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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찾아온 시련 앞에서 울고 절망하면서도 평양 사람들은 산골 생활에 적응해 갔다. 우리 식구들도 추위와 거친 음식에 적응돼 있었다. 이게 현실이 아니고 꿈이기를, 자고 깨면 새로운 현실이 기다리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악몽은 계속됐다. 생소한 곳에서 고달픈 생활을 한 지 3년째 접어들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자랐다. 건강이 좋지 못해 비실비실 앓던 나도 어느덧 거친 광야생활에 단련이 됐는지 산에서 나무도 패고 사내아이마냥 드센 계집애로 성장하고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맏딸은 금딸’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힘쓰는 일이 많은 산골 마을엔 장정이 많아야 덕을 볼 수 있었다. 동생들은 아직 어렸다. 나는 겨울방학이면 남동생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패 쪼개오곤 했다. 힘도 자꾸 쓰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비실거리던 우리들도 한 3년 겪고 나니 힘도 세졌다. 웬만한 통나무는 혼자서도 거뜬히 끌고 다닐 수 있게 됐다. 해마다 반복되는 나무패기와 감자농사, 철길공사, 고사리전투, 송진따기, 약초캐기, 월동준비 등이 어느새 손에 익숙해졌다. 양강도 삼수군 관동리 땅에는 해마다 평양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방돼 왔다. 특히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엔 3차에 걸쳐 100여 가구가 평양에서 다시 추방돼 왔다. 모든 집들은 평양 사람들을 ‘동거’ 가족으로 들여야만 했다. 그 마을엔 출장 올 사람도 없어서 여인숙도 없었다. 우리 집은 부엌과 집안을 통틀어 5m×3m였는데 단칸방에 부엌과 방의 경계가 없는 집이었다. 그러니 비밀이 없었다. 부엌문만 열면 모든 것이 오픈돼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면 부부가 같이 누워 있다가 들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 그곳 사람들은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우리 식구만 살아도 성냥개비처럼 차곡차곡 누워야 하는데 다른 집 식구가 3명이나 더 들어오니 비좁아 앉아있기도 민망했다. 더구나 나랑 동갑이고 한 학급에서 공부하게 될 경철이라는 남자애가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저녁에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같은 또래 남자애가 우리 집에 동거들었다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식량이 귀한 곳이라 누구에게 저녁식사 한 끼 얻어먹는 것조차 엄청난 신세를 지는 곳이었다. 저녁식사 시간까지 가지 않고 남의 집에 눌러앉아 있는 사람을 북한 사람들은 ‘민하다’(우둔하거나 미련하다는 북한말)고 욕했다. 학교에서 끝나면 빨리 집에 돌아와 다음날 먹을 감자를 깎아야 했다. 물도 길어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늦게 들어오면 엄마한테 욕을 얻어먹기 일쑤였다. 당시 평양에 아마 살벌한 이주 바람이 불었던 모양이었다. 평양에서 사시던 외할머니 가족이 평안도 개천으로 이주했다. 외삼촌이 돌아가셨는데 집에 남자가 없고 노인과 어린이, 여자만 있어 전쟁에 대비한다고 하면서 이주시킨 이른바 ‘소개’(‘추방’을 다듬은 북한말)였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이렇게 수많은 평양사람의 보금자리를 빼앗았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평양에 장애인들은 살 수 없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장애인 자녀나 장애인 식구를 둔 사람들도 거의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빼앗는 방법은 북한이 그동안 가장 많이 사용한 주민통제방법이다. 경철이네는 한 달 우리 집에 함께 살다가 나갔다. 경철이네가 우리 집에서 나가자마자 평양에서 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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