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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로 들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 양강도 산골마을 아이들에게도 사춘기는 찾아왔다. 모두들 성(性) 정체성과 이성에 대해 궁금해 했다. 어떤 남자애는 자기 맘에 드는 여학생을 점찍어 두고 은근히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여학생은 여학생들대로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변화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도 몹시 알고 싶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사고가 났다. 갑자기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로청 지도원과 교장선생, 학교 당비서 선생이 한꺼번에 호통을 쳐댔다. 이유인즉 우리 학교에 ‘수정주의 날라리 바람’, ‘퇴폐적인 황색바람’, ‘양풍’이 불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문제로 지목된 우리 반은 밤 12시가 넘도록 집에 갈 수 없었다. 밤늦게까지 자백서를 써야 했다. 아이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했다. 왜 자백서를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그동안의 훈련대로 자백서에 김일성 교시를 맨 위에 쓴 뒤, 상투적인 잘못에 대해 나열했다. 김일성 교시와 비교해 자신의 생활에서 부족한 점, 표현 형태, 이런 결함이 나타나게 된 원인과 대책 등. 알고 지었건 모르고 지었건 모든 잘못을 고해성사처럼 고백해야만 했다. 공산당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 중 하나는 범인을 잡기 위해 아무 잘못 없는 사람도 범인이 나올 때까지 똑같이 처벌하는 것이다. 범인을 잡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대체로 의심이 가는 사람은 왕따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엉뚱하게 죄를 뒤집어쓰는 경우도 많았다. 기온이 내려가고 밤이 깊어질수록 아이들의 불평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누기야? 어떤기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하니야? 빨리 나와라.” 춥고 배가 고픈 아이들이 가장 크게 목청을 높였다. 만일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매 맞아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추궁 끝에 평양에서 추방된 박광일이라는 남학생으로 밝혀졌다. 광일이네 집에 아이들이 놀러 갔다가 그 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러시아어로 된 내과학 전서와 생리학 전서를 본 것이 문제였다. 사실 그 책은 의학 전문서적이었다. 광일이 어머니가 평양에서 의학공부를 하느라 구입해 두었던 것이었는데 어린 생각에도 그렇게 문제가 될 정도의 불온서적은 아니었다. 한창 사춘기를 겪는 소년들이 이 책을 무심결에 빼들었다가 인체 해부도와 성병과 임질, 매독이라는 병에 대해 서술한 대목에서 남녀 생식기가 찍힌 사진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 몇 명이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책을 집에서만 봤으면 문제는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창 호기심이 많은 나이라 이 말을 학교에 와서 다른 남학생들에게 했고, 그러다보니 이 책이 인기가 올라가 학교까지 가져와 쉬는 시간에 모여 봤는데 선생님한테 들킨 것이었다. 사춘기 소년들의 호기심으로 벌어진 이 일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부모까지 불려와 비판서를 썼다. 그 책은 수정주의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압수당했다. 아이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수정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사상 분야와 관련된 용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우리들은 남녀의 섹스나 생식기 등이 수정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됐다. 만일 도시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아마 산골로 추방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산골에선 더 추방갈 곳이 없었기 때문인지 마무리됐다. 다만 광일이는 개인문건에 오점이 남았다. 개인문건은 전과기록으로 북한의 어느 지역에서 살든지 또 어떤 직업을 갖든지 출세와 생활에 영향을 준다. 요즘 남한은 초등학생들도 음란동영상을 본다고 하는데 의학서적 인체도를 본 것만으로 처벌을 받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참 놀라운 곳이 아닌가. 이런 것들이 처벌이나 출신성분 자료로 사용되니 한동안 북한에선 이런 정치적인 낙인을 벗겨주자는 캠페인까지 벌어진 적도 있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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