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9:14-15)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궁극이추천 1조회 5725.08.17 09:13댓글
69편 14절-15절: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14절: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깊은 수렁’이나 ‘깊은 물’을 교훈적으로 보면 잘못되고 그릇된 가르침을 말한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바리새파 종교 지도자들은 표면적 외부적으로 덩어리 큰 것 위주로, 세상위주로 나가는 외식신앙이었다. 이들은 당시로 보면 로마의 압제에 있던 자신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러니까 가견적, 불 탈 세상에 관한 것에 목적을 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가르치는 게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구나’ 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을 지옥에까지 빠뜨리는 깊은 수렁이요 깊은 물과 같은 교훈이요 신앙이라는 거다. 깊은 수렁과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진리이치, 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정신 사상이 깊은 수렁과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려면 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손으로 잡고 건져 올리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교훈으로라야 만이 사람을 어둠에서, 사망계에서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는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으로 건짐을 받아야 사람이 자유자가 되고, 차원이 월등하게 높아지고, 지혜로워지고, 이렇게 되면 사리판단 분석이 빠르고, 속지 않게 되고, 편하고, 기쁘고, 즐거운 건데 타락된 인간들은 자기가 이렇게 건짐을 받으면 꼭 굶어죽고, 못 살고, 더 못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고 믿어갈수록 짐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거다. 극단적으로 말을 하면 예수가 자기를 못 되게 하고, 못 살게 하고, 망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되어있다.
사람은 생명과를 먹으면 통치 활용 사용이 들어가는 거지만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것마저도 빼앗기고 쫓겨나서 눈물과 고통과 살인이 오더라.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는 사고방식의 입장에서는 이게 안 믿어지는 거다.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데도 안 믿어지는 거다. 참 이상하다. 이방 불신자들은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안에서 이방 불신적 정신 사상을 가진 거짓 종들 역시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이런 일들을 보면 먼저는 세상 구복주의의 가르침이 있다. 하나님에게 와서 ‘복 달라. 뭐 달라’ 하는 것. 식당에 가면 벽에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라는 성경구절을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식당주인 중에는 주일을 지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어느 분은 주일도 안 지키면서 그렇게 써 붙여놓았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도 마지막 날에는 다 불속으로 들어간다. 다 타버린다. 그런데 왜 타버릴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야단법석을 하느냐? 그것도 천국을 가겠다고 하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집을 사더라도 자기 월급을 가지고 그 집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집을 사야 할 텐데 왜 자기 월급이 다 들어가고, 남의 돈까지 끌어 오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서까지 큰 집을 사느냐? 왜 필요 외의 것까지 가지려고 하느냐? 나중에 집값이 올라가면 팔아서 이익을 남기려고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런 정신으로 사는 사람의 머리통은 항상 집값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된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다가는 늙어지면 치매로 들어간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흡족한즉 예수 믿는 쪽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는 쪽으로 신경을 쓰며 산다면 얼마나 좋으냐? 예수를 믿는다면 사람이 자라야지. 사람이 성장을 해야지. 이 면에 대한 소원성은 없고 자꾸 물질적인 면으로 생각을 해 봐라. 그렇게 하다가 부자가 됐는데 어떤 연유로 해서 쭈그러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100평짜리 집에 살던 사람이 50평짜리 집에 살게 되면 이런 집에서는 드러 누울 자리가 없느냐? 못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50평짜리 집의 베란다에서라도 집안 식구가 다 잘 수 있다. 그런데도 죽겠다고 한다.
우리는 좀 못 살더라도 원망 불평을 하거나 더 큰 것, 더 나은 것에 한을 삼지 말고 ‘내 실력이 이만밖에 안 되는구나’ 라고 하면서 자신의 배움과 지혜와 경제에 합당하게 살면서 실력을 키워서 실력대로 더 큰 데로 나가면 되는 건데, 실력은 쌓지 않으면서 더 나은 것에 대한 소원성을 가지고 야단법석을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찌 되겠느냐?
궁극교회 교인들은 물질에 대해 ‘복 복’ 하지 말아라. 성경은 물질은 임시성이고, 사용성, 활용성, 이용성이지 물질을 많이 가지는 것이 참 복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참 복은 사람이다. 시:에 ‘복 있는 사람은...’ 하는 게 있지 않느냐? 그런데 물질적으로는 부자인데 사람 자체가 복이 없는 사람이 많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혹 물질의 소유성이 불어날지라도 참 복인 사람이 깨달아져 가야 하고, 혹 가난해지더라도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도 있고 더 불행한 사람도 있는 것이니 주신 환경에 대해 감사하면서 실력을 쌓아가야지 감사치도 않고 원망 불평으로 들어간다면 오히려 더 쭈그러져 버린다. 감사하는 사람이 마음이 따뜻하고 넓고 풍부하다.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 두 번째는 신비주의, 은사주의, 체험적 가르침이 있다. 이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다. 귀신 들게 만든다.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성령님이 사람을 미치게 해서 눈을 뒤집게 하고, 벌벌 떨게 하고, 벌러덩 넘어지게 하느냐? 성령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서 정신을 초롱초롱하게 한다. 우리는 ‘휙 휙’ 해서 사람을 넘어뜨리거나 이상한 짓을 하는 곳에는 아예 가지 말아라.
세 번째는 사회주의, 세상 도덕주의의 가르침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위로부터 오는 진리이치의 깨달음에서 되는 도덕성이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일반적인 도덕성은 ‘이 행동이 좋고, 저 행동이 좋다’ 라고 해서 인간들이 만든 땅에서부터 나온 거다. 믿는 우리의 활동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일반 도덕성처럼 보일지라도 그 근원은 생명과를 먹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거다.
예수님의 도덕성과 바리새교인들의 도덕성이 같으냐? 다르다. 예수님의 도덕성과, 바리새인들의 도덕성과, 로마사람들의 도덕성이 같으냐? 로마사람들의 도덕성은 바리새교인들의 도덕성과 같지만 예수님의 도덕성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해방을 원했다. 로마는 유대인들을 해방을 안 시키고 붙잡아 놓으려고 했고, 유대인들은 탈출을 하려고 했지만 탈출하려는 마음이나, 움켜쥐려고 하는 마음이 똑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서 해방이다. 그러니 전혀 질이 다른 각도다. ‘죄에서 해방’이라는 말 속에는 영특한 도덕성이 들어있고 지혜지식성이 들어있다.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거다.
일반적인 도덕성은 선악과 따먹은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 기준적 도덕성인고로 이런 세상적인 도덕성으로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그 성품은 신령천국에 못 들어간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간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꿔진 것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생각을 해 봐라. 세상에서 성인군자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성품의 질과 같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으로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못 깨닫는 거고, 예수님을 못 믿는 거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땅에서 올라온 것이 질이 같을 수 있느냐?
불교계나 유교계 등의 이방 종교인들의 도덕성이 하늘나라로부터, 성경으로부터 된 것이라면 그들이 왜 성경을 안 보는 것이고, 왜 예수를 안 믿는 거냐? 아니기 때문에 안 보고 못 믿는 거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을 하셨고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데 이방종교의 교주는 죽어서 부활이 안 됐다. 그들의 시체는 죽어서 썩은 채로 땅에 그대로 있지 않느냐? 그럼에도 이런 자들의 가르침이 뭐가 좋다고 따라가는 거냐? 예수님도 죽은 채로 이 땅에 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승천 했다. 부활이란 전부는 안 죽고 살아났다는 말이다. 전부는 산 것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맨 죽을 것, 썩을 것만 가르치셨느냐? 하나님 당신은 영생하는 분이시니 믿는 우리가 영생하는 이 분 속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지식화 되고 닮아진 것은 우리 역시 영생이 되는 거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것을 다 보여주시지 않았느냐? 선지자로 통해서 보여주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게 영 안 믿어지는 게 병이다. 왜 안 믿어지느냐? 교회에서 하늘나라의 지식과 땅의 지식을 구별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방 종교인들이나 무당들이 하듯이 ‘세상 복 복’ 하는 거다. 그래서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그 수준이 이방 종교인들과 같아질 수밖에 없는 거다.
예수를 믿을지라도 자기 속에 세상성적, 또는 신비적인 정신이 들어있으면 중생한 그의 영은 천국에 들어갈지라도 그 사고방식의 성질은 세상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간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직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서 점잖을 피는 것뿐이지 환경만 조성이 되면 언제고 예수를 팔아먹고 돈을 따라가게 된다.
세상사람들이라고 해도 당장 오늘을 보고 사느냐, 나중을 보고 사느냐? 나중을 본다. 왜 큰 기업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냐? 임시 코앞을 보는 거냐, 나중을 보는 거냐? 나중을 보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이 그런 곳에 들어가기를 애쓰라는 말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라는 거다. 아무리 배가 고플지라도 눈앞에 농약이 있다고 해서 마실 수 있느냐?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는 것에는 당장의 눈앞만 보느냐?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세상 구복주의 중심이나, 신비주의 체험적 중심이나, 사회주의 일반 도덕성의 가르침들은 전부가 예수님의 기본구원의 정신 사상이 없는 가르침들이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1+1, 3+4 등의 기초적인 것은 대학공부를 할 때나 박사공부를 할 때도 필요하다. 아무리 박사라고 해도 이 기초적인 지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기초로 하고 그 위의 문제로 들어가는 거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아무리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주장을 할지라도 기본구원의 기초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 복음이 아니다.
왼쪽에 있는 자들이 예수이름을 가지고 전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난 너희들을 모른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거나 그들이 한 일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바탕이 없구나’ 이 말이다. 그러니까 진리이치를 바로 깨닫고 그런 일을 해야 사람이 인격적 성품적 차원적으로 올라가는 건데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이 없다는 말이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은 바탕이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사상의 바탕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바탕이 없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여기에서는 집이 세워지지를 않는다. 신앙 믿음이 올라가지를 않는다. 교회의 인도자들은 이걸 잘 알아야 한다. 바탕이 바로 놓여진 후에라야 그 위에서 올라가게 되는 거다. 이 바탕 위에서 사람이 만들어지게 되어있고, 사람이 지혜롭게 올라가게 되어있고, 사람이 반듯하게 놓여지게 되어있는 거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게 한 시간 예배나 때우고, 헌금이나 내고, ‘집사님, 장로님’ 하는 소리나 듣는 게 아니다. 사람은 깨달아야 하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 놓여져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표현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은혜주실 사람을 찾다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내가 찾던 사람이 여기 있었구나’ 라고 하면서 당신의 일을 맡겨서 은혜를 주시는 거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걸 내 입장에서는 ‘하나님, 그런 사람이 궁극교회에 많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라고 할 사람이 우리교회에 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요 복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나?’ 하는 점을 알아서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세상적 육적 인본주의적인 교회의 가르침들은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방해하는 사단 마귀의 속임수다.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은 성도들을 꾀이기 위한 사단 마귀의 속임수로 봐야 한다. 성도들을 음녀로 만들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기독교 종교적인 바벨론이다. 이런 게 깊은 수렁이요 깊은 물인데, 이들의 수법이 얼마나 교활한지 한 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다.
어떤 교회는 교인이 한 주 안 나가면 전화를 하고, 장로가 오고, 집사가 오고, 전도사가 오고 해서 귀찮아서 계속 나가게 된다고 한다. 우리교회에서는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는 거다. 그런데 다른 교회로 가더라도 우리교회보다 훨씬 나은 교회로 가야 한다. 목사인 나부터 이곳보다 훨씬 나은 곳이 있으면 그리로 갈 거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그대로 있어라. 나는 그리로 갈 거다. 이곳보다 못한 곳으로 간다면 너는 저주다. 다른 교회로 가려면 더 잘 될 수 있는 교회로 가야지 왜 더 못한 교회로 가느냐? 이건 저주다. 네가 그 결과를 보게 된다.
15절: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이게 무슨 말이냐? 다윗이 비가 많이 와서 홍수에 빠졌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신세계를 말하는 거다. 사울 왕이나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그 활동 자체를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정신 사상을 말하는 거다.
‘엄몰’이란 많은 물이 한꺼번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인데, 이 때 낮은 곳에 있으면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자기의 신앙차원이 낮으면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적이고 비진리적인 신앙사상이 홍수처럼 밀려올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빠져 들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빠져든 사람은 ‘이것이 믿음이다’ 라고 하면서 계속 그곳에 있게 된다. 자기의 신앙차원이 낮기 때문에 비진리적 육적인 운동이 자기를 밀고 나가는데도 ‘이게 신앙이로구나’ 하는 착각에 빠져 있게 된다.
자기가 비진리의 교훈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 내가 밀려가는구나. 이건 믿음이 아니구나’ 라고 알게 되는 건데 빠져놓으니 ‘이것이 믿음이다’ 라고 하며 비진리로 계속 나가면서 비진리 운동에 동참하고 협조하고 충성을 하게 되는 거다. 말세가 될수록 교인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이 교회 저 교회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비진리로 밀려나가게 되는데, 이것은 비진리의 홍수가 난 거다.
세상적, 인본주의적, 종교적 지식의 차원의 교인은 자기가 지금 큰 물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계속 그런 교훈을 받는다면 이걸 어떻게 알겠느냐? 자기가 어떤 연유로서 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건 그곳에서 나온 후에라야 ‘아, 그 때 내가 그렇게 하던 것이 홍수에 빠진 상태였로구나’ 하고 알게 된다. 자기에게 이런 게 보인다면 자기는 그만큼 올라온 거다.
마귀는 우리의 육신을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다. 비진리적 육적인 신앙사상을 붙잡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을 한다. 거짓 종들도 마찬가지다. 육적인 사랑으로 교인들을 자기의 세상적인 목적에 이용을 해 먹는다. 믿지 않는 사기꾼들은 다른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취하지만 세상적인 기독교는, 마귀의 속임수는 사람의 정신을 사망성으로 집어넣는 일을 한다.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깊음이 나를 삼킨다’는 것은 자기가 깊은 곳에 빠졌다는 거다. 즉 비진리의 교훈에 서서히 빠진 것을 말한다. ‘웅덩이가 입을 닫는다’는 것은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니까 맨홀 뚜껑을 닫듯이 이 웅덩이의 뚜껑을 덮는 것을 말한다. 자신도 모르게 비진리에 서서히 감염이 되면 마귀의 밥이요 마귀의 종이 되어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거다.
사람이 웅덩이에 빠져도 웅덩이 위가 열려있으면 하늘이 보이고,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살아나올 수도 있지만 웅덩이에 빠지자마자 위에서 뭐가 무너지거나 뚜껑이 있어서 덮인다면 그곳에 갇힌 채로 살아서 나오기가 어렵다. 자기가 정신 사상 면이 분별이 안 된다면 이것은 캄캄한 웅덩이에 빠진 상태다. 영적 사상 면에서 캄캄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캄캄하던, 주위가 다 캄캄하던 캄캄한 곳에 있게 되면 어디가 길이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이런 곳에서는 살아나오기가 힘들다.
O목사님이 여기에 와서 교훈을 듣고서 아는 목사를 만나서 이 교훈을 전하니까 ‘야, 그거 참 좋은 말씀이다. 나도 너처럼 귀한 걸 깨달아야 되겠구나’ 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귀한 것을 듣고 옳다고 생각이 되면 옳은 것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지 자기가 빛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빛을 발견하겠다고 한다면 이게 될 말이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굴 속에 들어가서 헤매고 있을 때 어디에서 ‘찍찍’ 하는 쥐 소리가 난다면 이건 어딘가에 밖으로 나갈 구멍이 있다는 증거다. 이럴 때는 그 소리를 따라가는 게 지혜로운 거다. 마찬가지로 빛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을 따라 나가야 할 게 아니냐? 그런데 자기도 빛을 발견하겠다? 왜 선지자가 있는 거고, 왜 스승이 있는 거냐?
성경은 우리의 영을 위한 말씀이니 이 말씀을 깨달아서 세상 인본주의적인 비진리에 감염되지 않고 자기의 신앙차원이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영의 눈이 밝아서 웅덩이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마귀의 차원보다 높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꾀임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마귀의 유혹을 우리의 구원에 이용을 해 버렸다. 우리의 교훈도 그래야 하고, 우리의 깨달음도 그래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육덩이 차원에 머물고 있으면 마귀의 이용감이 돼버린다. 마귀는 천국의 차원은 못 되지만 공중의 차원은 되기 때문에 육덩이 교인들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세상과 세상 것을 들고 와서 얼마든지 유혹과 미혹을 할 수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14절: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깊은 수렁’이나 ‘깊은 물’을 교훈적으로 보면 잘못되고 그릇된 가르침을 말한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바리새파 종교 지도자들은 표면적 외부적으로 덩어리 큰 것 위주로, 세상위주로 나가는 외식신앙이었다. 이들은 당시로 보면 로마의 압제에 있던 자신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러니까 가견적, 불 탈 세상에 관한 것에 목적을 둔 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가르치는 게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구나’ 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을 지옥에까지 빠뜨리는 깊은 수렁이요 깊은 물과 같은 교훈이요 신앙이라는 거다. 깊은 수렁과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진리이치, 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정신 사상이 깊은 수렁과 깊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려면 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손으로 잡고 건져 올리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교훈으로라야 만이 사람을 어둠에서, 사망계에서 끌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는 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으로 건짐을 받아야 사람이 자유자가 되고, 차원이 월등하게 높아지고, 지혜로워지고, 이렇게 되면 사리판단 분석이 빠르고, 속지 않게 되고, 편하고, 기쁘고, 즐거운 건데 타락된 인간들은 자기가 이렇게 건짐을 받으면 꼭 굶어죽고, 못 살고, 더 못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고 믿어갈수록 짐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거다. 극단적으로 말을 하면 예수가 자기를 못 되게 하고, 못 살게 하고, 망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되어있다.
사람은 생명과를 먹으면 통치 활용 사용이 들어가는 거지만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를 먹게 되면 그것마저도 빼앗기고 쫓겨나서 눈물과 고통과 살인이 오더라.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는 사고방식의 입장에서는 이게 안 믿어지는 거다.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데도 안 믿어지는 거다. 참 이상하다. 이방 불신자들은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안에서 이방 불신적 정신 사상을 가진 거짓 종들 역시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이런 일들을 보면 먼저는 세상 구복주의의 가르침이 있다. 하나님에게 와서 ‘복 달라. 뭐 달라’ 하는 것. 식당에 가면 벽에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라는 성경구절을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식당주인 중에는 주일을 지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어느 분은 주일도 안 지키면서 그렇게 써 붙여놓았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도 마지막 날에는 다 불속으로 들어간다. 다 타버린다. 그런데 왜 타버릴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야단법석을 하느냐? 그것도 천국을 가겠다고 하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집을 사더라도 자기 월급을 가지고 그 집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집을 사야 할 텐데 왜 자기 월급이 다 들어가고, 남의 돈까지 끌어 오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서까지 큰 집을 사느냐? 왜 필요 외의 것까지 가지려고 하느냐? 나중에 집값이 올라가면 팔아서 이익을 남기려고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런 정신으로 사는 사람의 머리통은 항상 집값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된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다가는 늙어지면 치매로 들어간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흡족한즉 예수 믿는 쪽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는 쪽으로 신경을 쓰며 산다면 얼마나 좋으냐? 예수를 믿는다면 사람이 자라야지. 사람이 성장을 해야지. 이 면에 대한 소원성은 없고 자꾸 물질적인 면으로 생각을 해 봐라. 그렇게 하다가 부자가 됐는데 어떤 연유로 해서 쭈그러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100평짜리 집에 살던 사람이 50평짜리 집에 살게 되면 이런 집에서는 드러 누울 자리가 없느냐? 못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50평짜리 집의 베란다에서라도 집안 식구가 다 잘 수 있다. 그런데도 죽겠다고 한다.
우리는 좀 못 살더라도 원망 불평을 하거나 더 큰 것, 더 나은 것에 한을 삼지 말고 ‘내 실력이 이만밖에 안 되는구나’ 라고 하면서 자신의 배움과 지혜와 경제에 합당하게 살면서 실력을 키워서 실력대로 더 큰 데로 나가면 되는 건데, 실력은 쌓지 않으면서 더 나은 것에 대한 소원성을 가지고 야단법석을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찌 되겠느냐?
궁극교회 교인들은 물질에 대해 ‘복 복’ 하지 말아라. 성경은 물질은 임시성이고, 사용성, 활용성, 이용성이지 물질을 많이 가지는 것이 참 복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참 복은 사람이다. 시:에 ‘복 있는 사람은...’ 하는 게 있지 않느냐? 그런데 물질적으로는 부자인데 사람 자체가 복이 없는 사람이 많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혹 물질의 소유성이 불어날지라도 참 복인 사람이 깨달아져 가야 하고, 혹 가난해지더라도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도 있고 더 불행한 사람도 있는 것이니 주신 환경에 대해 감사하면서 실력을 쌓아가야지 감사치도 않고 원망 불평으로 들어간다면 오히려 더 쭈그러져 버린다. 감사하는 사람이 마음이 따뜻하고 넓고 풍부하다.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 두 번째는 신비주의, 은사주의, 체험적 가르침이 있다. 이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다. 귀신 들게 만든다.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성령님이 사람을 미치게 해서 눈을 뒤집게 하고, 벌벌 떨게 하고, 벌러덩 넘어지게 하느냐? 성령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서 정신을 초롱초롱하게 한다. 우리는 ‘휙 휙’ 해서 사람을 넘어뜨리거나 이상한 짓을 하는 곳에는 아예 가지 말아라.
세 번째는 사회주의, 세상 도덕주의의 가르침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위로부터 오는 진리이치의 깨달음에서 되는 도덕성이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일반적인 도덕성은 ‘이 행동이 좋고, 저 행동이 좋다’ 라고 해서 인간들이 만든 땅에서부터 나온 거다. 믿는 우리의 활동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일반 도덕성처럼 보일지라도 그 근원은 생명과를 먹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거다.
예수님의 도덕성과 바리새교인들의 도덕성이 같으냐? 다르다. 예수님의 도덕성과, 바리새인들의 도덕성과, 로마사람들의 도덕성이 같으냐? 로마사람들의 도덕성은 바리새교인들의 도덕성과 같지만 예수님의 도덕성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해방을 원했다. 로마는 유대인들을 해방을 안 시키고 붙잡아 놓으려고 했고, 유대인들은 탈출을 하려고 했지만 탈출하려는 마음이나, 움켜쥐려고 하는 마음이 똑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서 해방이다. 그러니 전혀 질이 다른 각도다. ‘죄에서 해방’이라는 말 속에는 영특한 도덕성이 들어있고 지혜지식성이 들어있다.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거다.
일반적인 도덕성은 선악과 따먹은 타락되고 저주받은 세상 기준적 도덕성인고로 이런 세상적인 도덕성으로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그 성품은 신령천국에 못 들어간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들어간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꿔진 것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생각을 해 봐라. 세상에서 성인군자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성품의 질과 같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으로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못 깨닫는 거고, 예수님을 못 믿는 거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땅에서 올라온 것이 질이 같을 수 있느냐?
불교계나 유교계 등의 이방 종교인들의 도덕성이 하늘나라로부터, 성경으로부터 된 것이라면 그들이 왜 성경을 안 보는 것이고, 왜 예수를 안 믿는 거냐? 아니기 때문에 안 보고 못 믿는 거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을 하셨고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데 이방종교의 교주는 죽어서 부활이 안 됐다. 그들의 시체는 죽어서 썩은 채로 땅에 그대로 있지 않느냐? 그럼에도 이런 자들의 가르침이 뭐가 좋다고 따라가는 거냐? 예수님도 죽은 채로 이 땅에 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승천 했다. 부활이란 전부는 안 죽고 살아났다는 말이다. 전부는 산 것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맨 죽을 것, 썩을 것만 가르치셨느냐? 하나님 당신은 영생하는 분이시니 믿는 우리가 영생하는 이 분 속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지식화 되고 닮아진 것은 우리 역시 영생이 되는 거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것을 다 보여주시지 않았느냐? 선지자로 통해서 보여주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게 영 안 믿어지는 게 병이다. 왜 안 믿어지느냐? 교회에서 하늘나라의 지식과 땅의 지식을 구별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방 종교인들이나 무당들이 하듯이 ‘세상 복 복’ 하는 거다. 그래서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그 수준이 이방 종교인들과 같아질 수밖에 없는 거다.
예수를 믿을지라도 자기 속에 세상성적, 또는 신비적인 정신이 들어있으면 중생한 그의 영은 천국에 들어갈지라도 그 사고방식의 성질은 세상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간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직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서 점잖을 피는 것뿐이지 환경만 조성이 되면 언제고 예수를 팔아먹고 돈을 따라가게 된다.
세상사람들이라고 해도 당장 오늘을 보고 사느냐, 나중을 보고 사느냐? 나중을 본다. 왜 큰 기업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냐? 임시 코앞을 보는 거냐, 나중을 보는 거냐? 나중을 보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이 그런 곳에 들어가기를 애쓰라는 말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라는 거다. 아무리 배가 고플지라도 눈앞에 농약이 있다고 해서 마실 수 있느냐?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는 것에는 당장의 눈앞만 보느냐?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세상 구복주의 중심이나, 신비주의 체험적 중심이나, 사회주의 일반 도덕성의 가르침들은 전부가 예수님의 기본구원의 정신 사상이 없는 가르침들이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1+1, 3+4 등의 기초적인 것은 대학공부를 할 때나 박사공부를 할 때도 필요하다. 아무리 박사라고 해도 이 기초적인 지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기초로 하고 그 위의 문제로 들어가는 거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 아무리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주장을 할지라도 기본구원의 기초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 복음이 아니다.
왼쪽에 있는 자들이 예수이름을 가지고 전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난 너희들을 모른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거나 그들이 한 일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바탕이 없구나’ 이 말이다. 그러니까 진리이치를 바로 깨닫고 그런 일을 해야 사람이 인격적 성품적 차원적으로 올라가는 건데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이 없다는 말이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은 바탕이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사상의 바탕이 없기 때문에 이런 바탕이 없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여기에서는 집이 세워지지를 않는다. 신앙 믿음이 올라가지를 않는다. 교회의 인도자들은 이걸 잘 알아야 한다. 바탕이 바로 놓여진 후에라야 그 위에서 올라가게 되는 거다. 이 바탕 위에서 사람이 만들어지게 되어있고, 사람이 지혜롭게 올라가게 되어있고, 사람이 반듯하게 놓여지게 되어있는 거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게 한 시간 예배나 때우고, 헌금이나 내고, ‘집사님, 장로님’ 하는 소리나 듣는 게 아니다. 사람은 깨달아야 하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 놓여져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표현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은혜주실 사람을 찾다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내가 찾던 사람이 여기 있었구나’ 라고 하면서 당신의 일을 맡겨서 은혜를 주시는 거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걸 내 입장에서는 ‘하나님, 그런 사람이 궁극교회에 많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라고 할 사람이 우리교회에 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요 복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나?’ 하는 점을 알아서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세상적 육적 인본주의적인 교회의 가르침들은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방해하는 사단 마귀의 속임수다.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은 성도들을 꾀이기 위한 사단 마귀의 속임수로 봐야 한다. 성도들을 음녀로 만들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기독교 종교적인 바벨론이다. 이런 게 깊은 수렁이요 깊은 물인데, 이들의 수법이 얼마나 교활한지 한 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다.
어떤 교회는 교인이 한 주 안 나가면 전화를 하고, 장로가 오고, 집사가 오고, 전도사가 오고 해서 귀찮아서 계속 나가게 된다고 한다. 우리교회에서는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는 거다. 그런데 다른 교회로 가더라도 우리교회보다 훨씬 나은 교회로 가야 한다. 목사인 나부터 이곳보다 훨씬 나은 곳이 있으면 그리로 갈 거다. 여러분들은 여기에 그대로 있어라. 나는 그리로 갈 거다. 이곳보다 못한 곳으로 간다면 너는 저주다. 다른 교회로 가려면 더 잘 될 수 있는 교회로 가야지 왜 더 못한 교회로 가느냐? 이건 저주다. 네가 그 결과를 보게 된다.
15절: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이게 무슨 말이냐? 다윗이 비가 많이 와서 홍수에 빠졌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신세계를 말하는 거다. 사울 왕이나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그 활동 자체를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정신 사상을 말하는 거다.
‘엄몰’이란 많은 물이 한꺼번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인데, 이 때 낮은 곳에 있으면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자기의 신앙차원이 낮으면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적이고 비진리적인 신앙사상이 홍수처럼 밀려올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빠져 들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빠져든 사람은 ‘이것이 믿음이다’ 라고 하면서 계속 그곳에 있게 된다. 자기의 신앙차원이 낮기 때문에 비진리적 육적인 운동이 자기를 밀고 나가는데도 ‘이게 신앙이로구나’ 하는 착각에 빠져 있게 된다.
자기가 비진리의 교훈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 내가 밀려가는구나. 이건 믿음이 아니구나’ 라고 알게 되는 건데 빠져놓으니 ‘이것이 믿음이다’ 라고 하며 비진리로 계속 나가면서 비진리 운동에 동참하고 협조하고 충성을 하게 되는 거다. 말세가 될수록 교인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이 교회 저 교회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비진리로 밀려나가게 되는데, 이것은 비진리의 홍수가 난 거다.
세상적, 인본주의적, 종교적 지식의 차원의 교인은 자기가 지금 큰 물에 잠겨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계속 그런 교훈을 받는다면 이걸 어떻게 알겠느냐? 자기가 어떤 연유로서 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건 그곳에서 나온 후에라야 ‘아, 그 때 내가 그렇게 하던 것이 홍수에 빠진 상태였로구나’ 하고 알게 된다. 자기에게 이런 게 보인다면 자기는 그만큼 올라온 거다.
마귀는 우리의 육신을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다. 비진리적 육적인 신앙사상을 붙잡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을 한다. 거짓 종들도 마찬가지다. 육적인 사랑으로 교인들을 자기의 세상적인 목적에 이용을 해 먹는다. 믿지 않는 사기꾼들은 다른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취하지만 세상적인 기독교는, 마귀의 속임수는 사람의 정신을 사망성으로 집어넣는 일을 한다.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깊음이 나를 삼킨다’는 것은 자기가 깊은 곳에 빠졌다는 거다. 즉 비진리의 교훈에 서서히 빠진 것을 말한다. ‘웅덩이가 입을 닫는다’는 것은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니까 맨홀 뚜껑을 닫듯이 이 웅덩이의 뚜껑을 덮는 것을 말한다. 자신도 모르게 비진리에 서서히 감염이 되면 마귀의 밥이요 마귀의 종이 되어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거다.
사람이 웅덩이에 빠져도 웅덩이 위가 열려있으면 하늘이 보이고,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살아나올 수도 있지만 웅덩이에 빠지자마자 위에서 뭐가 무너지거나 뚜껑이 있어서 덮인다면 그곳에 갇힌 채로 살아서 나오기가 어렵다. 자기가 정신 사상 면이 분별이 안 된다면 이것은 캄캄한 웅덩이에 빠진 상태다. 영적 사상 면에서 캄캄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캄캄하던, 주위가 다 캄캄하던 캄캄한 곳에 있게 되면 어디가 길이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 이런 곳에서는 살아나오기가 힘들다.
O목사님이 여기에 와서 교훈을 듣고서 아는 목사를 만나서 이 교훈을 전하니까 ‘야, 그거 참 좋은 말씀이다. 나도 너처럼 귀한 걸 깨달아야 되겠구나’ 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귀한 것을 듣고 옳다고 생각이 되면 옳은 것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지 자기가 빛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빛을 발견하겠다고 한다면 이게 될 말이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굴 속에 들어가서 헤매고 있을 때 어디에서 ‘찍찍’ 하는 쥐 소리가 난다면 이건 어딘가에 밖으로 나갈 구멍이 있다는 증거다. 이럴 때는 그 소리를 따라가는 게 지혜로운 거다. 마찬가지로 빛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을 따라 나가야 할 게 아니냐? 그런데 자기도 빛을 발견하겠다? 왜 선지자가 있는 거고, 왜 스승이 있는 거냐?
성경은 우리의 영을 위한 말씀이니 이 말씀을 깨달아서 세상 인본주의적인 비진리에 감염되지 않고 자기의 신앙차원이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영의 눈이 밝아서 웅덩이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마귀의 차원보다 높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꾀임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마귀의 유혹을 우리의 구원에 이용을 해 버렸다. 우리의 교훈도 그래야 하고, 우리의 깨달음도 그래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육덩이 차원에 머물고 있으면 마귀의 이용감이 돼버린다. 마귀는 천국의 차원은 못 되지만 공중의 차원은 되기 때문에 육덩이 교인들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세상과 세상 것을 들고 와서 얼마든지 유혹과 미혹을 할 수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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