, 주와 복음을 위해 겸손히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겸손히 섬기는 자의 흔적을 지니고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십자가 고난의 흔적입니다.
서신서 본문 갈6:17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στιγμα)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에게 낙인을 찍었는데 그 낙인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이 흔적은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흔적입니다. 그런데 이 ‘스티그마’란 단어는 ‘스티조’란 단어에서 파생했는데 그 뜻은 “찌르다”는 뜻입니다. 즉 찔림을 받아서 생긴 흉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흔적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주님의 흔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흔적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았던 사도 바울이 보여준 십자가 고난의 흔적 중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기도 무릎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눅22:39-41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감람산에 가셨는데, 그 중요한 목적 중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 이었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도 주셨지만, 친히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밤에, 때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했고,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할 때도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지시를 따르기도 했습니다. 행20:36에 바울도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지도자들은 낙타 무릎의 소유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기도 무릎으로 살았고, 주의 동생 야고보의 무릎은 늘 기도를 쉬지 않아 낙타무릎 같았다고 하며, 의인 야고보로 불렸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 무릎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지녀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사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에는 머리에 가시관에 찔린 흔적, 몸에는 체직에 맞은 흔적, 양 손과 발에는 대못에 찔린 흔적, 옆구리에는 창으로 찔린 흔적 등 많은 고난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 바울에게도 이 고난의 흔적을 가졌는데, 그는 그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서른아홉 번씩 맞는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으니, 그의 온 몸은 흉터로 뒤덮여 있었을 것입니다. 손목과 발목에는 쇠로 만든 차꼬에 채인 흉터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린 적도 있었으니 돌에 맞은 흔적도 있었을 것입니다.(행14:19) 그 흔적들은 모두 주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 생긴 흔적들입니다. 이게 다 바울 사도가 가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 흔적들이었습니다. 그의 흔적들은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지니고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값진 흔적”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의 값진 흔적은,
◆.예수님을 본받은 온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으로 섬기는 흔적입니다.
◆.십자가 고난의 흔적입니다. 아멘.
<2024. 07. 19. 호현낙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름답기를 바라고 멋있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 공통된 심리일 것입니다. 스스로 미워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자기 몸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흔적들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를 과시하려하거나 나름대로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신을 하거나, 장신구로 자기 몸을 치장합니다. 또한 젊은 남성들은 근육질 체형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고,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고, S라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 휘트니스를 찾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겠지만, 성도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육체적인 외모의 모습 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도 육체의 흔적인 할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할례란 요즘 말로 포경수술인데 이 할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표식이었기 때문에 할례는 그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례를 받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흔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진정 자랑스러운 흔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두 본문에는 성도가 갖추어야할 귀한 흔적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값진 흔적”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의 값진 흔적은,
1.예수님을 본받은 온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 본문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을 향해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셨지만, 택한 백성들에게는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무지하여 주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있다 해도 오래 참으시며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시며 깨닫게 하십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나 변화되기 전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혈기가 등등하여 믿는 자들을 박해 할 때도 오래 참으시다가 다메섹에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 하시고 사울이 이방인을 위해 주께서 택한 그릇‘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수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만나서 말씀하실 때에도 온유하신 마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하시면서 여인은 자기와 말씀 하시는 분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인 것을 알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가서 자기가 만난 메시야를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예수님의 온유하신 사랑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고자 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라는 것은 짐승들에게 밭을 갈거나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짐승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풍습에는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함께 메었습니다.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멍에를 메어주마‘ 하십니다. 전에는 나 혼자 멍에를 메었지만 지금은 주님과 같이 멥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못된 성품들을 하나씩 고쳐나갑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멘 주님은 ‘화내지 말라, 기다려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하시며, ‘염려하지 말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 네 앞에 있는 장애물 앞에 낙심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나와 함께 가자.’고 격려하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주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참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굴복하고 순종할 때만 비로소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에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순종할 때만 우리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어버리거나 주인 되신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 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온유한 사랑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보통 95퍼센트의 좋은 점과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100퍼센트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95퍼센트의 좋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95퍼센트를 보고 사는 사람은 힘 있게, 자신감 있게 삽니다. 다른 사람의 95퍼센트를 보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만 5퍼센트에 주목하면 관계가 틀어집니다. 그 5퍼센트를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5퍼센트는 그가 평생 지니는 것이고 우리가 받아줘야 할 부분이지, 바로잡으려고 애쓸 부분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 수도 없습니다. 상대방의 결점 5퍼센트쯤은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채워주면서 살아야 온유한 사랑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 주님의 온유한 사랑의 흔적을 가지는 성도가 됩시다.
2.예수님을 본받아 겸손으로 섬기는 흔적입니다.
주님은 내게 와서 ‘나의 겸손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빌2:5-7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면 몇 가지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겸손히 인정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의뢰하는 자가 됩니다. 옛날에 어떤 왕자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옥에 간 왕자는 죄수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이렇게 옥에 와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모든 죄수들은 한 결 같이 왕자 앞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인데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죄수 한 사람은 왕자 앞에 공손히 엎드려서 하는 말이 “저는 백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는데, 이날 까지 내 생명이 살아서 있다는 것은 임금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왕자는 이 죄인에게 말하기를 옳은 사람만 사는 옥중에서 죄인 혼자 있으려하니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냐고 하면서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 자유롭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주셨지만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주님께 나오지도 아니합니다.
*남의 장점을 보고 격려할 줄 압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은 자기를 자랑하며 남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특히 세리와 창기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히 회개하는 세리와 창기들의 죄를 사하시고 음식을 같이 잡수시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죄로 괴로워하는 자들의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모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 모임에서는 남학생들로 구성되어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소설이며 시의 결점들을 가차 없이 서로 비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한편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는 서로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했습니다. 10년 후 그 여학생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유망하던 남학생들 중에서는 단 한 명의 뛰어난 작가도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랑으로 남을 섬기며 살면서 기쁨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도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 ‘하늘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명예와 권세를 얻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 받는 것을 좋아 하지만, 주님을 본받아 배운 겸손한 자들은 기쁨으로 남을 섬기며 사는 자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 보다 큰 자가 되려고 했으나 후에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고 주님처럼 겸손히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살았지만 주님 만난 후 은혜를 받고 주님만을 높이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고, 주와 복음을 위해 겸손히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겸손히 섬기는 자의 흔적을 지니고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십자가 고난의 흔적입니다.
서신서 본문 갈6:17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στιγμα)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에게 낙인을 찍었는데 그 낙인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이 흔적은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흔적입니다. 그런데 이 ‘스티그마’란 단어는 ‘스티조’란 단어에서 파생했는데 그 뜻은 “찌르다”는 뜻입니다. 즉 찔림을 받아서 생긴 흉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흔적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주님의 흔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흔적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았던 사도 바울이 보여준 십자가 고난의 흔적 중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기도 무릎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눅22:39-41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감람산에 가셨는데, 그 중요한 목적 중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 이었습니다. 주님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도 주셨지만, 친히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밤에, 때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했고,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할 때도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지시를 따르기도 했습니다. 행20:36에 바울도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지도자들은 낙타 무릎의 소유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기도 무릎으로 살았고, 주의 동생 야고보의 무릎은 늘 기도를 쉬지 않아 낙타무릎 같았다고 하며, 의인 야고보로 불렸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 무릎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지녀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사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에는 머리에 가시관에 찔린 흔적, 몸에는 체직에 맞은 흔적, 양 손과 발에는 대못에 찔린 흔적, 옆구리에는 창으로 찔린 흔적 등 많은 고난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 바울에게도 이 고난의 흔적을 가졌는데, 그는 그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서른아홉 번씩 맞는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으니, 그의 온 몸은 흉터로 뒤덮여 있었을 것입니다. 손목과 발목에는 쇠로 만든 차꼬에 채인 흉터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린 적도 있었으니 돌에 맞은 흔적도 있었을 것입니다.(행14:19) 그 흔적들은 모두 주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 생긴 흔적들입니다. 이게 다 바울 사도가 가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 흔적들이었습니다. 그의 흔적들은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지니고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값진 흔적”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의 값진 흔적은,
◆.예수님을 본받은 온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으로 섬기는 흔적입니다.
◆.십자가 고난의 흔적입니다. 아멘.
<2024. 07. 19. 호현낙선>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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