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요8:12-14. 24-28)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열려라 에바다 2025. 8. 21. 09:50
(요8:12-14. 24-28)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궁극이추천 1조회 5725.08.17 09:16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8장 12절-14절. 24절-28절.


12절-14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4절-28절: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지난 설교 보충.


12절-13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어두울 때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이 구별 분별이 된다. 사람이 빛을 가지면 캄캄한 밤에 어디를 갈지라도 모든 것이 구별 분별이 되고, 자기 앞에서 움직이는 게 짐승인지, 사람인지, 나무 그림자인지를 알 수 있다.


밤길을 걸을 때는 빛 가운데로 다녀야지 어두운 데로 다니면 피해가 많다. 빛을 좋아하고 빛 가운데로 다녀야지 어두운 데로 다니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하다. 이런 원리를 어그러뜨리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만드사’ 라고 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 중에 어느 게 좋은지 구별 분별을 해보라는 거다.


‘나는 생명의 빛이니.’ 생명의 빛은 영적 신앙세계의 생명에 관한 것을 구별 분별한다. 사람들이 신앙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명의 빛을 가졌다는 의미인데, 과연 영적 신앙세계의 생명에 관한 것을 구별 분별하고 있는 건지?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눈을 가졌기 때문에 진짜 빛인지 가짜 빛인지,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죽은 신앙인지 산 신앙인지, 육의 생각인지 영의 생각인지를 안다.


교회 인도자는 이런 게 보여져야 교인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가 있는 거지 안 보이면 자기가 소경인데, 빛이 없는데, 어두운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느냐?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신앙생명이 죽은 건지 산 건지 구별 분별할 줄 모른다면 생명의 빛을 모르든지, 안 가졌든지, 욕심을 안 냈든지 이유가 있는 거다.


사람 속에는 영이 들어있는데 안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빛이 없기 때문에 이 영이 죽어있다. 자신이 어둡기 때문에 자기의 영이 죽은 건지 산 건지, 생명의 빛이 없는 건지 있는 건지를 전혀 모른다. 영이 산 사람이, 생명의 빛을 가진 사람이 산 건지 죽은 건지,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구별 분별하는 거지 생명의 빛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산 건지 죽은 건지,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구별 분별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교회에 다니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말씀이고, 성령님은 구별 분별을 시키는 영이다.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 자기 속을 밝혀서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알아야 한다. 수십 년 예수를 믿어도 헛 믿은 것은 아닌지? 교회에 다니며 목숨을 바쳐 열심히 충성봉사를 했지만 거짓 종에게 이용을 당한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이렇게 믿어왔다면 자기의 일생을 다 도둑맞은 거다. 교회에 다니면서 깨달음이 없고 구별 분별이 없다면 다 도둑맞은 거다. 예수 믿으면서 생명의 빛을 받으면 교회에 다니면서 속지 않는다. 목사님은 설교에서 이치를 밝혀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성경이 깨달아지고, 자기의 성격 성질이 보여지고, 깨달은 말씀이 자기 인격화 되고, 깨달은 말씀을 생활에서 써먹는다면 이게 예수 믿으면서 만들어져 나온 표적이다. 예수 믿으면서 사람이 바로 되고 고쳐진 게 표적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에게서 이런 표적이 나타나야 한다. 머리로만 알고 있고, 말로만 할 뿐 자기가 깨닫고 만들어진 게 언행심사로 안 나타나면 소용이 없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옛사람에게 하는 말이냐, 새사람에게 하는 말이냐? 옛사람이나 새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의 이성에게 하는 말이다. 현재 영육 결합체로 된 너에게 하는 말이다. 듣고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너보고 하는 말이다.


성경만이 인간을 가르쳐 준다. 이방종교는 인간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 성경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정신과 소원과 목적이 구별 분별이 되게 한다. 성령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을 알게 하고, 인간 속에 들어있는 정신 소원 목적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 취미성 추구성 지향성을 구별 분별케 한다. 그리고 인간 자기를 보게 하고, 알게 한다. 수십 년 예수를 믿는데도 자기가 안 보인다면 헛 믿은 거다. 이러면 하나님의 인정이 없다. 하나님께서 안 알아주신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충성봉사로 치닫는 게 아니라 자기 속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져 나가는 거다. 이런 과정에서 충성봉사가 나오는 것은 옳은 거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 종들은 사람을 자꾸 헛 힘을 쓰게 한다. 이건 하나님 앞에 깨끗지 못하다. 앞으로 갈수록 이런 일이 더 많을 거다. 앞으로 갈수록 세상은 소돔 고모라가 될 거고, 교회는 음란과 음행의 도시가 될 거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네 실상은 죽었구나.’ 교회가 활동목적과 위주로 나가면 남이 볼 때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속을 들여다보고 죽었다고 하신다. 살아있는 생명적인 것에서 활동이 나와야 하는데 외부의 것에 물이 들어서 군중심으로 활발히 활동을 하는 것은 신앙이 죽은 거다. 천국복음 운동은 자기 속에서 참 생명이 움직여서 나오는 거다. 이게 신행(信行)이다.


집사 장로 목사라고 하면서 자기를 못 고치면 자기의 병이 되어버린다. 이러면 남에게 덕이 안 된다. 자기 집에서 부부끼리건 자녀끼리건 싸웠을 때 그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다른 교인들에게 인사도 안 하고, 얼굴을 흐린 날씨처럼 하는 성질은 버려라. 예수 믿으면서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면 옛사람 주격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세상은 다 지나가는 거다. 지나가는 세상에 자기의 옛사람의 성격 성질이 다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라. 죽고 없어질 것을 붙들지 말고 안 죽을 것을 붙들어라. 흘러가는 것을 붙잡고 안 놓치려고 한다고 해서 붙잡혀지느냐? 성경을 보고도 모르겠거든 세상만사를 보고 생각을 하면 웬만하면 깨달을 수 있다. ‘나를 따르면 생명의 빛을 받는다’ 라고 했으니 예수를 믿는 우리는 생명을 받아 가져서 죽은 생명과 산 생명, 죽은 생각과 산 생각, 죄 된 생각과 의의 생각이 구별 분별이 되어야 한다. 구별 분별이 되면 자기부터 바로 서게 된다.


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니 이게 어떤 상태일까? 영적 소경이다. 주님을 못 알아보는 소경이요, 사람을 못 알아보는 소경이다. 주님의 빛을 받은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구나’ 하는 게 나와야 하고, 어디에 뿌리를 박고 나오는 말인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왔고, 땅에서 하늘의 일을 하시고 하늘로 가셨다.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오신 분은 하늘의 일을 하는구나. 교회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 낫지만 그 사역의 질이 땅에서 하늘의 일을 하다가 변화 부활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이 이치를 목사님에게 붙이면 하나님께서 보낸 종은 어느 나라를 소개할까? 하늘나라를 소개한다. 마찬가지로 영이 중생이 되어서 산 영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되어있다. 원리가 그렇다. 이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된다.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많아지고, 세상과 천국이 구별 분별이 되고, 사람의 속이 구별 분별이 된다. 그러니 속지를 않는다.


옛날 부모님들을 보면 사람을 볼 줄 몰라서 속아서 시집 장가를 가는 게 많다. 속아서 부부가 되어서 살아생전 계속 지옥 같은 생활을 하다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 놓고 보면 통곡할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모르니 한이 맺히는 삶을 사는 거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떠냐? 교회에서 인생을 바로 알고 사람을 바로 깨닫는다면 안 믿을 때보다 더 행복하고 기쁜 게 나오는 건데,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이게 들어있는 건데 교회가 교인들을 이런 사람으로 만드는 교훈을 주지 못하면 안 믿는 사람과 같은 정신으로 살게 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애국자도 나오는 건데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을 바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떼먹고, 도망가고 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게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본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인간의 본분에서 이탈이 된 거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정확히 가게 하는 게 성경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예수를 믿는 것을 하나의 종교처럼 생각을 하고, 목사를 세상의 직업처럼 생각을 한다. 목회는 사람을 참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길로 인도하는 거다. 이 일을 직업이라고 하게 되면 천해진다. ‘목회를 성공했네 못했네, 교회당이 크네 적네, 교인이 많으네 적으네’ 하는 것은 목사를 직업으로 아는 거다.


24절: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라고 하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그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이다. 이런 상황, 이런 환경, 이런 상태, 이런 배움에서 태어나서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는다는 거다. 이게 죄다. 창조의 목적대로 들어가는 게 바른 믿음이고 바른 사람인데 여기에서 이탈이 되어서 사는 건 죄다. 지역이나 장소에서 이탈이 된 게 아니라 생각이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이탈이 되어서 사는구나. 이건 사망이다. 사망에 거하면 하나님 쪽으로 살아나는 머리는 없다. 모든 게 그렇다. 이것은 살아있어도 죽은 거고 이룰구원이 없다.


25절-26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언제 처음부터냐? 시간적 장소적 역사적으로는 창세 때부터다. 그러나 기록된 말들을 근본과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세상을 만들기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간 속에 들어있는 예수를 알지 않고 시간을 초월한 예수를 알아야 처음부터의 예수를 아는 거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서 말을 들어보니 ‘이 사람은 진실하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계속 대하다 보니까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게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 완전하신 주님을 알면 어떤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해도 ‘이 사람이 어디에 뿌리를 박고 말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처음부터 이 사람을 아는 거다.


사람을 아는 게 인격적 관계적으로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있고, 인격적 관계성이 아닌 비구원적인 면에서 처음부터 아는 것도 있다. 이걸 알면 속지 않게 된다. 한참 사귀다 보니 ‘이 사람은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은 이미 늦었다. 이미 나의 시간과 노력과 물질투자가 다 흘러가 버린 후다. 그러나 상대를 바른길로 인도하려고 속을 줄 알면서 상대를 대한다면 주님께서 그 공력을 알아주신다. 이건 죄가 아니다.


27절: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은 다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인간이 쓰는 말로 ‘아버지’라는 표현을 하실까?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도 거기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즉 목사가 말을 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말해야 된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들이 누구의 말을 하느냐?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만사형통이 된다’ 라고 하면 이게 누구의 말이냐? 마귀의 수단 방법에 놀아난 거짓 종들의 말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기는 이런 말이 믿음의 말인 줄 알고 얼마나 따라다녔느냐? 따라다닌 그 세월, 그 노력, 그 시간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다.


사람이 가장 원통한 것은 사람에게 속는 거다. 이것보다 더 원통한 것은 자기가 자기를 속인 거다. 이것은 더 고통스럽고 저주스런 거다. 이게 느껴지느냐?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게 없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건데, 교훈적으로는 부활을 말할 때는 믿는 우리로 하여금 이 부활 속에 들어있는 요소를 알고 이것을 자기 인격화 자체화 해야 한다는 거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죽었으니까 부활이 아니라 살아계실 동안의 모든 언행심사가 산 것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부활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주님이 33년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안 죽는 생명의 삶을, 즉 부활성의 삶을 사셨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도 이 삶을 살게 된다. 이게 주님을 높이는 거다. 주님을 바로 본 거다. 따라서 예수 믿는 나도 주님의 산 신앙사상을 가지면 마지막 때 부활을 하게 되는 거고, 안 죽는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게 주님을 높이는 거다.


12:에서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라고 했으니 주님께서는 죽지 않게 하고, 심판을 받지 않게 하고, 살리는 일을 하셨구나. 목회자들도 이 일을 해야 하고, 성도들도 이 일을 해야 한다. 이게 아니면 교회가 아니다. 주의 종은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자기에게 영원히 효력이 되는 것을 교훈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당신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을 하는 분이라는 것을 계시적 비유적으로 말해주는 거다. 즉 나의 영적인 면의 병을 고쳐주는 분이라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자기가 영적인 면에서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팔이 오그라져 있다는 것을 성경에 밝혀 놓았는데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현실에서 실상을 만들어 가는 거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주님께서 해 놓으셨으니까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주님의 실상을 닮아가야 한다. 이게 효력 있는 믿음이고, 참 신앙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