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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애란 (9) 北 3대 출세 줄기… 백두산·봉화산·오산덕 줄기

열려라 에바다 2012. 7. 21. 18:42

[역경의 열매] 이애란 (9) 北 3대 출세 줄기… 백두산·봉화산·오산덕 줄기
 
세상은 넓고도 좁았다. 1976년 겨울 평양에서 추방된 사람들 속에는 어머니의 이모 가족도 있었다. 추방 원인은 이모할아버지가 6·25 때 남쪽 치안대를 위해 하룻밤 경비를 서준 게 탈이었다. 우리 가족 추방에 이어 2년 뒤 이모할머니 가족까지 한 골짜기로 추방된 것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우리 4남매는 외6촌 숙부와 함께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됐다. 하지만 서로 모르는 척해야 했다. 서로 아는 척하다 동네 사람에게 친척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저것들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가족이 한 골 안에 쫓겨 왔나”라는 말이라도 들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모할아버지는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분이셨다. 이모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지만 20년이 넘도록 얼굴빛 한번 달리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워낙 마음이 착해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6·25전쟁 때 치안대에서 경비를 서지 않으면 죽인다고 해 경비를 하루 서주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북한은 공식적인 자리에선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하지 않다. 본인의 현재생활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언급하면서도 실제로는 조상 뿌리까지 파내어 차별을 하고 처벌을 했다. 어머니는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팔자가 사나우면 이붓새끼가 삼년맏이라고 하더니 정말 이건 무슨 놈의 꼬부랑 팔자인지 몰라. 아니 세상은 넓은데 그렇게 갈 데가 없어. 이 좁은 골 안에 함께 쫓겨 오나”라고 한탄을 하셨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 4남매의 가슴에 나날이 쌓여가는 것은 남으로 월남하셨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다.

“왜 조국을 배반해 우리만 고생시키나.”

4남매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단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것뿐이었고 행방불명은 6·25 때 월남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형제가 몇 명인지조차 몰랐다. 가끔 학교에서 가계표를 작성해 오라고 했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 옆에 ‘사망’이라고 적으라고 하셨다. 하긴 사망이라고 써넣는 것이 편했을지 모른다. 살아 있으면 해방 전엔 무엇을 했는가, 전쟁 때나 일시적 후퇴 시기엔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혹 후퇴를 하지 못했으면 왜 후퇴를 하지 못했는가, 적 기관에 근무한 적은 없는가, 전후복구 건설 시기엔 무엇을 했는가, 현재는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 아주 구체적인 신상명세를 적어내야 하는데 사실 우리같이 뒤가 켕기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었다.

소위 성분이 좋다고 하는 집 아이들은 죽은 사람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고 시시콜콜 적어 넣곤 했다. 하지만 우리같이 떳떳하지 못한 집 아이들은 생사에 상관없이 ‘사망’이라고 쓰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죽었다는 데야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죽어도 바로 죽지 못하면 살아있는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이 그 시절에 배운 철학이었다. 북한에서 얼마나 성분제도가 철저한지 어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아니 일제 때 왜 경찰서에 돌이라도 한 번 던지시지. 멍청해서 아버지는 뭘 하셨어요?”

김일성 계열이라고 하는 ‘백두산 줄기’와 김일성 애비 계열인 ‘봉화산줄기’, 김일성의 처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 줄기인 ‘오산덕 줄기’ 등은 북한이 봉건제도보다 연줄과 출신성분을 더 중시하는 혹독한 계급사회임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하겠다. 어쨌거나 탄압이 심할수록, 철이 들수록 아버지의 과거, 즉 족보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주민등록 요해(了解)문건’을 꼭 좀 알고 싶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