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71:1)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열려라 에바다 2025. 11. 1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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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이추천 2조회 4925.11.09 08:4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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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편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께 피하면 언제까지 수치를 당치 않는다는 거냐? 영영히. 사람이 피하는 것을 보면, 첫 번째는 선악과 따먹은 일반세상을 보면 자기가 죄를 짓고 안 죽고 안 잡히려고 정처 없이 도망가는 도피도 있다. 두 번째는 비진리인 것을 알고서 진리를 찾아 그곳에서 나가는 피함도 있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이며, 비진리는 무엇이냐? 일반세상이나 학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이냐?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데, 불교계에서도 진리라는 말을 할 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과학적인 법칙도 진리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계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성경말씀을 세상 일반적인 개념의 진리의 뜻으로 알고 있기도 한데, 이건 다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지식에서 나온 거다.


그러면 성경은 무슨 뜻으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을 하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인데, 이 말씀은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말씀이냐? 죽음 저 너머에까지도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 지식으로 된 모든 도덕성, 지혜지식성, 능력성은, 즉 진리로 된 기능과 지능은 죽음 저 너머까지 영원히 간다.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면 이건 무슨 사람이냐? 진리의 사람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셨으니 인격과 성품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이 사람은 진리의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것으로 변화된 것만큼 진리의 사람이다.


‘성도’라고 할 때는 진리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의 교인의 차원에 있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 기독교 일반적 종교적 개념으로 믿는 하나의 교인일 뿐이다. 성도와 교인은 다른 거다. 이방 종교인들도 교인이다. 그런데 이방 종교에서는 그 종교에서 하라는 것만 하면 그 종교의 교인이 되는 거지만 인격과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안 바꿔지는 거고, 바꿔질 수도 없는 거다. 왜 그러냐?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데서 나온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는 종교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종교에서는 아무리 죽을 때까지 공을 들이고 고행을 하고 은둔생활을 하며 도를 닦을지라도 인격의 변화는 없는 거다.


믿는 우리에게는 실은 이방신이 없는 거다. 우리에게는 이방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니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지식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사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 목적을 두면 안 된다. 왜냐?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께서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옳은 것, 하나님의 뜻을 구해서 네 것으로 만들어라. 네가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되는 게 하나님의 의의 사람이다.


모든 이방 종교적 지식은 우리 주님에게 정죄를 받는다. 이방 종교인이 아무리 도통을 하고 축지법을 쓴다고 해도 우리 주님에게 정죄를 받는다. 사실 축지법을 쓰는 사람은 없다. 괜히 신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말일 뿐이다.


예수님이 사대 성인 중에 하나다? 아니다. 우리 주님이 어디로부터 오셨느냐? 하늘로부터 오셨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예수님 말고 누가 하늘로부터 온 자가 있느냐? 없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도 없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는 사람을 하늘로 올려줄 자도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예수로 말미암아 올라간다. 구약시대의 다니엘도 선재적 그리스도의 역사로 하늘로 올라간 거다. 에녹도 마찬가지다. 창세 때 이미 성령님께서 이런 역사를 하셨다. ‘물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니’ 라고 하는 게 이 역사를 말하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방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이방 종교적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한다. 일반적인 세상의 지식을 기준으로 성경을 보고 예수를 믿으니 일반적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는 거다. 이것이 속화되고 세상적인 교회다. 교회는 교인을 말하는 거다.


우리는 신앙의 이치를 잘 알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인간-->물질’의 순서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은 ‘하나님-->물질-->인간’의 순서로 산다고 하지만, 즉 하나님을 자기 머리 위에 두고 사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질을 많이 얻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머리 위에 물질을 두고, 하나님을 자기 발아래 밟고 사는 거다. 그러니까 ‘물질-->인간-->하나님’의 순서로 사는 거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종으로 삼고 사는 거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모른 채 선악과 따먹은 지식으로 사는 일반세상은 ‘물질-->인간(하나님은 없고)’의 순서로 산다. 그래서 술 먹고 길거리에 다니며 똥오줌을 싸는 사람이나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사람이나, 아무리 학박사라고 해도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은 사는 소원 목적이 세상과 세상 것으로 들어가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세상 부귀영화, 명예 권세 등 세상에 있는 것을 소원 목적하며 살고 있다면 성경은 타락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면 타락한 사람이 어떤 차원이냐? 타락된 사람이 인간을 알아보느냐? 부모형제를 알아보느냐? 처와 자식 남편을 알아보느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이런 이런 목적으로 너를 출생케 했고, 이런 이런 목적으로 너를 세상에 살게 했고, 너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무엇을 입고 가야 한다. 무엇을 만들고 가야 한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을 한 마디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온전을 입게 하려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만들어지게 하려고 너를 세상에 만들어 놨다’ 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어느 장소던, 어느 시대이던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입게 하려는 거다.


그렇다면 너는 구원을 아느냐? 너는 무엇이 예수 믿는 건지 아느냐? 너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아느냐? 모르고 살았느냐? 이건 구더기다. 이건 짐승이다. 밥 먹고 배부른 것으로 인간인 줄 아느냐? 짐승도 그렇게 산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른다면 너는 짐승과 같다. 성경이 이 말을 하고 있다. 왜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인격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하나님의 것으로써 자기의 실상이 자라나게 되는 거다. 이게 성도다. 이게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어떻게 믿고 있느냐? 틀렸으면 고쳐라.


진리는 자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영원히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극치의 세계에서 그 나라를 하나님과 같이 누릴 수 있는 실력자가 되게 한다. 이게 진리다. 이방 종교인들의 세계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허구일 뿐이다. 이치가 없다. 성경은 하늘나라, 하나님의 뜻, 우리의 이룰구원의 이치와 도리가 들어 있다. 이게 진리다. 이 교훈을 주는 것은 진리의 교훈이다.


정신과 사상 면에서 세상의 것은 버리고 오로지 이 정신 사상을 가지는 것은 진리신앙 노선으로 생명 길을 가는 거고 하나님의 뜻만 붙잡고 가니 것이니 이 진리의 길은 좁은 길이다. 하나님의 의사성에 단일성으로 맞춰가니 좁은 길이다. 그러나 비진리는 성경을 완전히 세상 쪽으로 바꿔놓는다. 예를 들면 아가페 사랑에는 진리가 들어 있는 건데 이 아가페 사랑을 인조사랑, 인간 조작배기 사랑으로 바꿔놓는다. 이건 마귀의 수법이다.


진리의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성격이나 성질을 고치고 모든 관계성에서 규모가 있고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져 가지만 비진리에는 이게 없다. 왜냐? 자기 기분대로 사는 고로 사람이 안 고쳐지기 때문이다. 비진리의 교회에 들어가면 인간 사랑이 풍부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없다. 그러면 이런 곳에서는 뭘 하겠느냐? 종교적인 행사위주로 돌아간다. 음악콩쿠르, 문학의 밤 등 기독교 문화운동으로 나간다. 이런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교회에서 이런 걸 안 하면 신앙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된다.


진리의 사람은 어느 환경 처소이던, 가정이나 사회나 세계적으로 어떤 큰 사건이 몰려올지라도 거기에 감염이 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가셨듯이 거기에 빠지지 않고 파도를 타듯이 능히 딛고 나간다. 그 사건 환경을 뚫고 나간다. 멋있는 사람이다. 이게 진리의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어느 곳에 있으면 그것에 감염이 되게 만들어졌다. 인간 자기는 감염성의 존재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이 감염성이 무서운 거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곳이 비진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절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자기가 좋은 것으로 감염이 되면 좋은 인격과 성품을 가지게 되지만 비진리를 먹고 마시고 듣게 되면 나쁜 인격과 성품을 가지게 된다.


기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영이 중생이 됐는데, 이것을 기본구원이라고 한다. 이것을 주축으로 하고, 터로 하고, 반석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치로써 성장이 되어야 한다. 키가 자라는 생명이 있듯이, 나무가 자라는 생명이 있듯이 중생된 영의 생명도 자란다. 기독자는 중생된 영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진리말씀을 들으면 이 영이 자라는 거다. 믿음이 자라고, 성품이 자라고, 하나님의 인격의 사람으로 성장이 되는 거다. 교회를 수 년 수십 년 다녔어도 이게 없다면 문제다. 주는 자가 문제가 있던, 받는 네가 문제가 있던, 아니면 둘 다 문제가 있는 거다. 밥을 먹는데 왜 힘이 없고 못 자라는 거냐? 문제가 있는 거다. 뭘 먹고 병이 걸렸다면 그 음식에 문제가 있는 거다.


세상적이며, 육적이며, 옛사람 부패성적이며, 마귀적이며, 비진리적인 교훈을 받으면 신앙생명이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 이건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거다. 사람을 죽이는 거다. 영을 위해 주신 성경말씀을 세상, 육 쪽으로 쓰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치를 깨달아서 올라가야 할 면이 가로막히고, 깨달아야 할 생명이 점점 죽는다. 다윗도 시편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죽는다는 거다. 이것을 육신이 죽는다는 것으로만 보지 말아라. 이건 안 믿는 사람도 다 아는 거고, 육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이다.


다윗이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고 하는 것은 주는 신령한 분이시요 우리의 영을 위해 역사를 하는 분이시니 자기를 악한 자들의 죄악에 감염이 되지 않게 그곳에서 도피하게 해 달라는 거다. 이걸 사건으로만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육신의 목숨이 죽을 것이 무서워서 피하게 해 달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죄악에 감염이 안 되려고 도망을 가려는 거다. 이게 주께 피하는 거다. 이게 이해가 되느냐?


세상에는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게 있다. 길바닥에 똥이 있으면 척척 밟고 가느냐, 피해 가느냐? 피해 간다. 이것은 똥이 무서워서냐, 더러워서냐? 더러워서다. 그러면 왜 더러운 것을 피하는 거냐? 자기 몸에 똥을 안 묻히려는 거다. 묻히면 자기가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똥이 더러운 게 아니라 제일 더러운 것은 사람 되지 못한 마음이다. 정말 보기 흉하다. 똥보다 더 더럽다.


세상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 안 잡히려고 도망을 간다.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진 진리의 성도들은 그런 것보다는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면에 상당히 민감하다. 영적 활동에 민감하다. 성령의 사람들은 구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구별하는 영이시다. 성도들은 구별하는 영을 가지고 있다.


성도의 바른 도피는 내 마음대로 아무 곳으로나 도피가 아니라 반드시 진리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야 도피가 되는 거다. 구약에 도피성이 있는데, 이 도피성 안에 누가 있느냐? 제사장이 있다. 도피를 하려면 영영히 수치가 되지 않고, 영영히 존귀 영광자가 되는 곳으로 도피를 해야 한다. 수치는 인격자만 느끼는 거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실력이 없고 모르면 수치스럽다. 벗고 있으면 수치스럽다.


주께 피한다는 것은 자기가 진리이신 주님을 붙잡은 것을 말한다. 주님을 붙잡았으면 진리를 붙잡은 거다. 주님을 붙잡았다고 하는 사람이 진리를 못 붙잡았다면 이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잡은 거다. ‘나는 길이요’ 라고 했으니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잡았으면 이 사람은 주님을 붙잡은 거다. 주님을 잡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다 따라온다. 이 중에 하나를 잡으면 다 잡은 거다. 같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주님을 붙잡았다고 하면서 진리를 내버리고, 생명을 내버리고, 말씀을 내버리고, 이치를 내버리고, 천국을 내버렸다면 뭘 붙잡은 거냐? 주님을 붙잡은 게 아니라 세상을 붙잡은 거다. 이건 스스로 속는 거다. 신앙의 이치는 그런 게 아니다.


신앙은 반드시 상대가 있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믿음을 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하나님을 붙잡아야 참 신앙이고, 다른 것은 다 가짜 신앙이다. 가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가짜 신앙은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값으로 칠 게 아무 것도 없다. 이방종교를 섬기게 되면 사람이 일반보다 더 못쓰게 돼버린다. 이걸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받아야 믿음이 자라고 깊어지는 거다. 믿음과 신앙은 같이 붙어서 따라가는 건데, 믿음이라고 할 때는 구별을 해야 한다. 신뢰적 믿음이 있고, 신념적 믿음이 있고, 신의적 믿음이 있는데, 우리는 신의적 믿음이다. 하나님의 의사를 알수록 믿음이 자꾸 커지게 되어 있다. 질적으로 그 분처럼 커지게 되어 있다.


기독교 안에 소위 사명자도 많고 영웅성을 가진 자들도 많은데, 이것은 신념적 신앙이다. 신념적 신앙은 그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나온 거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라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이것을 하겠사오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지요?’ 라고 하는 거다. 하나님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속에서 이성적 종교성적 사명감에 불타서 그러는 거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아느냐? 모른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뜻을 붙잡고 살아나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이것도 써라. 저것도 써라’ 라고 하시는 거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군인들을 몰아올 테니 네가 정복을 해서 가져온 것을 네가 다 써라’ 라고 하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신념적 신앙이 만연해 있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성경을 아느냐? 모른다. 성경에 보면 목숨을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뭐냐?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되지 않은 것은, 다시 말하면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는 일이 아니면 개죽음이라는 거다. 왼쪽에 있는 자들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당당히 자랑을 했느냐? 그런데 예수님은 ‘난 너희들을 모르겠다’ 라고 말씀을 하셨다. 왼쪽에 있는 자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너무나도 많다.


선악과 따먹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본질을 떠난 세속화된 교회가 많다. 이런 교회에서는 말씀의 정신을 볼 수 없다. 이련 교회의 교인들은 교회의 문턱만 밟았다 뿐이지 예수정신을 볼 수 없다. 말씀의 정신을 볼 수 없다. 구별된 신앙사상을 볼 수 없다. 정신 사상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느냐? 예수님의 냄새는 무슨 향기냐? 인격과 성품에서 나오는 고상함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걸 보기가 힘이 들다. 신앙의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이 전부 세상화로 되었다. 하나의 기독교 종교인으로 되어버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신앙인 아니다. 말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정신 사상 면에서는 하나님의 의사성이 없이 인간 자기 주관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성경을 들고서 각자가 다른 주장을 하면서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뭐가 하나님의 뜻이냐? 하나님의 변치 않는 뜻은 시대가 지나가도, 어떤 자리에 있어도 ‘너는 나처럼 온전자가 되라’는 거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성경해석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소를 기른다면 소처럼 길러내야 한다. 그래야 소 값이 있다. 소를 기른다는 것이 쥐새끼처럼 만들어 놓으면 소 값이 있겠느냐? 돼지는 돼지처럼 길러야 한다. 돼지는 잔뜩 먹여서 배가 부르게 해서 살을 많이 찌워야 값이 나가는 거지 살을 빼면 값이 없다. 그러면 사람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거냐? 인격에 있다.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적 인격은 없고 공통된 일반 인격밖에 없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가치판단을 내리는 지혜지식도 없다. 이걸 분명히 알아라.


우리가 유형교회에 나가는 것을 주께 피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면 안 된다. 왜냐? 외모 모양적으로는 교회의 간판을 붙이고, 십자가를 붙이고 성경을 들고 설교를 하는데도 거짓되고 이단적인 교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 나가서 ‘내가 악한 자들을 피해서 주께 와서 앉았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을 주님께 피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라. 진리 사상화, 진리 인격화, 진리 성품화로 되지 않으면 너는 주님과 거리가 멀다.


친구들 중에는 외모 모양은 다를지라도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다. 마음이 맞는 친구는 내 쪽에서 자세히 말하지 않고 ‘그거 왜 있지?’ 라고 하면 ‘아, 그래’ 라고 하며 척 척 통한다. 의사적으로 잘 통하는 사람끼리는 이렇게 된다. 그러나 의사성이 안 맞으면 서로가 지옥이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나와는 의사단일이 첫째다. 이를 위해 우리가 성경을 보고 듣고 읽고 배우고 깨닫는 거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이 뜻을 내 뜻으로 삼고 하나님과 의사가 잘 통하기 위해 성경을 배우는 거다.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영영히’란 ‘영원히’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오각과 오감성으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존재요, 존귀 영광을 느끼는 존재요, 또한 무능력이나 수치를 느끼는 존재다. 짐승은 인격이 없고 영혼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을 못 느낀다. 그렇다면 인간 자기는 이걸 느끼느냐?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세속화된 교회에 다니게 되면 영영히 수치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불탈 구원이 있고 부끄러운 구원이 있다. 예수 믿으면서 불에 타질 것을 많이 준비했으면 소돔 고모라에서의 롯처럼 불탈 구원이 되는 거고, 부끄러운 구원은 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없는 것을 말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주님의 눈으로 보니 너는 부자라고 하지만 벗었구나. 가련하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가 성경의 뜻을 100% 알 수는 없지만 한 절에서라도 영적인 이해타산을 깨달았다면 그 면에서는 그만큼 눈을 뜬 거다. 그런데 오늘날 눈을 못 뜬 인도자가 얼마나 많으냐? 그래서 성경을 들고 말을 하는데도 액면적으로만 말을 하게 되니 하나님의 의사와 뜻은 나오지 않고 결국은 세상적 사고방식의 말이 되는 거다.


진리신앙의 성도는 영원히 가는 수치와 영광을 깨닫고 현실에서 이런 걸 느낄 줄 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이면서 영적인 면의 희로애락을 못 깨닫고 못 느낀다면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쪼그라지고, 기를 펴지 못하고, 멍청한 사람이 되어서 죽고 만다. 오늘날 이런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으냐? 이런 자로 살지 말라고 예수님을 알게 했고,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살라고 예수님을 믿게 했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즉 교인을 만든 거다. 교인의 집단이 교회다. 십자가를 붙인 건물은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이 모이는 예배당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수치를 당치 않는다는 말속에는 실력적 능력적으로 영영히 존영자가 되라는 뜻이 들어있다. 믿는 사람이 이것을 안다면 정신이 번쩍 들고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지 않을 거다. 이 타락된 세상에서도 부끄러움과 수치가 있듯이 신령한 천국에도 영능의 실력 차이로 오는 영영한 수치가 있는 것인데,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 나라의 영광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그 때 가서 어떻게 할 거냐?


천국에 가면 모든 게 공평하다? 모르는 소리다. 천국은 공의의 세계요, 의의 세계요, 선의 세계요, 아가페의 세계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나님의 공평성을 땅이 푹 꺼졌으면 불도저가 그 땅을 밀어서 평평하게 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말을 하는데, 이건 마귀의 소리다. 모세가 뭐라고 했느냐? 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했다. 다니엘 12장에도 보면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신약에는 천국에서는 네가 행한 대로 받는다고 했다. 이게 다 뭐냐?


유구라파를 기독교 신앙정신으로 점령을 한 사도바울과, 주님의 십자가 옆에서 운 좋게 구원을 받은 오른 쪽 강도가 천국에서 영광이 같겠느냐? 같다면 뭐 하려고 애가 터지게 배를 곯아가면서 예수를 믿느냐? 예수를 믿지 않고 실컷 놀다가 죽을 때쯤 되어서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해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소리를 들으면 될 게 아니냐? 성경에 보면 순교자의 영광도 있느냐? 면류관도 있느냐? 이게 다 기쁨을 말하는 거고, 실력의 차등을 말하는 거다. 그럼에도 천국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 사단 마귀의 소리에 귀가 절여져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거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천국은 죄인이 없는 곳이고, 모두가 이 땅에 살면서 마련한 영능의 실력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 곳이다. 내가 대낮보다 더 광명한 이곳에 들어가서 무능력자로 벙거지를 쓰고 엉거주춤하게 앉아있거나 서 있다면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지금 현재에서 느낄 수 없느냐? 천국에 실지로 이런 게 있겠냐마는 인격의 수치감을 알라고 인간의 표현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을 잘못 만나서 신세를 망치는 일도 있고, 어디에 잘못 들어가서 수치를 당하고 나오는 것도 있고, 잘못 알고 잘못 배워서 평생을 고통을 당하는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잘못 들어가고 잘못 배우면 영영히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는 곳이 있다. 이곳이 어디냐? 교회다. 거짓 교회, 이단적인 교회에 들어가면 이런 꼴이 된다.


그러면 참 교회로 가서 참 교훈을 들어야 하겠는데, 참 교회를 무엇으로 분별을 하느냐? 사랑을 가지고 분별을 하느냐? 간판을 가지고 분별을 하느냐? 아니다. 도둑은 얼굴이 도둑처럼 생겼느냐? 도둑은 주민등록증이 없느냐? 도둑은 얼굴이 시커머냐? 도둑도 일반사람들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도둑을 몰라보고 얼마나 사기를 당하고, 도둑을 등용해 쓰다가 얼마나 피해를 당하는 일이 많으냐?


이 세상에는, 특히 교회 중에는 영영히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곳도 있고, 부끄러운 자가 되게 가르치는 곳도 있으니 이런 가르침은 받지도 말고, 이런 곳에는 가지도 말고, 이런 사람은 만나지도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피하자. 이렇게 하면 영영히 수치를 면케 된다. 이 말씀이 우리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냐, 우리를 부려먹으려는 말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