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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기쁜 일이 생겼다. 아버지가 양강도 혜산 시내에서 일하시게 돼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산골 양강도 삼수군 관동리 땅을 벗어난 것은 내겐 큰 기쁨이었다. 그해 혜산시 봉흥고등중학교 4학년에 입학했다. 도시 학교엔 학생도 많고 실력이 쟁쟁한 아이들이 많았다. 매주, 매월 시험을 봐 순위를 결정했다. 밤을 새며 공부에 열중했다. 좋은 대학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수학 성적이 학급에서 1등으로 나왔다. 국어나 물리, 화학도 제일 잘했다.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시내 22개 학교가 참가한 수학 경연에서 10위권에 들었다. 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전국 수학 및 외국어 경연을 진행했는데 수학 부문 4위를 차지했다. 1등을 하게 되면 시험을 치르지 않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하지만 4위도 전국 순위였기 때문에 중앙에 있는 대학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일약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이 됐다. 드디어 대학 추천서를 받는 시기가 됐다. 다른 아이의 부모들은 학교나 교육부를 드나들며 뇌물을 주고 각종 방법을 동원해 자식들의 장래 문제에 발 벗고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난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멀리 작업을 가셔서 아이들이 졸업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또 어머니는 가정의 생계를 꾸려 가시기에도 힘들고 고달팠다. 결국 나는 대학 추천을 받지 못했다. 담임선생은 학급 학생들이 있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야, 네가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는 줄 알아?” “부모 생활도 너절한 주제에 대학은 무슨 대학이야.” “대학은 민족간부의 양성기지야, 공부만 잘한다고 다 대학 가는 거 아니야.” 그날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까지 실력전이라고 하던 것은 다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무슨 그렇게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기가 막혔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왔는데 달려와 보니 그곳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울화가 치밀어 아프다고 하고는 일주일을 결석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학교에 다시 나가자니 애들 앞에서 당한 망신 때문에 부끄러워 나갈 수 없었다. 그냥 누워 있자니 집안 식구 보기도 미안했다. 17세 소녀의 힘으로 세상의 장벽을 헤쳐 나가기에는 입은 타격이 너무 컸다. 출신성분의 장벽이 너무 두꺼웠기 때문이다. 부모가 싫었고 아버지를 버리고 남으로 갔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미웠다. 갑자기 세상이 싫어지고 두려웠다. 생각 끝에 살충제가 생각났다. 빈대 잡는 데 쓰느라고 구해둔 우와독소라는 농약이었다. 커다란 컵에 넣고 물을 부었다. 쉽게 죽으려면 농도가 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진하게 풀었다. 우윳빛 액체의 겉면에는 파란빛이 감돌았다.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컵을 들어 농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입을 떼면 더는 마시지 못할 것 같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20분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정신이 점점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는 독약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폭삭 넘어지는 것을 많이 봤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러다가 죽지도 못하고 장애인이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다음날 새벽, 나는 병원 침대에서 정신을 차렸다. 배급표 정리하러 오셨던 어머니가 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 병원으로 이송했던 것이다. 때마침 응급치료를 해 위급한 순간은 넘겼다고 의사가 말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는 그때 장을 여러 번 세척하고도 한 달간이나 병원에 입원해야만 됐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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