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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즉필생 용기 준 ‘포켓용 성경’ 한권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2주년이 되는 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을 틈타 국민들이 포근히 잠자고 있을 새벽 4시에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했다. 3일 만에 서울이 뚫리고 전국은 불바다가 됐다. 53년 7월 27일 휴전되기까지 37개월간 국군 20만4113명을 비롯 우리 국민 100만명 이상이 희생됐다. 북한도 군인과 주민 등 157만여명이 전사하는 등 전쟁사상 가장 참혹한 동존상잔이었다. 호주머니에 넣고 전선으로 내가 예수와 인연을 맺은 것은 62년 전, 전쟁이 나던 바로 그 해다. 스무살 때 김현정 목사님의 부흥집회에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그 해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6·25 발발 18일 후인 7월 13일 나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보병 수도사단 제26연대에 입대했다. 집을 떠나던 날 아침 마지막 가정예배를 드릴 때의 일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찬송 455장 4절 ‘내주와 맺은 언약은 영원불변하시니’를 부르다 목이 메어 온 가족이 한데 엉켜 울음바다를 이루었던 일을…. 어머님과 가족에게 “며칠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하직인사를 남기고 떠날 때의 내 휴대품은 단 한 권의 포켓용 성경뿐이었다. 나는 6·25 전란에서 무수한 사선을 넘나들었다. 전세가 기울어 남으로 후퇴할 때 그 치열했던 낙동강, 포항, 안동, 기계전투에 참전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세가 회복돼 북진할 때 우리 부대는 양양, 원산, 함흥, 흥남, 삼수갑산, 북청, 장진발전소 등지의 적진을 격파하면서 진군했다. 북위 42도선인 함경도 혜산진 압록강 상류에 부대의 수비진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한때는 적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탄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나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는 마음과 평소 지니고 있던 성경의 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낡아빠진 내 성경은 제2의 생명과도 같이 귀중한 것이었다. 전투 중에도 시간만 나면 재빨리 한 구절 읽고 명상에 잠기는 것이 진중생활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나는 항상 군복 상의의 안주머니에 성경을 간직했다. 그토록 소중히 지녔던 성경이 지금은 아마도 어느 북 능선에 전우의 영혼과 함께 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북한지역 안변전투에서의 일이었다. 어느 날 파편에 중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오는 전우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뛰어가 보니 아래턱이 파열돼 피투성이가 된 채 말을 하지 못하고 나를 보더니 손짓으로 무엇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저것 지적해도 응답이 없었는데 군복 상의에서 성경을 꺼내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2의 생명처럼 간직한 성경을 위독한 상태의 전우 가슴에 안겨주고 두 손 모아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26연대 위생병이었던 경남 동래출신의 이명선으로 기억되는 그는 결국 후송된 후 사망했다고 한다. 마지막 가는 전우 가슴에… 나는 6·25전쟁의 전공으로 은성충무무공훈장을 받은 것도 모두 성경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흘러 80대 노년이 되었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는 백발로 변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성경이 남아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사선에서, 수많은 죽음의 고비 앞에서도 용기를 준 그때의 성경이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증거했던 그때의 신앙심이 그립기만 하다. 문길수 ㈔6·25참전 학도의용군 군산지회 창설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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