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역경의 열매] 이애란 (20) 美 작은아버지 편지엔 태어나 처음 본 ‘하나님’이

열려라 에바다 2012. 8. 5. 20:17

[역경의 열매] 이애란 (20) 美 작은아버지 편지엔 태어나 처음 본 ‘하나님’이
 
“지금까지 북한에 홀로 떨어진 용운이 형님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에서 온 작은아버지의 답장에는 내가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말이 들어 있었다. 또 동봉한 사진 속 액자에 ‘오늘도 이 한날을 주를 위하여’라는 글귀도 낯설었다. 주를 위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내심 불안했다.

아버지 가족들이 미국에서 종교를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 가족이 해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북한은 기독교를 싫어했다. 그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마약과 같다”고 가르쳤다. “원쑤도 사랑하라, 원쑤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마저 내대라”고 하는 기독교 순종의 교리가 사람을 무지하게 만든다고 했다. 또 기독교는 미제의 해외 침략의 사상적 도구이며 식민지 통치의 수단이라고도 했다.

인민학교 국어 교과서엔 ‘승냥이’라는 제목으로 된 미 제국주의 선교사의 야만적 행위에 대한 글이 있다. 코쟁이 미국 선교사가 황해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교회 마당에는 무서운 사냥개를 매놓아 동네 사람이 함부로 교회당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마당에는 사과나무가 있었다. 가을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고 가을바람에 잘 익은 사과 한 개가 땅에 떨어졌다. 그때 수길이라는 소년이 그 앞을 지나다 사과를 주워 먹으려 울바자 밑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마침 이를 교회 창문으로 지켜보던 선교사는 소년을 붙잡았다. 사과나무에 소년을 꽁꽁 묶고 사냥개를 풀어 물어뜯게 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청강수(짙은 염산: 살에 대면 화상을 입게 됨)를 가져다 소년의 이마에다 나무꼬챙이로 ‘도적’이라고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또 미국 선교사는 북한 곳곳에 ‘자선’과 ‘박애’라는 간판을 내건 기독교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돈 없고 병든 백성을 치료해준다고 속여 데려다 생체실험을 하고 피를 뽑는다고 했다. 장기를 뜯어내 다른 나라에 팔아먹고 부모 없는 고아를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었다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는 가족이 생사를 물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천당으로 갔습니다”라고 하면서 시체를 불태워 버리거나 알 수 없는 곳에 생매장을 한다고 했다.

한동안 북한은 남한과 북미지역의 종교인을 포섭하기 위해 애썼던 적이 있다. 당시 남한에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을 만나러 왔다.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도 다녀갔다. 문 목사가 다녀간 후 북한에서는 문 목사는 종교인인데도 김일성의 위대함에 감복해 김일성 앞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당시 김일성은 문 목사에게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으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면서 김일성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작은아버지는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평양에 살던 형님이 왜 양강도에 살고 있는지가 궁금한 것 같았다. 헤어질 때의 상황과 평양 생활의 추억을 확인하는 내용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양강도 혜산에 살게 된 경위를 알리는 두 번째 편지를 썼다. 하지만 아버지 가족이 월남해 반동으로 몰려 평양에서 추방됐다는 이야기는 뺐다. 북한이 싫어하지 않는 말을 골랐다. 물론 수령님의 배려로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것과 해외 동포로서 수령님의 조국통일 방침을 받들어 해외에서라도 통일운동에 기여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혹시 미국 가족들이 몰라서 북한을 비방하는 말을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흑백 독사진도 편지에 넣었다.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철저한 검열을 하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미국에서 편지를 받게 된 것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우리 가족은 졸지에 재미 연고자라는 딱지까지 붙게 됐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